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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함석헌, 종교

[김영호 제3강] 함석헌과 불교사상-개달음의 주체성과 내면성

by anarchopists 2020. 1. 2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4/15 10:04]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과 불교사상
깨달음의 주체성과 내면성


함석헌의 사유와 불교적 사유의 공통성을 확연히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로 진리인식의 주체성을 들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종교인식론 차원에서 볼 때, ‘생각’이 함축한 것처럼, 함석헌은 계시보다는 자각을 강조한 모습이 농후한 것을 알 수 있다. 계시를 위주로 하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과는 다른 모습인 것이다. 그의 신앙과 사유체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나님’은 진리의 근원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반드시 인격적인 존재로만 인식된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그가 대망하고 파악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를 통해서인가, 자각을 통해서인가 하는 문제는 엄격하게 분별하고 단정하기 힘들다. 두 가지가 문화적인 차이로 본다면 함석헌 안에서 문화통합이 일어났다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두 가지가 다른 것이냐 하는 문제가 상존하지만 함석헌이 두 인식수단 사이의 거리를 좁힌 셈인 것은 분명하다.

이 사실을 논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삼을만한 사례가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수의 선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에 대한 해석이다. 여기서 ‘나’가 누구냐는 것이 현안이다. 말할 것도 없이 전통적인 기독교에서는 당연히 예수자신이다. 이 점에서 함석헌은 전통적 기독교의 해석에서 확연히 벗어난다. 요컨대 ‘나’는 예수자신이 아니고 주체적 ‘나’이다. 그는 이 주제를 반복해서 다룬다.

예수는 말하기를 ‘내가 길이요 참이요 생명이다’ 했다. 그랬단다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예수는 길이요 예수는 참이요 예수는 생명이라고 떠들지만, 예수임 불쌍해라. 그 말씀을 어찌 그런 의미로 했겠나? 내가 길이요 재가 참이요 내가 생명이란 말이다. 예수가 그 말을 하면서 어떻게 했던가? 두 다리를 뒤로 뻗고 두 필을 앞으로 뻗어 엎이면서 ‘나를 밟고 건너가’ 하지 않았나? 그는 길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길이 됐고, 참을 설명한 것 아니라 자기가 참을 했고, 생명의 신비를 보여준 것 아니라 자기가 바로 생명이 됐다. 그러기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 하지 않았나? 오해해서는 아니 된다. 나는 살아야겠다는 우리 욕심이 우리로 하여금 오해하게 한다. 그는 두 세계에 다리를 놓아 둘을 하나로 살린 것이다. 죽음과 삶, 선과 악, 영과 육, 지배과 피지배, 전쟁과 평화, 나와 세계, 이 둘로 갈라져 영원히 건널 수 없는 끊어진 벽에 다리를 놓아 하나로 살려낸 것이다. 그 다리가 무엇이냐? ‘나’, 나란 말 아닌가? 예수가 아니라, 이 나란 말이야. 산 하나를 죽여 갈라놓은 것이 이 살겠다는 나기 때문에 그 죽은 세계를 살려내는 것은 그 나의 죽음이란 말이다.” (전집12:289)

이러한 해석은 함석헌의 초기 신앙 시기를 지나 (전집19:299 참조) 후기 신앙과 담론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나는 퀘이커가 되자고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닙니다. 퀘이커만 아니라 무엇이 되자고 온 것도 아닙니다. 종교가 나 위해 있지 내가 종교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면 알고도 모른 말입니다. 옳고도 잘못입니다. 예수가 아닙니다. ‘나’입니다. 누구의 나란 말입니까? 아니, 아니, 누구의 나도 아닙니다. 나의 나, 너의 나 하는 나는 작은 나, 거짓 나입니다. 누구의 나도 아니요, 그저 ‘나는 나다’ 하는 그 나가 큰 나요, 참 나입니다. 그 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 나는 그 나를 위해 그 나로 인해 있습니다. 나는 그 나 안에 있습니다. 혹은 그 나는 내 안에 있습니다.”(전집4:202-3)

“나는 길이요, 참이요, 삶이다. 저를 내놓고 저를 모르고, 저를 살리지 않고(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께 갈 수는 없다. 내가 나를 바로 가지면 나를 쓴 것이요, 먹은 것이다. 나는 없어졌다. 내가 나를 바로 알면 나를 버린 것이다. 나는 죽어버렸다. 내가 나를 바로 사랑하면 나는 죽어버려졌다. 나는 죽었다. 그럼 내가 그리스도다.”(전집4:398)

이는 불교에서 석가의 유훈인 ‘자등명’ 즉 주체적, 자율적 자각과 통하는 해석이다. 무아(無我)론의 취지와도 부합한다. 함석헌의 ‘나’는 복합적인 차원을 지닌다. 불교에서도 ‘가짜 나’(假我) 또는 ‘작은 나’(小我))와 구분되는 ‘참 나’(眞我) 또는 ‘큰 나’(大我)가 가정된다. 함석헌은 바로 그 양면적인 ‘나’를 언급하고 있다. 수행과 실천면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함석헌이 본 예수가 보인 적극적인 자기희생의 길이 초기불교의 소극적 내면인식이나 깨침과 대조된다. 물론 그 차이는 나중에 대승불교에서 전개된 보살사상의 맥락에서는 다소 희석된다. 여기서 ‘나’를 그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나’로, 불교 무아론의 맥락에서 부정되어야 할 대상으로서만 본다면 함석헌을 불교와 일치시키는 환원론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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