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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함석헌, 종교

[김영호 제2강] 함석헌과 불교- 생각과 깨달음

by anarchopists 2020. 1. 2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4/14 23:54]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과 불교
생각과 깨달음

불교사상의 요체를 몇 가지 주요 개념으로 말하면 자각(깨달음), 고통과 욕망, 무아(無我), 연기(緣起), 중도 등과 이 있다. 여기에 후에 발전한 대승불교사상으로 공(空)관, 보살정신, 유심론, 선(禪)사상 등이 덧보태진다. 함석헌의 사유내용은 근본적으로 이 개념들과 배치되지 않으면서 오히려 현대정신에 맞게 해석, 더 발전시킨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불교인들이 오히려 채용해야할 해석이 들어있을 수 있다. 주요한 몇 가지 접촉점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그 첫째가 깨달음이다.

함석헌의 신앙인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는 인식론적으로 전형적인 차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타율적인 계시와 자율적인 자각이라는 것이다. 계시는 그 근원으로서 절대자나 신을 전제로 하지만 자각은 내면적 인식의 열매이다. 함석헌이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고 극복하거나 조회시켰는지, 아니면 차이를 강조했는지 궁금한 일이다. 기독교성서에 나오는 선지자나 사도들은 하나님이나 예수에게서 받은 계시를 세상에 전한 메신저들이다. 신의 뜻은 계시를 통해서만 알려진다.

불교는 ‘불’(佛 Buddha "깨친 자”)이 의미하듯이 깨달음을 출발점과 목표로 삼는 종교이다. 불교의 출발점은 석가모니의 대각이었으며 그와 같이 깨닫는 것이 모든 수행의 목표가 된다. 고통의 반복인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을 얻는 구체적인 방법이 의식의 근원적 변환 즉 깨달음이다. 부처의 마지막 당부도 “스스로 밝혀가라”(自燈明) 즉 자각이었다. 자력(自力) 수행은 기독교와 같은 타력신앙과 대조된다. (미륵보살이나 아미타불 같은 중보자가 구세주처럼 역할 하는 타력(他力)신앙은 대승불교의 발전과정에서 덧보태진 부분이다. 신앙 측면은 또 다른 접점을 구성하지만 여기서는 석가의 근본교설과 그 변형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함석헌은 계시를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는다. 인정하지만 해석이 색다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종교다. 하나님의 계시라 함은 반드시 어떤 천래의 음성이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들리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전집3:109). 역사적으로, 전체적으로, 인격적으로, 생명 차원에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함석헌의 인식론은 ‘생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생각은 주관적인 것으로 객관적인 계시와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렇다고 그것이 자각과도 가깝다고 볼 수 없다.

생각은 주체와 객체를 전제하는 이분법적 사유의 주범이다. 너와 나의 가름(分別)은 생각에서 나온다. 분별이 번뇌와 고통의 싹이다. 모든 생각은 결국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생각이나 잡념일 뿐이다. 그래서 불교 수행은 무념무상(無念無想)을 내세운다. 그것은 주체/객체 분별을 없애는 것이다. 그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현대의 성자 크리슈나무르티도 모든 생각이 ‘나’와 이기주의를 일으키고 고통과 두려움의 원인을 제공한다고 일관되게 강조했다.

이처럼 종교적 차원에서 볼 때, 사고(생각)는 언어처럼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 많다. 선불교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노자는 ‘지자불언언자부지’(知者不言言者不知)를 말한다. 종교적 가치에 모든 것을 수렴시키는 함석헌이 ‘생각’을 강조하다니 어인 일인가. 그의 말씀에서 생각은 주요한 열쇠말로서 마치 진리인식의 유일한 수단처럼 기능한다. 혼란이 일어난다. 과연 함석헌의 ‘생각’은 보통의 일상적인 사고인가, 초월적인 사유인가.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인가. 그것은 아무래도 다차원적이고 복합적인 것일 수밖에 없을 터이다. 그가 의미하는 ‘하나님’이 유신론적, 기독교적인 신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처럼 생각도 의미의 스펙트럼이 다층적이고 폭넓다. 함석헌이 의미하는 생각은 일상과 현실에서 출발하지만 일상적인 것을 벗어나는 이중 차원을 지닌 것이다. 그는 사고의 한계를 의식한다.

“생각을 한다. 생각을 하는 것이 사람이니,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생각이 생각을 낳고 생각이 생각을 먹는다.... 생각이라는 용광로에 떨어지면 모든 것이 생각으로 녹아버리고 생각이 식으면 가지가지의 결정체가 나온다.... 참(진리) 생각해 보자고 했는데 참〔생각〕할수록 하고 나면 빈탕이다.” (전집2:164)

‘빈탕’은 불교의 ‘빔’(空)을 연상시킨다. 이 맥락에서 생각은 종교적 차원의 명상(冥想)에 해당한다. 함석헌은 생각을 ‘들이파야’ 한다고 말한다. 집중과 명상이 암시된다. “죽어서도 생각은 계속해야 한다. 뚫어봄은 생각하는 데서 나온다.”(전집2:12) ‘뚫어봄’은 종교적 통찰, 활연관통(豁然貫通)으로 이끄는 인식작용이다. ‘생각’이라는 우리말의 어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원래 우리말이 아니고 한자(‘生覺’)에서 온 말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覺)을 일으킨다(生)”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깨달음도 단순한 사실의 인지(깨침)에서 우주적 의식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이듯이 생각도 복합적인 개념이다.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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