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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평화

[김삼웅 제4강]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소

by anarchopists 2020. 2. 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2/12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김삼웅의 함석헌을 말한다-4]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소?”

김시습이 미친 모양을 하고 다니며 길가(세조치세)에 오줌을 쌌다. 그것이 누구냐? 그가 길을 가다가는 주저앉아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소?”하고 통곡하던 바로 민중 그 자신이 아닌가? 오줌을 쌌다니 어디다 싼 것일까? 세조의 정치에 대해, 바로 세조의 얼굴에 대고 싼 것이지 뭐냐? 칼을 뽑아 물을 잘라도 물은 오히려 흐른다고, 사람의 모가지는 자를 수 있어도 민중의 오줌인 신화, 전설, 여론은 못 자를 것이다. 봐라! 두고 봐라! 한이 뼈에 사무쳤다니 원수라도 갚을까 봐 겁이 나 그러냐? 비겁하다! 그게 아니다.

미친 체 오줌을 싸는 것은 원수 갚을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비겁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에서 싸는 오줌이 아니야. 오줌 쌈을 받는 놈보다는 스스로 좀 넓고 큰 것이 있기 때문에 하는 거야. 소원이야 예수처럼 죽으면서도 죽이는 놈을 위해 복을 빌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만한 얼의 실력은 없으니, 오줌이라도 싸는 것이다.


함석헌은 이 글에서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장자, 휘트맨 등 들사람의 정신을 소개하면서 참 삶의 가치를 보여준다. 함석헌은 말한다. “지금 우리나라엔 영리한, 약은 문화인만 있고 어리석은 들사람 없어 이꼴이다. …들사람이어 옵시사! 와서 이 다 썩어져 가는 가슴에 싱싱한 숨을 불어넣어 줍시사!”

함석헌의 이 글은 5.16 쿠데타로 기백을 잃은 젊은 지성인들에게 한줄기 석간수처럼 목마름을 달래주었다. 그리고 본인은 한 마리 ‘야생마’처럼 포악한 독재와 싸우면서 민주주의와 씨알의 권리를 지키는 등대지기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들(野)’은 거칠고 투박함을 상징한다. 그 대신 순수하고 자연적인 힘을 갖는다. 옛날에는 지배세력은 성(城) 안에 살고 피지배층은 성 밖에 살았다. 성 밖의 씨알ㆍ민초ㆍ백성들이 성안 귀족들을 먹여 살렸다. 전쟁이 나면 그들이 성을 지키려 싸우다 죽었다. 들은 이들의 백골로 덮히고, 부토가 되어 씨앗을 키웠다.

그럼 달리는 차 같은 이 시대 풍조에 어떻게 하나? 누가 죽을 각오를 하고라도 브레이크를 밟는 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자기는 미쳤다는 소리를 듣다 죽더라도 휩쓰는 이 물결을 막으려 홀몸으로 나서는 야인, 들사람이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엔 영리한, 약은 문화인만 있고 어리석은 들사람이 없어 이꼴이다.

함석헌은 태어나기를 평안도 용천 바닷가 상민출신의 야인이었다. 조선왕조가 지역차별로 소외시킨 데다 가계상으로도 한번도 벼슬을 하지 못한 평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장기의 배경도 들사람의 상황이었다. 나라가 망할 무렵(1901년)에 태어나 감수성이 예민한 19세 때에 3ㆍ1운동을 겪었다. 오산학교에서 들사람 류영모ㆍ이승훈ㆍ안창호ㆍ조만식을 만나면서 기독교신앙과 민족의식에 눈뜨게 된다. 동경 유학시절에 겪은 대진재와 야인사상에 접하게 되면서 함석헌의 ‘들사람’의 혼이 성장한다.

함석헌은 이 글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바벨탑 이야기를 모르나? 이제 우리가 아무리 지식 기술로 떨어졌다 하더라도 정말 우주적인 크고 높은 정신에 철저하다면, 소련이나 미국의 지금 앞선 것쯤은 문제 아닐 것이다. 하면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생각과 정력을 몇 해나 더 민중을 누르고 짜먹을 수 있나 거기만 쓴단 말이냐? 너희 생각이 그렇게 작고 비루하니까 너희 자식들이 저렇게 망나니가 되지. 그러나 이제라도 아니 늦다!
빈 들에 외치라!

함석헌이 살아 온 시대적 배경, 분단ㆍ6ㆍ25전쟁ㆍ연이은 독재정치는 그의 야인정신을 저항정신으로 체화시킨다. 그가 걸어온, 걷고자 한 야인의 길은 권력ㆍ종파ㆍ세력ㆍ집단화를 거부하는, 순수 재야의 들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말은 무게가 있었고 글은 비중이 실렸으며 그의 노선은 민중이 따랐다. 야인정신에 함께하기 마련인 저항정신으로 하여, 함석헌은 폭압의 시대에 ‘싸우는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척박한 이 땅의 들길에서 반독재와 평화통일, 그리고 씨이 주인이 되는 민주화의 소금수레를 끄는 야생마의 역할을 다 하였다.


김삼웅 선생님은
■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시고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로 계시다가 그후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 민주화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 위원과 독립기년관 관장을 지낸바 있으시다. 지금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신다.

■ 선생님은 최근에 "책벌레들의 동서고금 종횡무진"을 쓰셨고, 날카로운 필치로 주로 인물평전을 많이 쓰셨다. "안중근평전", "백범김구평전", 녹두전봉준평전", 만해한용운평전", 단재신채호평전" 등이 있으며 지금은 오마이뉴스에 "장준하평전'을 연재하고 계신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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