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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어록 365일

[김상태의 함석헌 읽기] 함석헌의 교육철학 1

by anarchopists 2020. 1. 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10/25 07:18]에 발행한 글입니다.


교육은 어버이 같은 마음으로 하라

함석헌의  「새 시대의 전망」이라는 글은 1959년에 쓰셨다. 함석헌저작집 3권의 다른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이글들을 읽으면서 도무지 1959년에 쓰여진 글이라는 느낌을 갖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한 구절을 인용해 보자.

‘…전략… 국민학교 아동으로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동무 사이에 서로 부르는 “이 자식” “임마”라고 있는데 아무리 열등한 학교, 아무리 부족한 선생이라도 아마 이것을 이대로 해도 좋다 하고 또는 관계하지 않고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여기 대한 말이 많은 만큼 반드시 학교로서는 이것을 수정하려고 힘을 쓰고 있을 줄 안다. 그런데 왜 아니 되나. 이런 것은 피교육자에게 크게 힘이 드는 것이 아닌 이상, 바로 하기만 하면 쉽게 그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런데 그 효과가 나지 않는다면 현 교육 방법 그 자체게 잘못이 있다 할 수밖에 없다.’

첫 글을 읽으면서 글을 읽는 진도가 쉽게 나아가지 않는다. 2010년의 관점에서 본다면 51년전의 사회의 모습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강산이 5번이나 변했다고 이야기 하는 현재와 우리의 교육은 무엇이 달라졌을까? 오히려 이 같은 우려는 개선이 되지 않고 훨씬 나쁜 쪽으로 진행되었다면 이해가 될까?

필자의 집 바로 옆에는 여자고등학교와 초등학교가 있다. 이들의 등하교 시간에 학생과 마주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초등학생보다 오히려 여고생들의 대화를 곁에서 듣고 있자면 민망해서 들을 수 없을 정도이다. 또 연구소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타면 학교 길의 대화와 별반 차이가 없는 소리를 차안에서도 들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누구도 이 같은 대화의 내용에 대해 한마디 거드는 사람이 없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겨우 대학 강의실에서나 이 같은 소리를 들을 때 그 학생들에게 언어순화적인 측면에서 몇 마디 하는 것에 위안을 삼고 있는 비겁함을 보이게 된다. 이 같은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어른이 없는 사회 모습의 전형이다.

1980년대 대학원 시절 사학과, 국문과 선생님과 저녁을 함께 한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오가던 중 국문과의 한 선생님이 음담패설로 좌중을 압도하셨다. 그 선생님의 음담패설을 들으면서 참으로 선생님이 별 볼일 없다는 생각이 아니라, 이야기를 참으로 구수하게 민망한 이야기를 맛나게 하신다는 느낌이었다. 지금 같으면 같이 여학생이 ‘성희롱’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똑같은 음담패설이나 험악한 말인데도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였다고 생각이 된다.

‘…전략…누구라도 지금 학교에서 얻는 것을 학교 말고도 도서관에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잇다. 그럼 지금 학교가 있는 것은 엄정히 말하면, 교육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고 다른 필요, 지식인의 농민지배라든가 지배계급의 자기옹호라는가 그런 것 때문에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학교나 교육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이미 학교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지 오래이다. 오히려 과거보다도 이 같은 양상은 심화된 느낌이다. 전근대 사회의 신분제도는 참으로 뛰어넘기 어려운 한계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갑오경장 이후 반상의 구별이 없어지면서 공식적으로는 신분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후 우리는 평등한 아니 동등한 사회에 살고 있는가? 과거의 신분의 벽이 넘기 어려운 산이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신분의 벽보다 더 넘기 어려운 계층의 벽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흔히들 ‘개천에서 용 났다’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그런데 이런 표현도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요즈음은 이런 표현이 ‘개천에서는 이무기만 나온다’라는 말이 훨씬 통용되고 있다. 두 문장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좀더 고민해 보아야 하겠다. 어쨌거나 인간사회에 사유재산이 등장한 이래로 계급은 발생하였고, 계급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계층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는 형상인 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확대재생산은 가진 사람의 몫이지, 가지지 못한 사람의 몫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략… 기괴한 것은 매년 학년말이 되면 학교마다 졸업식을 하는데 거기 가서 들으면 교장이란 교장, 내빈이란 내빈은 반드시 졸업생을 보고 친절한 듯이 하는 말이, 이제부터 실사회에 나가면 험악하니 천만 주의하라고 부탁을 한다. 부탁인가, 발뺌인가. 논밭을 팔고 가족의 피를 긁어 바쳐 3, 4년 공부한 것이 그 소리나 듣기 위해서였던가. 교육자가 어떻게 양심을 가지고 얼굴을 들고 그런 소리를 하며, 사회의 유지가 어떻게 정신이 있고서 그 소리에 곁들임을 하고 있을까.

그렇다. 그 험한 사회를 누가 만들었는가?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고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다음 세대들에게 무엇을 넘겨줄 것인가? 불의 혁명으로 인류의 삶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급기야 산업혁명에 까지 이르게 하였고, 산업혁명이후 불씨를 위한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모하였다. 과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인류가 사용한 에너지의 양이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 100년 이내에 사용한 에너지가 인류가 에너지를 사용한 이래 소모한 것보다 많은 양인 90%를 넘는다고 한다. 불과 100여 년의 시간동안 지구가 축적한 에너지를 현대인들이 고갈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음 세대에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2010. 9, 김상태)

김상태 선생님은
김상태 선생님은 인문학(역사: 한국근대사)을 전공하였다. 현재 사단법인 <인천사연구소> 소장 겸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이외 기호일보 객원논설위원과 함석헌학회 학술위원을 겸하고 있다. 현재 인하대에 출강하고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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