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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함석헌, 종교

[김대식 5] 인간의 영역을 넘어 자연에 대한 배려

by anarchopists 2020. 1. 1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7/09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영역(領域, 자리)의 철학과 종교학: 삶의 영역(자리)의 위기

1. 함석헌과 종교의 영역(자리) 위기 사회학
(2010. 7.5일자)


2. ‘뜻’ 자리 찾는 종교
(2010. 7.6일자)

3. 함석헌의 얼굴 현상학과 인간(다움)의 자리(영역)
(2010, 7,7일자)

4. 함석헌의 ‘그 사람’과 인간성의 자리
(2010. 7.8일자)


5. 다시 인간의 영역을 넘어 자연의 자리를 위한 염려, 고려 그리고 배려

“자연이 자연만으로 지(止)하는 것은 오히려 그 진의미를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이 계시하는 깊은 실재에 도달한 후에 비로소 참으로 산 자연이 된다. 자연의 미려는 그 자신으로서의 미려가 아니요 참으로 미려한 것의 계시로서의 미려다. 자연 가운데서 장엄한 것을 감득함은 그 신체로서의 장엄이 아니요, 참으로 위대한 것의 계시임으로서의 장엄이다. 고로 자연 가운데서 실재를 읽지 못하는 자에게는 자연은 산 것이 아니요 죽은 것이다. 현대 20세기의 문명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자연은 감격의 대상도 경탄의 대상도 아니다. 단순한 정복의 대상이다. 고로 그들에게는 이는 음미할 것이 아니고 처분할 것이다. 생명있는 것이 아니고 죽은 사해다. 그것이 어쨌는가 하고 현대인은 반문하나 사실은 이것이 이 문명-이미 고귀한 혼의 소유자들에 의하여 불행한 선고를 당한-의 근본병폐다. [......] 젊은 남녀가 흥미 100퍼센트의 모더니즘에 취하는 동안에, 유능한 학도들이 물질만능의 마르크시즘에 열중하는 동안에 숭고한 정신은 인류에게서 사라지고 선의(good will)는 사람들 사이에서 없어져 버리고 만다. 대철(大哲) 칸트는 “빛나는 성천(星天)은 내 위에, 도덕률은 내 안에!”라고 부르짖었다. 산 우주이고서 산 양심이다. 우주에 대한 숭경(崇敬)의 염이 싫어진 이 세상에 도덕의 퇴패함 또한 당연한 일이다. 이 시대가 만일 살고자 하거든 저희는 우선 산 우주 속에 자기를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함석헌전집, 두려워말고 외치라, 한길사, 1984, 193-194)

함석헌이 비판하고 있듯이, 자연의 영역에서 미려와 장엄함의 메시지 곧 자연의 실재성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자연은 한갓 인간의 생존의 자리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감격이나 감탄, 그리고 경외도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자기보존’을 위해서 애쓰는 인간에게 자연이란 죽은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인간이라는 주체는 맹목적으로 자기 자신만의 생존을 고려하고 염려한다면 자연의 폭행과 파괴에 대해서 묵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J. Habermas, 장춘익 옮김, 의사소통행위이론1, 나남출판사, 2006, 564-567). 그러나 인간만이 자기보존의 욕구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함석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은 죽은 자연이 아니고 산 자연이고 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인간은 자연의 부분 영역이지 전체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이라는 전체 자리에서 일부의 자리를 함께-나누어-살아가는 생명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끊임없이 타자의 자리를 침탈, 약탈하여 점령하는 생태학적 폭력과 폭행에 대한 반성과 전환적 행위가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근대의 도구적 이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위르겐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외부자연의 폭력과 벌이는 대결 속에서 형성되는 자아는 이중적 측면에서 성공적인 자기주장의 산물 즉 도구적 이성의 성취결과이다. 자연을 굴복시키고 생산력을 발전시키며 자기 주변의 세계를 탈주술화하는 것은 계몽의 과정에서 부단히 앞으로 돌진하는 주체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자연을 억누르며, 내부로 자기객관화를 추진하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점점 더 불투명해지는 주체이다. 외부자연에 대한 승리는 내부자연의 패배를 대가로 치르고 얻어진 것이다. 이 합리화의 변증법은 절대적 목적으로 설정된 자기보존을 위해 도구화되는 이성의 구조로부터 해명된다”(J. Habermas, 552).

그런 의미에서 자크 데리다(J. Derrida)는 땅/흙을 의미하는 ‘terra’와 공통의 어근을 갖고 있는 ‘terror’(테러), ‘territory’(영토)와 같은 말에 주목을 하고 있는데(G. Borradori, 김은주․김준성 옮김, 테러 시대의 철학, 문학과지성사, 2004, 277), 이는 인간이 타자의 영역 안에서 얼마나 생태적 폭력이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오래 된 정복의 역사를 알게 해줍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간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무생물과 생물이 함께-살아가야 할 자리에 대한 배려와 고려가 싹트고 있다면, 이 또한 인간의 자리에 대한 염려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인간의 자리에 대한 염려는 타자의 자리에 대한 이해와 고려, 배려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단지 인간의 자기보존의 욕망과 이기성의 발로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위한 생존의 자리는 타자의 자리를 넘보지 않고, 설령 누구의 자리인지는 몰라도 남은 자리가 있다면 그곳은 공동의 자리, 공공의 자리, 공동의 여백으로 놓아-두어야 합니다.

남은 자리-사실 이 지구상에 더 이상 인간을 위해 남아 있을 자리가 있을지 의심스럽지만-라 하여서 또 ‘권력과 화폐’(J. Habermas)를 통해서 착취(선점)한다면 그 또한 인간의 삶의 범주와 형식의 심각한 위기 혹은 위험이 도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리는 누구의 영역이라 규정짓고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영역(인간/사회/종교/생태 영역 등) 안에 있으면서 그 영역을 넘어서 존재할 수 있는 ‘범영역적 존재자’가 되어야 합니다. 삶의 영역, 삶숨의 영역은 소유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더불어-있어야 하는 ‘중첩의 자리’, ‘다층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함석헌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생각의 자리’는 인간의 자리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잘 자리, 모두가 쉴 자리, 모두가 먹을 자리, 모두가 살 자리를 위한 ‘모두놀이의 자리’에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 그를 거니채니 하면 칸트를 빗대어 우리에게 이렇게 호통을 할 듯합니다. “도덕률을 운운하기에 앞서 피폐해지다 못해 네 머리 위에서 신음을 토하고 있는 별빛들을 보아라! 내 도덕률은 바로 성천(星天)에서 왔으므로 인간의 자리를 넘어서 다시 자연의 영역을 배려해야 하나니.” 까마귀 호통으로 알아듣지 말아야 할입니다(2010/07/09,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2010년 7월 10일(토) 오후 3시에
종로구 운니동 함석학회사무실에서
함석헌읽기가 있습니다.
많은 참석 바랍니다.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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