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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함석헌, 종교

[김경재 제6강] 신비체험은 우상타파의 비판정신을 촉발시킨다.

by anarchopists 2020. 1. 2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4/11 09:14]에 발행한 글입니다.

3-4. 신비체험은
우상타파의 비판정신을 촉발시킨다

거듭 말하거니와 함석헌의 종교체험은 범인들의 일반적 생각보다 훨씬 심원하였다. 어쩌면 왜 그의 문필활동과 사회활동의 모든 근저에 종교적 요소가 밑받침 되고 있는지 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종교적 신비체험은 무교적 탈아상태(엑스타시)와 다른 유형의 것이다. 종교학적으로 보면 신비적 종교체험이란 점에서 공통점도 보이지만, 그의 신비체험속에서는 윌리엄 제임스가 강조하는 '지성적 성질‘(noetic quality)이 함께한다.

다시 말하면 일상성을 초월하는 신비적 경외감과 황홀감 상태에서도, 자기정신을 놓아버리고 초자연적 인 힘(the numinous power)에 흡수되고 압도되어 자기를 망실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 인식상태 곧 '주객분리구조'를 넘어서고 돌파하는 경험속에서도 ‘환하게 꿰뚫어 비취는 경험’ 상태인 것이다. 폴 틸리히가 말하는 ‘황홀해진 이성’(ecstatic reason)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 점이 샤머니즘에서 무병(巫病)을 앓으면서 신비경지에 들어간 ‘탈아상태의 무당’과 이사야의 소명체험에서 보듯이(이사야서6장), 예언자종교에서 신비체험에 들어가 ‘황홀한 이성으로 고양된 예언자’와 서로 다른 점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다른가? 전자의 경우엔 섬기는 ‘몸주신’의 초능력적 매개를 통하여 영험한 종교기능(예언, 죽은자와의 소통, 치병, 축귀등)을 수행하지만, 후자의 경우엔 특히 우상타파적인 비판정신이 발휘되면서 타락한 역사현실을 고발하고, 변질된 권력과 종교를 비판하는 기능을 하게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진정한 신비주의란 우상타파의 비판정신을 동반함으로서 참된 신비체험의 진위를 판가름하게 한다. 여기에서 ‘우상’이란 절대적이거나 궁극적일 수 없는 가치 혹은 실재를 신처럼 절대시하는 인간의 독특한 자기기만 행위를 말한다. 함석헌의 종교시에는 그런 점이 역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서 「거짓하는 교회주의자」, 「대선언」, 「흰 손」등의 장시(長詩)이다.

화 있을진저 거짓하는 교회주의자여 / 돌로 성당을 쌓아놓고 / 돌보다 더 굳은
욕심의 전통을 세워놓고 / 그 창에 얽히는 거미줄 같은 교리로 / 사람을 걸어 잡아
놓고 / 제사하며 연기를 마시고 취하는 자여
....................
하나님 아들 예수 죽었다 살아나고도 / 땅 위에 질킷 않고 선뜻 가버리셨다 / 있을
필요 없기에 / 있어서 안되겠기에 / 하실 것 하시고 곧 없어져 버릴이만큼 / 그는
저에 참됐고 우리게 사랑이셨다.
.................
인류는 나라를 날아 넘고야 말 것이다 / 생명은 종교에 종지부를 찍고야 말 것이다 /
하나님 우주 만물을 옷티처럼 벗으시고 / 자기를 완전히 드러내시고야 말 것이다 /
일이 다 없어지고 / 뜻이 하늘에서 같이 밝히 빛나는 때 /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폐하고 / 사랑의 숨으로 사는 나라 / 맘이 제 만든 형상 섬기기를 그만두고 /
텡비는 한나, 한 날, 하나만.

20세가 될 때까지 제도적 정통교회에서 자라난 그리스도인 함석헌은, 종교적 신비체험을 한 후, 교회주의 때문에 참 종교가 죽어가고 살해되는 현실에 직면하여, 이제는 교회주의에 대하여 가장 혹독한 비판자가 된다. 그는 스스로 즐겨 이단자가 되겠노라 장시 「대선언」에서 선언한다.

..........전연(前聯)생략
내 즐겨 이단자가 되리라 / 비웃는다 겁낼 줄 아느냐 / 못될까 걱정이로다 / 오 나로 늘 새 끝을 들게 하소서.
...............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 참에야 어디 딴 끝 있으리오 / 그것은 교회주의자 안경 에 비치는 허깨비뿐이니라 / 미움은 무서움 설으고 무서움은 허깨비를 낳느니라, /
기독교는 위대하다 /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 니라.
...................
내 그대들을 저버렸음 / 미움에서도 교만에서도 다 아니요 / 코카서스 높은 봉 만년
흰 눈 위에 /즐겨 저주받은 자의 이름들으며 / 영원한 고통의 불 술잔 기쁨으로 마시던 /
저 이방의 영웅같이 / 나도 나 모르는 막아낼 수 없는 영에 끌려 / 하늘에 올라가 /
영원의 빛 따 내려다 그대들 눈동자에 쏘아넣고 / 사라지지 않는 향기 받아다 그대들
코에 불어넣어 / 그대들로 이 역사의 법궤를 메고 요단을 건너는 / 거룩한 제사가 되게
하기 위해서임을 / 죽는 순간에도 오히려 그것을 빌며 그 빛을 / 그 빛을 먹고 죽었음 을 / 그 말없는 시체를 안는 찰나 / 그대들은 맡아 얻으리라.

위에 인용한 종교시 속에, 우리는 함석헌이라는 작가가 자기도 모르는 영에 끌려 신비로운 영원체험을 한 결과, 지상에 우상 처럼 버티고 서있는 제도화된 종교들, 특히 그리스도교회주의를 비파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깨닫게 된다.


3-5. 영원한 현재의 충만과
영원한 과정의 미완성


마지막으로, 함석헌의 종교체험에서 우리는, 지혜와 해오(解悟)를 넘어 영광의 빛에 감싸이는 증오(證悟)의 존재자체 체험과 끊임없이 미래를 향하여 창조적 전진을 하는 과정의 하나님을, 자연과학자들이 ‘빛의 이중성 원리’를 받아드리듯, 논리적 화해없이 작가가 수용한다는 사실을 본다. 그 대표적 예로서 「미완성」, 「하나님」이라는 시제(詩題)안에서 고백되고 있다. 먼저 육연(六聯)으로 구성된 「미완성」작품의 후반부를 음미해보자.


..........
완성은 반갑다고 누가 그러나? / 끝맺음은 아름답다고 누가 그러나? / 얻어들음은
즐겁다고 누가 그러나? / 자연은 언제나 완성할 줄 모르는 영감(靈感)의 거장(巨匠), /
역사는 영원히 끝날 줄 모르는 절대의 의지.
영원의 미완성,
영원히 자라는 혼의 타는 가슴엔 / 지극히 적은 부분의 불꽃마다 제대로 무한한
즐거움 , / 끝없이 닫는 영의 헐떡이는 염통엔 / 찰나 찰나의 고통이 울림마다 그대로
영원한 이김.
영원의 미완성품 만세! / 영원히 높아가고 확대해가는 정신 만세! / 영원히 영광을
더해가며 벌어져 나가는 생명의 불바다 만세! /아킬레스 거북을 쫒아 잡지 못하듯이 /
그 칠줄 모르고 닫는 인생아 네 걸음에 무한한 기쁨 있을 지어다.

위 종교시의 중심주제인 영원히 새로움을 창조해나가는 실재관은 대우주 자연과 역사과정과 하나님을 연관시키는 그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속에서도 피력되고 있다. “역사는 영원의 층계를 올라가는 운동이다. 영원의 미완성곡이다. 하나님도 죽은 완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영원의 미완성이라 하는 것이 참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바퀴는 구르는 것이다”. 함석헌의 ‘과정적 실재관’은 현대 알프레드 화이트헤드나 떼이야르 샤르뎅의 ‘과정사상’(Process Thought)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함석헌의 종교체험에서는 또다른 측면이 살아있다. 그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존재의 미래를 대망하는 실재관이 아니다. 영원한 현재, 영원한 충만, 존재자체이신 거룩한 분과 연합되고, 하나로 일치된 지복(至福)을 노래한다. 그 대표적 시가 「하나님」이라는 시제의 종교시이다.


몰랐네 / 뭐 모른지도 모른 / 내 가슴에 대드는 계심 이었네.
몰라서 겼었네 / 어림없이 겪어보니 / 찢어지게 벅찬 힘의 누름이었네.
벅차서 떨었네 / 떨다 생각하니 / 야릇한 지혜의 뚫음이었네.
하도 야릇해 가만히 만졌네 / 만지다 꼭쥐어보니 / 따뜻한 사랑의 뛰놂이었네.
따뜻한 그 사랑에 안겼네 / 푹 안겼던 꿈 깨어 우러르니 / 영광 그득한 빛의
타오름 이었네.
그득 찬 빛에 녹아버렸네 / 텅 비인 빈탕에 맘대로 노니니 / 거룩한 아버지와
하나됨이었네.
모르겠네 내 오히려 모를 일이네 /
벅참인지 그득 참인지 겉 빔인지 속 빔인지 / 나 모르는 내 얼 빠져든 계심이네.

위 종교시에서, 함석헌의 모든 종교체험이 가장 원숙하고도 아름다운 절묘한 시적 언어로 형상화되어 있다. ‘일치의 신비주의’(unity mysticism)와 ‘연합의 신비주의’(union mysticism) 라고 각각 구별하여 이름붙이는, 동서양의 신비주의 두 전통간의 갈등도 절묘하게 원융회통 되어있다. ‘야릇한 지혜’, ‘지혜의 뚫음’ , ‘힘의 누름’, ‘ 사랑의 뛰놂’, ‘영광’ , ‘빛의 타오름’, ‘그득참과 빈탕’, ‘아버지와 하나됨’, ‘계심’등등 위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한마디 한마디 어휘가 표현력 에서만이 아니라 그 말(어휘)이 담고 있는 심원한 생각과 체험들이 모순 충돌없이 하나로 융합 되어있다.

참 영적 아버지로서 그리스도교적인 하나님체험, 노장철학이 바탕이 된 지혜의 꿰뚫음, 텅 빔이 곧 그득한 충만이라는 역설적 대승불교적 묘공(妙空)의 철학, 이상의 모든 것들이 모순 충돌없이 신비체험 안에서 화해하고 있다. 생성의 철학과 존재의 철학이 쌍둥이처럼 함께 뛰놀고 있다. 파스칼의 주장과 다르게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철학자의 하나님이 다르지 않다고 노래하고 있다. 위의 종교시는 작가 자신의 영혼 안에서 직접체험 없이는 언어적 형상화가 거의 불가능한 종교시로서의 뛰어난 걸작이다.


4. 에필로그

시를 읽고 음미한다는 것은, 언어로 형상화된 작품 곧 작가가 체험거나 느낀 것의 제1차적 ‘재현물’(작품)을, 독자가 이해과정이라는 해석학적 지평융합을 거치면서 첨 작가 맘에 경험된 체험내용을 제2차적으로 ‘재현’하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재현’이라는 단어는 사진촬영의 증명사진처럼 본래 대상물과 똑같은 경험과 느낌을 되살려 낸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인간 정신적 체험의 본질이자 한계성이다. 시의 해석과 감상은 인물의 사진찍기가 아니라 인물화를 그리는 창조적 예술활동과 같다. 동일한 인물을 여러사람의 화가가 인물화로서 그릴 때, 완성된 인물화가 각각 야양한 특징을 지니면서도 동일한 인물의 초상화이듯이, 동일한 시를 이해하고 해설하는 독자의 반응은 다르다.

우리가 지금까지 몇가지 함석헌의 종교시를 부분적으로 음미했지만 작가가 말한대로 독자는 함석헌의 종교시를 음미하면서 각각 ‘자기의 시를 짓는 것’이다. 이 말은 오늘 강사의 시음미가 표본적이거나 가장 바른 이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강연자는 함석헌의 종교시를 통하여 강연자의 시를 지은 셈이다. 이 자리에 있는 청자와 앞으로 이글이 만일 인쇄되어 활자화 할 경우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도, 함석헌의 시를 감상함으로서 각각 자기의 시를 짓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의 종교체험이 매우 깊고 높고 숭고하기 때문에, 독자의 삶의 지평을 더 넓혀주고 고양시켜준다는 것도 부정못할 또 하나의 진실일 것이다. 딜타이의 말처럼 사람으로서의 삶이란 경험이요, 경험한 것의 표현이며, 표현된 것을 이해하는 끊임없는 연속적 사건을 거치면서 씨알이 영글어가는 신비한 과정이기 때문이다.(김경재, 끝)

김경재 교수의 함석헌을 말한다.

▲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김경재 교수님은

- 네덜란드 유트레흐트 대학교에서 박사학위(Ph.D)
- 한국 크리스챤 아카데미 원장역임
-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역임
- 현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신학)


- 대표저서: <이름없는 하느님>, <해석학과 종교신학>, <아레오바고에서 들려오는 저 소리>
/김경재


글을 보내주신 김경재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김경재 교수님의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내일은 [일요시론-김조년]이 나갑니다.

운영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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