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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함석헌, 종교

[김경재 제 5강] 거룩 체험, 황홀감정

by anarchopists 2020. 1. 2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4/10 08:16]에 발행한 글입니다.

3-3. 거룩체험의 현상학적 특징으로서
황홀의 감정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까지 활동했던 독일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는 저명한 신학자, 종교학자 철학자였고 인도학의 대가였는데 그의 명저 『성스러움의 의미』(Das Heilige)는 종교체험의 현상을 이해하는데 이미 고전이 되어있다. 우리는 함석헌의 종교시 가운데 나타난 그의 종교적 신비체험이 시인의 언어적 세련미가 만들어낸 문학적 기교가 아니라, 작가 자신이 경험한 일련의 신비적 종교체험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고자 한다. 그러한 사실을 확증하는데 루돌프 오토의 위에서 언급한 명저를 참고하고자 한다.

오토교수의 명저가 갖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두가지만을 강조하면 다음과 같다.. 그 한가지는, 사람의 종교체험을 종교체험 그 자체의 독립적 고유한 그 무엇으로 보아야한다는 교훈이다. 계몽주의 세례를 듬뿍받은 현대인들은 모든 것들이 ‘합리적’( rational)이지 않으면 실재하지 않거나 환상이거나 거짓이라고 보려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 결과, 계몽주의 이후시대 유럽지성인들은 종교를 폄하해왔다. 그런 경박한 합리주의에 대하여 루돌프 오토는 실재중에는, 그것도 인간 삶체험중 매우 의미심장한 것들 중에는, 합리적 이성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비합리적’(non-rational)인 것이 엄존한다는 사실이다.

종교적 체험이 바로 그러하다. 종교적 체험은 물론 ‘반이성적’(anti-rational)이거나 ‘몰이성적’(irrational)이거나 심지어 ‘몰상식적’(sbsurdity)인 것을 종교적 체험의 특징이라고 면죄부를 주장하려는 반지성주의적 몽매주의를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특히 함석헌의 종교사상은 매우 과학적인 사실과 합리적 이성을 존중하는 것임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함석헌의 종교체험과 종교사상이 계몽주의적 합리주의나, 심지어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를 강조하는 칸트적 ‘도덕종교’ 울타리에 들어있다고 본다면 오해가 생긴다.

오토의 위 명저가 주는 둘째 중요성은 종교체험 중에서도 그 핵심을 이루는 ‘거룩한 실재’체험을 할 때, 인간이 체험하는 종교체험의 현상을 ‘두려운 경외감의 신비’(mysterium tremendum)와 ‘매혹적 황홀감의 신비’(mysterium fascinosum)라는 상호모순되는 듯한 두가지 감정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자는 경외감이요 후자는 황홀감이다. 전자가 결여된 후자는 종교체험을 천박하고 깊이가 없게 만들지만, 후자없는 전자만의 강조는 종교를 억압적 권위와 교리체계와 사랑없는 계율종교로 만들고 만다.

함석헌의 종교시 중에서 「임이여 나는 작은 등불이외다」라는 종교시는 함석헌의 종교체험이 ‘황홀한 이성’과 ‘환하게 뚫려비취는 지성적 요소’를 견지하면서도 황홀한 지복감정에 완전 휩싸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시는 16연(聯)으로 구성된 시 이지만 그중 작가의 신비적 종교체험을 나타내 보이는 몇 연들만을 인용하고자 한다.

..................
크신 님 나를 안으소서! / 나는 인제 당신이 / 나 안으려 오신 줄 압니다 / 이때껏
뵈온 일 없어도 어쩐지 / 나 안고서 당신이 오신 줄 나는 믿어집니다.
뜨거운 님 나를 품으소서! / 삼키소서, 맘대로 하소서! / 당신 가슴에 이 몸 바치오리다.
나는 그 것 즐겁습니다. / 한없이, 한없이, 그저 한없이.
......................
슬픈지 , 기쁜지 난 몰라요. / 그건 난 몰라요, 몰라도 / 그저 좋아요. / 님이여 님이여
나를 덮어요 / 영광의 두루마기로 어서 나를 덮어요.
덮기보다는 나를 삼켜요, / 당신의 영광의 얼굴 / 놓고 싶지는 않아도 / 눈이 부시어
올려볼 수 없어요./ 내가 눈을 못 뜨긴 그 때문이야요.
놓지는 못할 님, 오오 내 사랑 / 놓지는 못해도 올려도 못 보는 영광의 님, /
차라리 나를 녹여버리소서! / 님 속에 녹아서 풀어지는 날 / 길이길이 님 속에 안 있아
오리!

위의 종교시에는 종교적 신비가들이 달리표현 할 길 없어 강력한 에로티시즘의 표현처럼 느껴지는 성애적(性愛的) 사랑의 표현기법까지 동원하면서, 루돌프 오토가 말하는 ‘성스러움의 체험’특징인 경외감과 황홀감이 잘 나타나 있다. 함석헌의 종교시에는 ‘교리적 주지주의’나 심지어 ‘도덕주의적 종교론’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 있는 것이다. 성스러운 것의 현현(顯現) 앞에서 그 영광의 광휘에 휩싸여, 그 대상과 일치를 이루고 몰입하고자 하는 강렬한 ‘연합의 신비주의’(union mysticism) 면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직접체험자 였기에, 그는 우상과 거짓 진리와 굳어진 죽은 종교에 그렇게도 강렬한 비판적 저항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 문인 괴테도 말하기를 “외경은 인간이 지닌 가장 좋은 면이다. 세상이 아무리 그 감정을 과소평가 할지라도 일단 사로잡히면 우리는 깊이 어마어마한 것을 느낀다”고 했다. 문학적 거성답게 낭만주의적 문학의 대표자 괴테는, 인간의 감정세계란 흔히 가볍게 낭만주의 사조를 이해하는 보통사람들과는 다르게 연애감정같은 표피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외경의 맘은 종교신비가를 지배하는 핵심감정인데, 반드시 황홀감이 함께 동반되는 역설적 감정임도 깨달아야 한다.

보통사람들인 우리가 종교인으로서 함석헌을 잘못 이해하면, 그가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고 도덕적 실천을 힘썼다는 사실 때문에, 함석헌의 종교이해는 칸트의 종교이해와 가까운 범주에 넣고 오해할 위험이 매우 큰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말기의 비판철학자 칸트는 인식의 영역(순수이성의 차원)에서는 종교가 설자리는 없다고 보았고 오직 도덕적 실천의 영역에서 종교의 자리를 찾고자 했던 사람이다.

종교이해와 종교체험에 있어서 함석헌과 임마누엘 칸트의 비교는, 이성과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지평에서 같은 점이 있지만, 칸트와 다르게 함석헌은 칸트에게는 없는 ‘황홀한 이성의 체험’과 거룩하신자와의 신비적 ‘연합의 일치체험’이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아니될 것이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신비체험을 가능한 말하지 않으려하고 ‘십자가의 도리’만을 선포하려했듯이, 함석헌은 신적 실재와의 ‘연합의 신비체험’에 침잠하지 않고, 그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창조적 에너지를 삶의 창조적 변혁운동에 쏟아부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김경재 내일 계속)

김경재 교수의 함석헌을 말한다.

▲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김경재 교수님은

- 네덜란드 유트레흐트 대학교에서 박사학위(Ph.D)
- 한국 크리스챤 아카데미 원장역임
-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역임
- 현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신학)


- 대표저서: <이름없는 하느님>, <해석학과 종교신학>, <아레오바고에서 들려오는 저 소리>
/김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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