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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함석헌, 종교

[김경재 제2강] 시를 통해 본 함석헌의 종교체험

by anarchopists 2020. 1. 2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4/07 09:54]에 발행한 글입니다.


인간의 해석학적 방법론은
시인의 내면적 종교체험을 반복 추체험 할수 있는가?

종교체험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려할 때, 더욱이 그 종교체험이 종교시(宗敎詩)로서 표현된 것이라면, 인간의 정신기능이 과연 다른 사람의 맘 깊은 곳 영혼의 지성소에서 발생되었고 체험된 그 내용과 느낌을, 본래그대로 때와 장소가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이 바르게 추체험 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해석학적 이해이론의 문제’에 부딪힌다. 영문학을 전공한 언어학자 석경징은 「세상은 무엇이 바꿈니까?」라는 제목의 학술강연 에서 다음같이 의미깊은 말을 하였다.

시를 될 수 있는대로 언어중립적으로 정의해본다면 시는 아마도 체험에 관한 상상적이고 집중적인 언어적 표현이며, 그 언어는 의미, 소리, 리듬을 통하여 특정한 정서상 의 반응을 일으키도록 골라지고 배열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정은 직접 말로 적힐 수 없는 것이며, ‘표현’ 또는 ‘재현’되는 것입니다. 시로 적히는 것은 감정이나 느낌 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말인 것입니다. ................ 이처럼 시가 감정을 서술한 말이 아니고, 감정을 재현하는 생각을 적어놓은 말이므로, 시는 무엇보디도 말이 되어야 하 고, 그 말은 뚜렷한 생각을 이루어야 합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강조하는 점은 무엇인가? 무슨 시가 되었던지 시란 체험에 관한 언어적 표현이라는 것, 그러므로 시란 시인의 내면적 체험 곧 감정과 느낌을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직접전달매체가 아니라 언어 곧 말로서 전하는 간접적 표현이고 1차적 재현이기 때문에 시인의 맘에서의 직접체험 사건과 시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는 표현으로서의 시를 동일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언어학자로서 석경징이 강조하는 것은 시는 문자로 언표된 말(文語)이기 때문에, 시로서의 말은 말도 안되는 기분을 횡설수설 늘어놓아서는 아니되고, 아무리 은유나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더라도 좋은 시는 동시에 “뚜렷한 생각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진정한 시는 서정시라 할지라도 ‘생각’을 드러내놓는 것 이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함석헌의 글쓰기가 지닌 장점을 바로 그 점에서 찾고 있다. 함석헌의 시는 서정시이거나 산문시이거나, 내면적 체험을 나타내는데 동시에 ‘감정과 느낌’을 동반한 그의 내면적 체험이 뚜렷하게 ‘생각’을 담고 있고 독자로 하여금 정서적 느낌만이 아니라 생각하도록 한다.

탁월한 종교시인으로서의 함석헌의 자리매김은 어찌된 일인지 한국 문학계에서 충분히 정당하게 평가되거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약 300여편의 시를 남겼기 때문에, 『함석헌 전집』제6권이 그의 시들을 담아내고 있으므로 앞으로 가부간 한국문학사에서 그의 시세계에 대한 정당한 언급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함석헌은 그의 시집 『수평선 너머』 발문(跋文)에서 그 자신 스스로 그의 시론을 정확하게 피력하고 있다.

듣는 자는 역시 남의 시를 통해 자기의 시를 짓는 것 뿐이다. 내 시야말로 내 것인데, 내 속에 서 나간 혼정(魂精)인데, 내 아들인데, 나만이 낳고 나만이 아는 것인데, 내 생명의 지성소(至 聖所)에서 나와 내님만이 만나서 지난 일인데, 둘도 없는 오직 하나의 일인데, 그것을 누가 안 단 말이냐? 알게 할 방법도 없거니와 알게 해서 될 일이냐? 그러나 또 정말 알리지 않을 것 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반드시 알려지는 것이요, 또 알리고 싶어 못견디는 것이다. 시는 숨기 며 알리는 것이요, 알리며 숨기는 것이다. 생명은 드러내 놓은 비밀이다.

위의 인용문 안에 함석헌의 시론(詩論)과 현대 ‘정신과학의 꽃’이라고 부르는 해석학(Hermeneutics) 이론의 핵심이 다 들어있다. 함석헌이 그의 주저 『뜻으로 본한국역사』를 저술할 때나 『수평선 너머』에 수록된 종교시를 작시할 때, 서구 해석학 이론의 발달사에 거봉들인 슈라이에르맛허, 딜타이, 하이데거, 한스 게오르 가다머의 해석한 이론을 접하였는지 않았는지 알수 없지만, 그는 서양학자들이 말하는 ‘정신세계에서 이해란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에 대하여 놀라운 자기자신의 은유를 가지고 직관적으로 서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위 인용문중에서 시란 ‘내 쪽에서 나간 혼정(魂精)’이라는 원초적 생명체 엑기스 전이(傳移)의 은유, ‘내 생명의 지성소에서 내 님만이 만나서 지난일’ 이라는 거룩하고도 절대비밀인 신비적 체험으로 묘사하는 것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 하나는, 현대 해석학에서 이젠 하나의 상식이 되었지만, 정신과학 영역에서 타자의 마음 속에서 체험된 일은, 반복 불가능하고 원본 그대로 재현불가능한 것이며, 오로지 해석자(독자) 자신의 삶의 지평과 시인의 삶의 지평이 서로 만나면서 ‘지평융합’(地坪融合)되는 형식으로서만 시나 고유한 사상은 이해전승되어간다는 점이다.

이 까다롭고 난해한 현대 해석학자들의 핵심논리를 함석헌은 아주 쉬운 우리말로서 “듣는자는 역시 남의 시를 통해 자기의 시를 짓는 것 뿐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본론에서, 몇편의 함석헌의 종교시를 음미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이해한만큼의, 각자의 맘속에서 자기의 시를 짓는 방식으로서, 함석헌의 종교체험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친 주관주의요 상대주의가 아닌가 라고 비판 할수 있겠다. 그러나 함석헌은 같은 인용문 끝머리에 말하기를 시란 “반드시 알려지는 것이요, 또 알리고 싶어 못견디는 것이다. 시는 숨기며 알리는 것이요, 알리며 숨기는 것이다. 생명은 드러내 놓은 비밀이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시의 역설적 성격과 인간정신의 보편적 체험가능성에 대한 신념이 들어있다. (김경재 내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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