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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는다] 이제 국가주의를 반성할 때가 아닌가 2

by anarchopists 2020. 1. 20.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4/13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이제는 국가주의를 반성할 때가 아닌가.

2. 폭력적 국가주의에 대한 인민의 자각

함석헌은 이렇게 말했다. “지배자들은 자기네 야심을 감추고 변명하기 위해 '국가‘를 내세우지만, 국가주의는 곧 폭력주의다.”(《함석헌저작집》4, <우리는 알았다>, 한길사, 2009, 162쪽) 이렇듯 국가라는 존재는 인간사회에 사악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면서 발생한 지배층의 울타리이었다, 국가는 결코 인민의 울타리가 아니었다. 힘을 가진 자들은 언제나 기회가 되면 지들 멋대로 얼렁뚱땅 국가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지배층으로 군림해 왔다. 그리고 이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 인민들을 가두어 놓고 그들을 착취해 왔다. 바로 조세제도요, 징병제도다. 그러니까, 국가라는 울타리가 존재하는 한 그 속에 갇혀있는 인민은 백날 지배층의 지배대상이요 착취 대상이다. 더불어 사는 평등한 인간들이 아니다. 그러니까 인민은 한낱 지배층의 나라, 곧 국가를 지탱해 주는 도구요, 수단일 뿐이었다.

고대 역사에서는 그래도 국가구조가 단순하여 인민들을 짓누르는 착취도구가 단순하였다. 정치를 하는 지배층(군왕과 관료들)에게만 속박 당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고대 중반기에서 중세로 들어오면 국가라는 울타리를 타고 인민을 착취하는 지배구조가 하나 더 생긴다. 종교다. 본래 국가라는 정치권력이 나오기 전에도 종교는 존재하였다. 종교 또한 단순하게 인민을 기만하는 지배권력이었다. 그러나 정치권력처럼 드러내놓고 기만하지는 않았다. 기만성이 강한 정치권력이 생기자, 종교권력은 기만성이 보다 강한 정치권력에게 인민의 지배권을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이 두 세력은 권력을 양분하게 된다.

고대국가를 거치면서 종교는 정치권력과 밀착한다. 아시아는 불교와 정치가, 그리고 유럽는 그리스도교 가톨릭과 정치가 친밀하게 밀착한다. 그리고 이 두 지배권력은 인민에 대한 착취를 분업화 한다. 곧, 정치가는 현실적 착취를, 종교는 내세적 착취를 담당한다. 그래서 이제껏 종교는 사랑ㆍ평화ㆍ천당(극락)이라는 관념세계를 만들어 내세의 운명을 매개로 물질적 착취를 합법화한다. 그러니까 국가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인민들 입장에서는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으로부터 이중으로 억압과 구속을 당해 온 셈이다. 정치는 현실적 억압을, 종교는 정신적 속박을. 그리고 근대에 들어오면 자본주의라는 생상양식이 발생한다. 자본주의는 다시 국가주의와 결합한다. 국가는 이제 자본주의 국가라는 울타리로 변신한다. 이렇게 되면, 인민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존재가 더 늘어나게 된 셈이다. 자본가, 곧 자본권력이다.

그래서 현대 자본주의국가라는 울타리 안에 사는 인민들은 입장에 따라 상황은 다르지만 대체로, 정치가와 종교가, 그리고 자본가라는 지배층에게 삼중으로 속박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국가라는 도구는 정치가ㆍ자본가ㆍ성직자들이 인민에게서 빼앗은 것들을 가지고 그들의 울타리를 더욱 견고하게 재건축해 내고 있다. 이렇게 자본주의국가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인민들은 권력과 종교 그리고 자본의 힘에 짓눌려 숨쉬기조차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인민들의 자각이 왔다. 더 이상 지배층(정치ㆍ자본ㆍ종교) 중심의 국가주의에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다. 여기서 국가주의에 대항하는 시민사회가 탄생한다. 그러면 시민사회가 등장하는 계기를 살펴보자.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인간사회는 ‘원시공동체사회’에서 ‘1단계국가주의사회’(이하, 1단계국가사회)를 거쳐 ‘2단계 국가주의사회’(이하, 2단계국가사회)로 나왔다 1단계 국가사회를 우리는 흔히 노예ㆍ봉건사회라고 한다. 노예ㆍ봉건사회는 한 사람이 그의 수하들과 함께, 독점지배세력이 되어 인민을 배제한 채 권력과 자본(국가이익), 그리고 관념(靈魂)을 전제하던 시대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국가사회구성원(인민, 또는 시민)들은 소수의 권력층에게 인간소외는 물론 심각한 탄압과 ‘경제외적 강제를 당해왔다.

이러한 노예ㆍ봉건시대의 경제적 착취와, 지적인 속박, 정서적 억압에 대하여 인민의 자각이 왔다. 인민들은 수 천 년 참아왔다. 그리고 견뎌왔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이러한 인민의 자각은 민주공화정에 대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유럽에서 먼저 왔다. 자유주의의 부르짖음이다. 인민에게도 참정권을 달라다. 그리고 국가형태에 대한 변형요구다. 이것을 시민혁명이라고 한다. 이 결과로, 인민 중심의 국가주의가 나왔다. 그리고 국민국가시대가 전개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를 2단계 국가주의사회라고 한다. 2단계 국가주의사회에서 시민사회가 열린다.

함석헌은 말한다. “국가가 씨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어째 씨알이 국가를 위해 있다 하겠나? 씨알이 스스로 ‘이제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다’ 하는 이때에 시대착오의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이 영광이라 할까?....옛날에는 임금이 주인이요, 백성은 종이어서 전쟁을 빌미로 나가서 싸워 죽으라면 죽었지만, 지금 씨알은 눈이 별처럼 또렷또렷 깨어서 무엇이 참이며 무엇이 거짓이며, 어느 것이 사는 길이고 어느 것이 죽는 길임을 안다.”(《함석헌저작집》1,<한만족과 평화>, 252~253쪽) 이로부터 모든 국가의 권력은 국가구성원(인민=씨알)으로부터 나오며, 통치자의 권력 또한 국가구성원으로부터 위탁받아 행위 하게 되었다. 때문에 통치권을 행사하는 자의 통치행위가 국가구성원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때는 국가구성원은 통치권자의 권력을 회수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권력을 위탁받은 통치자가 그 권력을 내놓기를 거부한다면, 국가구성원은 ‘혁명’(정권축출)이라는 방법으로 회수해 올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이제는 국가주의는 ‘자유민주주의’ 곧 시민사회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모든 영역의 국가들은 이러한 자유민주주의의 원칙과 이념을 준수하여 통치자의 권력남용을 막는 정의로운 법치질서를 확립하고 이를 지켜나가려 애쓰고 있다. 따라서 수단가치에 지나지 않는 국가권력이, 목적가치인 국가구성원의 생명과 재산ㆍ자유, 그리고 삶의 정의를 위협한다면 인민은 국가권력에 저항하게 된다. 인민의 저항에는 집회시위 또는 데모 그리고 혁명이라는 방법이 동원된다.


따라서 시민사회에 들어와서는 모든 국가의 권력행위는 인간의 생존행위(생명, 재산, 자유, 양심)에 우선할 수도 없으며 우위에 놓을 수도 없다. 국가권력은 어떤 상태에서도 악(惡)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적 약자 편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제2단계 국가사회의 가장 중요한 알짬은 국가의 모든 권력이 아래로부터 작동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은 어떤 기구나 조직도 인간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사회정의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대 국가주의사회마저 인간의 자유와 생명 그리고 재산이 위협을 받고 사회정의가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인민들은 또 다시 자각 했다. 함석헌은 말한다. “이제는 아무리 무식해도 옛날의 우민ㆍ우중은 아니다. 스스로 인격적인 자각을 하기 시작한 민중이다. 옛날에 말하던 ‘백성놈’은 이제 있을 수 없다. <우리도 사람이다>하는 그 말 앞에 칼도 돈도 꾀도 소용없다. 이제는 다스리는 것이 정치 아니다.(《함석헌저작집》2, <인간혁명> 41쪽)

그렇다. 국가의 정치권력과 종교권력, 그리고 자본권력에 대항하여야 한다는 것을. 바로 이것이 인민이 갖는 권리요, 자유다. 정의다. 그리하여 국가 단위에서 국민(시민=씨알), 지역단위에서 주민(시민=씨알)들은 국가권력의 그릇된 통제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그리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시민계급을 형성하고 정치ㆍ종교ㆍ자본 등의 통치권력에 저항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자신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통치권력에 저항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운동을 시민사회운동이라 한다. 그러면 시민계급은 누구를 말하는가.
(황보윤식, 내일 계속)


(가칭) <함석헌학회>가 창립됩니다. 많은 참석바랍니다.
일시: 2010년 4월 16일(금) 오후 2시
장소: 서울 시청쪽(1호선 4번 츨구) 프레스쎈타 19층(기자회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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