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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는다] 이제는 국가주의를 반성할 때가 아닌가

by anarchopists 2020. 1. 20.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4/12 06:03]에 발행한 글입니다.

이제는 국가주의를 반성할 때가 아닌가.

1. 국가라는 울타리의 기원

함석헌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신화로 남아 있는 그 시대에는....오늘의 지배욕을 가진 정치인들 같지 않아, 초창인만큼 높고 낮음도 없고, 지배 피지배도 없었다. 비가 많이 올 때 어떻게 홍수를 면하며, 가믐이 심할 때 어떻게 냇물을 끌어올릴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다.”(《함석헌저작집》1, <한민족과 평화>, 한길사, 2009, 251쪽. 한길사, 2009년은 이하 같음) “정치는 본래 싸움이다. 다스리고 다스림 받음의 관계다. 다스림이란 말부터 틀린 말이다. 정치라면 민중이 제일이지 남의 다스림을 받을 리가 없다. 이론으로 그렇지만 현실의 정부는 언제나 정직한 대표자가 아니고 사사 야심을 가진 자들이다. 그리므로 민중은 늘 제 권리를 빼앗기고 있다.”(《함석헌저작집》4,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 146쪽) 인간이 인간을 다스린다는 말은 잘못되었다. 그런데 어찌해서 ‘다스림’이란 말이 나오게 되었는가. 그 근원을 캐 들어가 보자.

영장의 동물인 처음의 인간사회는 누구나 평등한 공동체사회를 이루고 살았다. 즉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전근대의 지배와 피지배, 근대 이후의 통치와 피통치라는 계급 및 계층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역사 속에서 인간 사이의 계급은 언제 나타난 것일까? 계급기원설(階級起源說)에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그러나 신석기말에 수렵ㆍ어로생활에서 농경생활단계로 접어들면서 농업생산력의 확대가 일어나고 이에 따른 잉여생산물의 축적으로 계급사회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 견해다. 이러한 통설을 전제로 한다면, 선사시대 황화ㆍ양자강유역의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동아시아문명이 탄생한다.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농경문화가 시작된다. 바로 고조선이다. 이 지역의 토착적 농업생산약식은 잉여생산물의 축적을 가능케 만들었다. 잉여생산물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일부 힘 있는 자들이 독점하게 된다. 농업경제가 발달되면 될수록 힘에 의한 지배와 피지배 관계는 심화되어 갔다. 모계중심사회에서 부계중심사회로 이행이다.

모계중심사회에서 부계중심사회로 이행, 남성 중심의 사회는 다시 씨족(氏族)에서 부족(部族)으로, 부족에서 부족연맹체(部族聯盟体)로, 부족연맹체는 다시 국가사회(王國)로 이행되었다. 이들 왕국은 국가의 운영을 위하여 관료조직 또는 봉건제도를 실시하는 등 지배구조를 점차 확대시켜 나갔다. 곧 지배(기득권자)와 피지배(노예적 인민)의 계급구조를 갖는 영역(領域)적 개념국가의 등장이다. ‘국가’는 지배층의 생산욕구를 자극하여 더욱 많은 토지와 그러한 토지를 통하여 생산할 농업노동력(인민=피지배층)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왕과 그의 관료인 지배층들은 더 많은 농업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전쟁이라는 수단을 이용하였다. 바로 여기서 ‘군대(軍隊)’라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이리하여 군대라는 존재는 지배계급의 수호수단(영토방어)이 되었다. 그리고 농업노동력을 확실하게 묶어두는(도망방지) 수단도 되었다. 이렇게 해서 왕과 관료 등 지배계급은 군대라는 힘을 이용하여 인민을 억압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지배층은 군대의 힘을 가진 국가라는 울타리를 통하여 권력과 부를 보호 받았다. 따라서 힘의 강제에 의하여 만들어진 국가라는 울타리는 이에 예속된 인민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존재였다. 즉, 국가는 지배층의 것이지, 인민의 것이 아니었다.

인민의 무리들이 사는 곳에 어느 날 갑자기 군대가 들이닥치면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인민들을 경제적ㆍ육체적으로 착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인민들이 군대와 정치의 착취가 없는 다른 지역(영역)으로 이동해 가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런데 인민이 다른 땅으로 이동해 가는 것을 지배층들은 도망이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인민의 입장에서는 도망이 아니었다. 자연스런 삶의 방법이었다. 지배층이 말하는 도망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풀이한다면, 지배층이 국가라는 너울 쓰고 행해 들어오는 힘의 강제에 대한 피난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지배층의 국가폭력에 대한 인민의 최초 저항행위는 도망이었다. 그러나 통치권력은 자기들이 멋대로 만든 국가를 유지하고 자신들의 호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인민의 이동(도망)을 막을 수밖에 없다. 인민으로부터 그들의 제정적 수입과 국방력에 필요한 징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재권력은 인민의 유동을 막기 위해 보다 합리적인 기만술을 쓰게 된다. 인민들에게 조건을 제시하는 방법이다. 곧 제도적인 표현으로 조세율의 조정이다. 역사에서 이것을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암묵적 사회계약이라 한다. 이것은 근대유럽에서 자유민과 자유민들 사이에서 성립되는 계약의 개념과는 다르다.

이 때문에 지배층과 강제로 국가구성원이 된 인민 사이에는 늘 암묵적 계약조건(조세율)을 놓고 긴장감이 잠재하게 된다. 국가가 조세율을 제멋대로 운영할 할 때는 인민은 국가와의 암묵적 계약이 파기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인민은 이제 군대의 억압과 감시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주(도망)할 수도 없다. 더 이상의 다른 땅으로 이동이 불가능해진 인민들은 보다 적극적 형태의 저항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바로 조세저항이다. 이것을 이제까지 ‘민란’ 또는 ‘농민반란’으로 오해되어 왔다. 반란이라는 말은 왕실을 포함한 지배층들이 지어낸 개념이다. 즉 아래 것이 위 것에 대든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란의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다. 우리 역사가 죄다 지배층(정치, 국가) 위주로 쓰여 졌고, 역사를 기록하고 쓴 사람도 지배층의 하수인이었기에 그리 표현 하였다. 역사를 인민의 입장에서 재조명해 보자. 그것은 반란, 곧 농민들이 왕에 대든 것이 아니다. 인민을 억압하는 자에게 저항 한 것이고 사람다운 삶을 찾아보겠다는 몸부림이었다. 따라서 이제 ‘농민의 난’, ‘민란’의 개념은 ‘민중기의’(民衆起義) 또는 ‘농민기의’(農民起義)라고 표현함이 옳다.

또 역사에서 지배권력들은 이러한 민중의 조세저항을 특정 인물의 저지른 사건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지배층들이 지배권력을 유지하려는 교묘한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즉 군주의 권력(-국가)에 대항한 자는 특정인물이지, 인민전체가 저항한 게 아니라는 저의가 숨어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민전체의 민중기의를 부인하고, 결국 불량한 특정인물의 개인적 반란으로 치부해 버리고 만다. 그래서 늘 우리 역사에서 민중기의 또는 농민기의가 “000의 난” 등으로 표기되어왔다. 이러한 국가지배층의 자기기만은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는 오늘날에서도 독재권력들이 자주 울겨먹고 있다.(황보윤식, 내일 계속)



(가칭) <함석헌학회>가 창립됩니다. 많은 참석바랍니다.
일시: 2010년 4월 16일(금) 오후 2시
장소: 서울 시청쪽(1호선 4번 츨구) 프레스쎈타 19층(기자회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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