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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는다] 이제는 국가주의를 반성할 때가 아닌가. 5

by anarchopists 2020. 1. 20.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4/16 06:51]에 발행한 글입니다.


이제는 국가주의를 반성할 때가 아닌가

5. 역사 속에서 찾아지는 국가주의에 대한 반성

인간은 누구나 자기 생명과 건강을 지키고 사유재산을 보호할 자유가 있다. 이것이 천부인권이다. 유럽의 많은 학자와 사람들은 이러한 천부인권을 지켜나갈 바람직한 사회구조에 대하여 끊임없이 논의해 왔다. 그리고 어느 정도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바로, 국가의 통치구조는 중앙집권적 관리시스템에서 지역관리시스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공동체주의로 가야한다는 담론이 계속 거론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도 이제는 ‘미래사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여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고민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함석헌은 이렇게 지적하였다. “현실의 정부는 언제나 정직한 대표자가 아니고 사사 야심을 가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민중은 늘 제 권리를 빼앗기고 있다”(앞의 글), “지배자들은 자기네의 야심을 감추고 변명하기 위해 ‘국가’를 내세우지만, 국가주의는 결국 폭력주의다”(앞의 글)

그렇다. 우리는 지나온 세월 국가폭력을 많이 경험하였다. 오늘날은 옛날과 달리 국가(권력)가 존재함으로써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데 많은 방해를 받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국가주의를 극복할 때가 왔다고 본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우리나라에서도 평등ㆍ평균ㆍ자치의 ‘공동체주의’가 이야기되고 있다. 국가주의(폭력적 억압정치, 독재적 권위정치)를 극복하고 인간자율에 의한 평등사회를 만들어야 할 때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역사 속에서도 많이 있어왔다. 곧 농민기의(農民起義)다. 우리는 역사 속의 농민기의를 통하여 미래사회 모습의 대안을 찾아볼 수 있다.

옛날의 동아시아에서는 왕(王)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권력 위주로 역사서들이 써졌다. 이 때문에 농민들의 지배권력에 대한 저항을 민란 또는 농민의 난(亂: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윗전에 대드는 逆賊의 의미) 등으로 기록하였다. 이러한 지배권력 중심의 역사인식이 무비판적으로 오늘날에까지 이어져왔다. 이 탓으로 교과서에서도 농민과 민중들의 저항을 ‘난’으로 표기한다. 그러나 이제 역사기록은 달라져야 한다. 역사를 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게 아니다. 민중(원래 民衆은 人民으로 씀이 옳다, 그런데 인민이라는 단어가 북한에서 쓰는 단어라 하여 반공을 국시로 하던 시절, 인민이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사라졌다)의 입장에서 보면 민란은 분명 지배층의 못된 짓에 대한 자유의 항거였다. 따라서 난의 의미가 아닌, ‘사회정의를 위한 자유(=正義)의 항거’라는 의미에서 기의(起義)라고 씀이 옳다. 그래서 여기서는 민중기의 또는 농민기의로 쓰기로 한다.

이야기를 중국 송대(宋代; 960~1279)에서 시작해본다. 송은 당말(唐末)의 혼란과 오대십국(五大十國)의 분열을 극복하고 건국하였다(960) 송은 이전의 왕조들과는 근본적으로 그 구조를 달리했다. 수 세기 지속되어온 족벌적ㆍ특권적 문벌귀족을 소멸시켰다. 그렇지만 국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따라 관료 중심의 관직이 황제 중심으로 편제되었다. 군대(禁軍ㆍ廂軍) 또한 황제의 직속으로 편제시켰다. 이러한 관료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만만치 않게 소요되었다. 또 문신관료체제를 구축한 송 왕조는 외국세력의 압박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전쟁비용도 크게 증가하였다. 이는 곧바로 농민의 부세부담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송대의 역사적 배경 아래서 농민기의들이 일어난다.

송대 민중기의는 자주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기의가 왕소파ㆍ이순(王小波ㆍ李順)이 이끄는 농민기의(993), 방랍(方臘)이 이끄는 농민기의(1120), 종상ㆍ양요(鍾相ㆍ楊幺)가 이끄는 민중기의(1130)가 있다. 이외 《수호전》(水滸傳)에 나오는 양산박 송강(松江)의 민중기의 도 있다. 송강기의를 제쳐두면,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전제군왕사회에 저항하면서 이상적인 사회체제(均貧富, 等貴賤)를 주장하고 있다. 특히 왕소파ㆍ이순의 이끄는 농민기의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균산’(均産: 사유재산을 골고루 갖자)을 표방하였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정통 중국사서에서도 왕소파ㆍ이순이 이끄는 농민기의를 “균산반란”(均産反亂)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부富’와 함께 ‘빈貧’을 인식했다. 즉 ‘가난’을 가져오게 한 원인으로서 ‘부자’의 존재를 인식했다. 그래서 ‘가난’에 속한 자들은 ‘가난’의 원인을 제공하는 ‘부자’에 대항하여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곧, 부를 독점하고 있는 국가권력의 횡포에 대한 민중저항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여진이 세운 금의 공격으로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건국한다.(1127) 이러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지방호족들은 대토지사유화를 극도로 진행시키고 반대급부로 자영농이 몰락한다. 자영농의 몰락은 빈민층에 대한 압박을 가열시켰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농민들은 권력과 강자들의 수탈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하나가 호남(湖南 洞庭湖)에서 일어난 종상ㆍ양요가 이끈 농민기의다.(1130~1135) 종상은 관료ㆍ부호ㆍ유학자ㆍ승려들을 천(賤)의 적(賊)인 귀(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등귀천’(等貴賤: 귀족과 백성을 평등하게 하자)을 기의군의 이념으로 삼았다.

이렇듯 중국의 봉건왕조들은 국가라는 울타리를 치고 피지배층인 인민(百姓)에 대한 경제적ㆍ사회적 자유를 유린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슬이 퍼런 억압정치 속에서도 사회적ㆍ경제적 자유를 얻고자 했던 민중들은 사회정의(=自由)를 향해 앞으로 나갔다. 이들 민중기의군은 지배층(왕족과 귀족)에 저항하여 ‘등귀천’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불공평한 국가이익의 독점에 대한 공정한 분배, 곧 경제적 자유를 주장하는 민중기의를 일으켰다. 이들은 가난의 원인으로 부자를 인식하고 ‘균빈부’(균산)를 주장하였다. 근대 이후 개인주의가 발달한다. 자유주의와 공리주의도 이에서 파생한다. 그리고 공리주의는 복지국가를 지향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와 같은 일부 후진 국가에서는 아직도 권력과 자본을 독점하려는 중앙관리시스템(모든 자원자원과 에너지자원을 중앙에서 관리하는, 그리고 인민통치와 치안, 사법을 중앙에서 관리하는) 작동시키고 있다. 그리고 로컬리티(지역자치)를 거부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가주의에 대한 반성을 촉구해본다.(황보윤식, 월요일 계속)

(가칭) <함석헌학회>가 창립됩니다. 많은 참석바랍니다.
일시: 2010년 4월 16일(오늘) 오후 2시
장소: 서울 시청쪽(1호선 4번 츨구) 프레스쎈타 19층(기자회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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