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기도, 하늘의 창문을 여는 것(야고 5,13-20)

by anarchopists 2019. 10. 2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10/01 02:53 ]에 발행한 글입니다.

기도, 하늘의 창문을 여는 것(야고 5,13-20)

그리스도교를 비롯하여 세례의 여러 종교들은 기도라는 행위가 중요한 의례로 틀잡혀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에 입문을 하자마자 기도라는 말만큼 많이 듣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도는 참으로 어려운 것으도 인식되기도 합니다. 그보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기도라는 것이 정말 올바른 기도행위인가, 라는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는 것 같은데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발생하지 않거나, 정반대의 상황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기도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란 어떤 상황이 일어나도록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도는 마음이 하늘에 닿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기도는 땅에 발을 딛고 있고 몸이 현실이라는 시공간에 묶여 있지만, 그 현실을 넘어서 시선을 하나님께 두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횔덜린의 시를 보면 그 생각이 좀더 명확해집니다. “하늘의 창문 열려진 채이고 또한 하늘의 폭풍 일으키는 자, 밤의 정령이 풀려난 채, 우리의 땅에 대해 지껄이고, 여러 가지 언어로, 제약 없이, 그리고 파편을 굴리고 있었다. 시간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 온다,”(<가장 가까이 있는 것-두 번째 착상>).

기도는 하늘의 창문을 여는 것, 아니 열려진 채 그 창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수많은 시간과 시각을 촘촘하게 나누어 쓰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연을 향하게 하고, 억압된 정신을 해방시키는 것은 기도, 즉 성스럽고 깊은 마음 씀씀이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은 고난과 고통과 아픔과 상처와 무기력에 시달립니다. 그럴 때 기도를 해야 합니다. 자신의 억압된 마음과 기분, 그리고 정신이 현실에 묶여 있고 아무런 의식이 없이 헛소리만 난무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면, 거룩한 언어, 신비한 언어로 자신과 타자를 위해서 하늘을 향해 마음을 전달해야 합니다. 땅에 살고 있다고 해서 정신마저 중력을 이기지 못한다면 의미 없고 진실하지 못한 언어만 서로 주고받을 뿐입니다. 그 말은 전혀 가치도 없는 언어와 시간의 파편으로 흩어질 뿐입니다. 성서의 저자가 병자가 병이 낳고, 죄인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지금까지 분리되고 분열되었던 자기 자신의 정신을 하나님과 연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늘의 창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진리의 빛이 들어오고, 성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올 때 인간의 삶에 서광이 비추는 것입니다. 기도란 그렇게 인간의 삶에 빛이 비치고 희망을 주는 힘입니다.

횔덜린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그 때에 환호성 울리는 찌르레기들처럼, 올리브나라에서 사랑스러운 의지에서 태양이 찌르는 듯하고 또한 대지의 심장이 열리면 그리고 문턱들이 손님을 반겨 맞는 곳, 꽃들로 장식된 거리에서, 그들은 말하자면 고향을 알아챈다," 시인이 말하는 “만일”이라는 조건과 가정을 시문장의 어느 부분에 붙여야 할지 애매모호합니다. 기도는 가정이나 가능성을 넘은 현실성입니다. 가정과 조건이 붙는 기도는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기도의 언어를 발언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현실이라고 믿어야 효력발생이 됩니다. 기도는 타자를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심정을 읽어내며 곳곳에서 현존하는 그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고백을 하고 남을 위하여 대도를 하는 것은 기도란, 나의 언어가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언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기도는 나의 사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서로 주체가 된 사람들이 공통의 신앙을 하늘 창문에도 표현합니다. 하늘 창문에 닿으면 그동안 우리가 ‘만일’이라고 말했던 가정법이 현실이 됩니다. 기도를 하면서 기도의 언어나 마음이 곧 나의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서로를 향하고 삶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향하는 것은 기도의 공공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기도가 사적인 것이고 단지 내밀한 언어나 심정으로만 끝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기도의 방법이 어떠하든지, ‘만일’이라는 가정법을 뒤로 하고 나와 타자,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올바른 기도, 올바른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공동체(community)라는 말이 ‘함께 선물을 나누는 집단’을 일컫는 것이라면, 기도는 결국 집단과 개인, 개인과 개인의 마음을 나누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눌 때에 '만일'이 현실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의 효과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반기는 말, 무엇보다도 내 말이 아니라 타자의 말, 무엇보다도 나의 절박함보다는 공동체의 절박함을 떠올리며 기도한다면 그 바람이 하늘의 창문을 두드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창문을 두드리는 것은 그분이 낯선 나를 환대한 것처럼, 나의 언어를 통하여 낯선 타자를 향해 그분의 마음 창문이 열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기도가 무엇을 얻기 위한 사적인 고백과 소리나 말의 발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타자를 위할 때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것은 길을 벗어난 타자에게 하늘이 명령하고 제시한 길을 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하늘로부터 온다는 것은 기도의 길을 따라서, 기도의 도를 따라서, 기도의 언어(logos)를 따라서 그분이 온다는 것을 뜻합니다. 올바른 길을 따라 오는 그분을 맞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내 안에, 타자 안에 사랑과 자비, 희망과 용기의 길을 내기 위함입니다. 기도가 길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릇된 길에 있거나 길을 잘못 들어섰거나 할 때 마음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말-길을 내면, 그 말-길 혹은 소리-길을 통해서 그분이 삶의 길을 새롭게 열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땅을 밟고 다니는 길만 길이 아닙니다. 마음의 길, 말의 길, 소리의 길, 진리의 길은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통하여만 의미가 있습니다. 기도의 언어, 기도의 말이 ‘나’에 집중되지 않고 타자 혹은 서로를 지향하게 될 때, 그 기도를 통한 길은 분명히 생명과 희망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샤랑트 강의 촉촉한 초원 위에, 그리고 북동풍이 날카롭게 불어서 그들의 눈을 대담하게 만들면, 그들은 날아오른다, 헤센 지방 그리고 뷔르템베르크의 밀밭, 그리고 유명해지는 곳 그대들 영원한 달램 그대를, 그리고 구석진 곳, 그리고 아이들이 놀았던 곳." 횔덜린의 말입니다.

기도는 특정한 공간과 장소를 초월합니다. 진리의 길, 희망의 길, 치유의 길, 회복의 길을 내야 할 곳이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하늘의 창문을 열어 하나님의 시선을 보여줍니다. 기도는 그래서 그 시선을 의식하여 하나님의 창문을 통한 강렬한 빛에 자신의 추악하고 더러운 마음을 내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려진 창문 틈사이로 비치는 사랑과 자비의 빛을 인식한 사람들은 죄의 용서를 구하고 자신의 마음과 의식과 정신이 정화되도록 더욱 더 하늘 창문을 응시하려고 합니다. 땅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응시하는 것이 기도라면 그 하늘 창문을 통해서 비추는 빛 때문에 자신을 감출 수가 없으며 하늘 창문처럼 순수한 신앙과 마음을 가지려고 할 것입니다. 횔덜린은 그것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독일에는 많은 것들이 있다 한데 속해 있는 다정한 정령들의 거처가 거기에 있다. 그리하여 순결한 자들을 같은 법칙이 구분해낸다. 그러나 일상이 머물면 대지의 망각 그러나 거기에다 진리를 숨 쉬고 있는 자들에게 영원한 아버지가 주신다.”

기도가 있어야 할 거처, 기도는 있어야 할 곳은 사방에 있습니다. 기도가 있다는 것은 기도해야 할 존재가 있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기도가 있다는 것은 기도를 해야 할 당위성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정신적인 존재가 아픔을 겪는 시대에는 기도가 있어야 할 곳, 기도가 드러나야 할 곳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도는 항상 그렇게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마땅히 있어야 할 그곳 때문에 기도하게 되고, 그 목소리를 다만 그리스도인이라는 특수한 존재자에게 의탁할 뿐입니다. 누구나 기도를 합니다. 일상의 기도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일상은 땅도 하늘도 망각하게 하지만 진리를 인식하고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도를 선물로 받습니다. 삶을 망각하고 신을 망각한 자리에 기도가 싹트고 기도를 통해서 신이 비로소 다시 존재하도록 만듭니다. 기도는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영리나 욕망을 위해서 방편이나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땅과 맞닿아 있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면서까지 진리 안에서 호흡을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기도의 존재조차도 망각한 사람들에게 진리의 숨을 불어 넣어주는 것도 기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마땅히 있어야 할 거처, 바로 그곳을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시선은 나의 시선이 아니라 하늘 창문을 통하여 비춘 그 빛에 의해서 따라가는 거룩한 시선입니다. 그 시선 속에서 기도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머무는 곳을 찾고 그 기도를 따라가야지, 기도가 우리를 위해 따라가는 방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인간을 도구로 삼아 하나님의 빛과 의지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창문이자 하나님의 거처이기 때문입니다.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간신히 대학 두어 곳에서 철학과 종교를 가르치며 먹고 사는 사람, 칸트와 후설에 입각한 해체구성적 종교를 지향하는 사람, 함석헌과 같은 아나키즘(해석학적 호불호가 엇갈리지만)적 인간의 자유와 에코아나키스트 머레이 북친과 같은 자연의 해방을 염원하는 사람.

알림--------

함석헌평화연구소 소장님이신 황보윤식 선생님께서 동인천 싸리재 카페에서 10월 4일부터 매월 첫째 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묵자강독이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싸리재 연락처: 032-772-0470

(예지요양병원/인천기독병원 방향)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