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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침묵의 벽을 뚫고 오시는 로고스(히브 4,12-16)

by anarchopists 2019. 10. 2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10/15 02:47 ]에 발행한 글입니다.

침묵의 벽을 뚫고 오시는 로고스(히브 4,12-16)



귀를 위해서 말이 있는 것 같지만, 말을 단지 귀로만 듣지 않습니다. 귀는 말소리를 듣는 도구이지만, 정작 말을 듣는 곳은 마음입니다. 말이 건드리는 곳은 마음인데, 청각적 기호로만 말을 알아듣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특정한 인간 집단이 언어적 규약공동체로 모였다 하더라도, 말이 오고가는 맥락에 따라서 말을 사용해야 서로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다. 맥락을 중요하게 여기는 규약공동체를 벗어나면, 똑같은 말이라 할지라도 다르게 들을 수 있습니다. 신앙언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그 말을 사용하고 있는 공동체의 약속언어이기 때문에 말과 마음이 잘 일치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말이라 하더라도 교회 바깥으로 나가면 다르게 들리기도 하고 오해의 소지가 생기기도 합니다. 모름지기 신앙언어는 그리스도인의 귀를 위해서 있습니다. 들으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귀를 향해 말을 하려면 청각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좋은 마이크와 확성기가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공동체 안에서 이야기되는 말, 혹은 말씀은 신앙인의 마음을 향해 발언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교회 공동체 구성원 전체에게 전승되고 합의된 공통된 언어입니다. 하느님과도 규약을 맺은 신앙언어는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고 가르고 꿰매고 어루만지고 파고들어갑니다. 말씀이 마음에 기입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단순히 음성으로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음성적 쓰기처럼 마음에 각인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미디어 현상학자인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는 “쓴다는 것은 표면 위에 물질을 올려놓는 것이 아니라 표면을 긁는 것으로, 그리스어 동사 graphein이 이를 입증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말씀으로 울려퍼지는 소리는 마음의 표면을 뚫고 들어갑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신앙인의 마음에 글을 쓰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자신의 생각을 신앙인의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으면 신앙인의 마음은 점점 더 하느님의 마음과 생각과 가까워지는 듯합니다. 그것이 올바르게 말씀을 듣는 태도입니다.


횔덜린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백성들 침묵하고 졸고 있었다, 그때 운명은 알았다, 그들 영원히 잠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자연의 가차 없는, 두려운 아들 불안의 오랜 정신이 다가왔다, 그 정신, 대지의 심장에 끓고 있는, 잘 익은 과일나무 같은 옛 도시들을 흔들어대는, 산들을 잡아채고, 참나무들과 암벽을 감아 내리는 불길처럼 일어났다”(<백성들 침묵하고 졸고 있었다...>). 졸고 있는 운명에 빠져 있는 사람들, 그러나 영원히 잠들 수가 없는 사람들은 불안한 상태로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침묵을 한다고 하지만 마음과 생각과 속셈을 다 알아차린 말씀의 주재자는 불안한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와 문을 두드립니다. 그 말씀은 오랜 정신이고 익숙한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 졸수도 없고 잠들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깨어 있는 상태로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씀은 항상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정신의 모습을 밝혀줍니다. 그렇게 항상 말씀은 빛으로서 신앙인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 줍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알아차릴 때마다 자신의 생각과 충돌을 일으켜 마음과 정신은 전쟁터가 됩니다. 마음을 흔들어서 결국은 신앙인의 마음과 정신을 불같이 뜨거울 정도로 생기 있게 만들어 줍니다. 말씀은 사람들로 하여금 몰아세웁니다. 말씀의 속성은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함으로써 그 흔들리는 마음 안에서 새로운 하느님의 정신을 찾게 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항상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 보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말씀은 신학적 정보나 세간의 지식도 아니요 더욱이 마케팅 언어(상술적 언어)나 프로파간다도 아닙니다. 말씀은 침묵하고 있는 인간의 마음에 그 오랜 정신을 심어준 것을 다시 되찾도록 해줄 것입니다.


빌렘 플루서는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을 고른다"라고 했습니다. 말을 고른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해야 할 말을 선별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타인의 마음을 말로서 고르게 한다(가다듬어 평탄하게 한다, 정상적이고 순조롭다, 가다듬어 안정시키다)는 의미도 될 수 있습니다. 심판이란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서, 하느님 앞에서 내 마음이 고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은 엄중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어떤 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내 마음이 잠잠하게 되기도 하고 요동치게 되기도 합니다. 침묵하기도 하고 격노해서 언성을 높일 때도 있습니다. 말은 골라서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자신이 인간에게 해야 할 말을 고르고 또 골라서 인간에게 행복한 기분(stimmung)과 불행한 기분을 번갈아 느끼게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고를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당사자로부터 오는 것이어서 어떤 말씀이 당도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그분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 온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횔덜린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마치 끓고 있는 바다처럼 무리들 광란했다. 또한 해신처럼, 들끓는 소동 가운데서 많은 위대한 정신 군림하고 지배했다. 불처럼 붉은 많은 피 죽음의 들판에서 흘러내렸고 모든 소망과 모든 인간의 힘이 한 곳, 엄청난 싸움터에서 광란했다.”


오늘날 광란의 기분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의 기분은 들끓고 정신은 자본과 물질에 지배를 당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존재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더욱이 신앙인의 정신도 광란과 지배와 죽음과 전쟁과도 같이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말씀입니다. 정확하게는 말씀 이면의 예수의 존재입니다. 말씀을 들으면 예수가 현존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폴 리쾨르(Paul Riceour)가 “말하는 사람 이전에는 상징이 없다”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 현존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 현존의 다양한 상징들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광란의 기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지배를 당한 기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죽음이 엄습한 기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전쟁을 치르는 기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씀은 예수처럼 다가옵니다. 그럼으로써 그분이 실제로 존재하는 듯이 우리의 온갖 부정적인 기분들을 극복하게 해주면서 신앙을 지키도록 해줍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에 대한 신앙을 잘 간직하도록 도와줍니다. 단, 말씀을 통하여 예수의 상징들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그분의 있음(sein)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신앙은 의미가 있고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말씀을 말하는 사람에 의해서 예수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신앙인이 신앙이 있다는 것, 신앙인이 신앙인 자신의 존재조차도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란 그렇습니다. 말에 대한 확신과 말을 하는 사람에 의해서 흘러나오는 말을 어떻게 신뢰감을 가지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존재/부재 여부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횔덜린의 시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거기 푸르른 라인 강에서 티베르 강에 이르기까지 저지할 수 없는 수년간의 전투가 엉성한 질서 가운데 사방에서 일어났다. 강력한 운명이 이 시절에 모든 필멸의 자들과 대담한 유희를 펼쳤다. 또한 밝고 귀여운 별들처럼 황금빛 열매들이 이탈리아의 등자나무 숲의 시원한 밤을 뚫고 그대에게 다시 반짝이고 있다.” 숱한 관념과 현실의 전투가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인생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삶의 놀이를 멈추지 않습니다. 전쟁터라고 해서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웃음이 있고 해학이 있으며 생명이 있고 낮밤이 있고 밤하늘의 별들도 존재합니다. 애오라지 그 가운데서도 여전히 우리는 예수에게로 다가가려고 하는가, 하느님의 자리에 가까이 나아가 그분과 함께 생명의 놀이를 하자고 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어디로 우리가 가고 있는지,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그 좌표를 모르면서 아무런 놀이를 할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그 놀이가 우리를 살리는 놀이인지, 아니면 영원히 죽이는 놀이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시 내 마음에 각인이 되어 있는 예수의 말씀, 하느님의 말씀이 존재하여 그것이 진정으로 내 삶의 놀이가 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새겨져 있지 않고, 마음에 기입되어 있지 않은 말씀이 나를 삶의 전쟁터에서 구해줄 리는 만무한 일입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에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인 말에 다가가야 하고, 하느님의 문자가 나의 삶의 놀이터에 씌어질 수 있도록 그 소리 가까이에 다가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의 말씀은 세계의 수많은 저항과 삶의 온갖 두터운 지층들을 뚫고 나의 가슴으로 들어와 위험한 나의 실존을 구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은 때로는 음유시인처럼 아름답게, 때로는 연설가처럼 특유의 직설어법으로 자신의 단어를 현실화시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늘 낮은 어조로 분명한 로고스를 전달한다는 사실을, 이 소음의 시대에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빌렘 플루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침묵 속에서 말은 말하고 빛난다...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뭔가 할 말이 있어서’이기보다는 말이 침묵의 벽을 뚫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하느님의 말씀도 늘 이와 같지 않을까요?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간신히 대학 두어 곳에서 철학과 종교를 가르치며 먹고 사는 사람, 칸트와 후설에 입각한 해체구성적 종교를 지향하는 사람, 함석헌과 같은 아나키즘(해석학적 호불호가 엇갈리지만)적 인간의 자유와 에코아나키스트 머레이 북친과 같은 자연의 해방을 염원하는 사람.




선생님께,

930일 알려드렸듯, 함석헌학회 (회장: 이재봉)는 함석헌평화연구소 (소장: 황보윤식)와 공동으로 다음과 같이 10월 공부모임을 갖고자 하니 큰 관심 갖고 많이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일시: 1019(금요일) 오후 3-5

장소: 서울 향린교회 향우실 (명동성당 건너편)

주제:  함석헌사상과 아나키즘

사회:  황보윤식 (함석헌평화연구소장)

발표1:  김대식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함석헌과 아나키즘의 메타적 성담론

발표2:  한송옥 (부경대학교 국제정치학교수), "함석헌의 퀘이커 아나키즘

발표3: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학/평화학교수), “비폭력적 한반도 평화와 통일

참고로, 저는 아나키즘 (anachism)’무정부주의로 옮겨 사용해왔는데, 황보윤식 선생은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란 글을 통해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것을 비판해왔습니다. ‘아나키즘인간의 미래 삶에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으로서 인간의 절대자유와 자율성 보장을 주장하는 정치사상인데,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면 테러리즘이나 폭력주의로 오해하거나 왜곡하기 쉽다는 것이지요. 제가 외국어/외래어 사용을 될수록 자제하면서도 공부 주제를 함석헌사상과 아나키즘으로 쓴 이유입니다. 참석하셔서 좋은 의견 많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며 이재봉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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