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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말씀

국가주의가 낡아지는 때가 왔다.

by anarchopists 2020. 1. 2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6/22 08: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선생님 말씀 2]

오늘의 주제
국가주의가 낡아지는 때가 왔다.

오늘은 ‘국가주의’에 대한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이제 이때껏 하나님인 줄 알고 섬겼던 국가주의가 낡아지는 때가 왔다. 이제 인간은 너무 좁은 테두리 속에 갇혀 있을 수 없이 되었다. 이때껏 귀히 여긴 것이 똥과 같아지게 됐다. 옛날 무기는 들면 도리어 짐이요, 벗어서 박물관에 두면 새 정신을 일으키는 역사교육의 자료가 된다.

낡은 종교는 벗어서 역사박물관에 걸어라! 그리고 무기는 지금 건너는 역사 일선의 냇가에서 주워 드는 두서너 개의 조약돌이면 충분하다.! 가톨릭의 조직이 훌륭하대도 요컨대 봉건시대의 작품이요, 프로테스탄트의 교리가 날카롭대도 아무래도 국가주의 시대의 산물 아닌가? 그것을 벗어라! 벗고 나서면 새 종교는 발 앞에 있을 것이다”
<삶의 길> 함석헌 저작집 제2권 《인간의 생명》

위의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을 해석해 보자. 함 선생님은 늘 국가주의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였다. 함석헌 선생님이 말하는 내던져야 할 국가주의는 무엇인지, 이를 오늘에 살려내어 다시 음미해 보자. 국가주의는 인간 사회에 힘의 논리가 지배하면서 발생한 지배층의 울타리이었다, 따라서 인민의 울타리는 아니었다. 힘을 가진 자들은 언제나 기회가 되면 국가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지배층으로 군림해 왔다. 그리고 이 울타리 안에 인민들을 가두어 놓고 그들을 착취해 왔다. 바로 조세제도요, 징병제도다. 그러니까, 국가라는 울타리가 존재하는 한 그 속에 갇혀있는 인민은 백날 지배층의 착취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인민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다. 한낱 지배층의 국가울타리를 지탱해 주는 도구요 수단일 뿐이었다.

고대 역사에서는 그래도 국가구조가 단순하여 인민들을 짓누르는 착취도구가 단순하였다. 정치가라는 지배층에게만 속박 당하면 그만 이었다. 그런데 고대 중반기에서 중세로 들어오면 국가라는 울타리를 타고 인민을 착취하는 지배구조가 하나 더 생긴다. 종교다. 종교는 국가라는 울타리를 이용하여 권력과 친밀하게 밀착(기존 권위와 권력에 대한 사회적 복종은 그리스도교도들의 의무다-루터)한다. 그리고 이 두 지배권력은 인민에 대한 착취를 분업화 한다. 곧, 정치가는 현실적 착취를, 종교는 내세적 착취를 담당한다. 그래서 이제껏 종교는 사랑ㆍ평화ㆍ천당이라는 관념세계를 만들어 내세의 운명을 매개로 물질적 착취를 합법화해왔다. 그러니까 국가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인민들 입장에서는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으로부터 이중 억압을 당해 온 셈이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자본주의가 국가주의와 결합된다. 그래서 국가는 자본주의 국가라는 울타리로 둔갑한다. 인민들로 볼 때 그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존재가 더 늘어난 셈이다. 자본의 힘이요, 자본가다. 그래서 현대 자본주의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 사는 인민들은 이제 정치가와 종교가, 그리고 자본가라는 지배층에게 삼중으로 속박을 당하고 있다. 그래서 국가라는 도구는 정치가ㆍ자본가ㆍ성직자들이 인민에게서 빼앗은 것들을 가지고 그들의 울타리를 더욱 견고하게 재건축해 내고 있다. 이렇게 현대 국가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인민들은 권력과 종교 그리고 자본의 힘에 짓눌려 숨쉬기조차 어려울 지경이 되어 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님은 국가라는 울타리, 그리고 권력과 타협하여 인민을 정신ㆍ물질적으로 이중 속박하는 종교라는 울타리까지 모두 거두어서 역사박물관으로 보내자고 했다.  인민에게 있어서 국가주의는 자신들을 억압하는 무익한 울타리일 뿐이다. 이제 인민을 가두고 속박하는 울타리를 더 이상 만들지 말자. 인민은 그들의 삶의 방법은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바로 지역공동체요, 자치공동체다. 국가주의의 대안이 공동체주의가 아니던가. 그것도 지역공동체보다 자치공동체. 씨알들이여, 자치공동체 운동을 할 때가 아니련가.(취래원 농부, 2009. 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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