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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함석헌 가라사대, 도덕적 삶이 곧 행복이다

by anarchopists 2019. 11. 2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1/07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도덕적 미학과 행복:
태초에 행복이 있었다!

“행복은 세계 안에 반드시 존재한다.” 이른바 행복의 존재론적 선언은 행복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염원이 담긴 것이다. 누구나 행복하고 싶어 한다. 아니 세계의 어느 존재나 행복을 갈구한다. 그러나 실제로 행복이 실재하는가 하는 물음에는 쉽게 답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실재의 문제는 결국 객관 혹은 보편의 문제인데, 행복이란 주관적․상대적인 판단, 감정, 이해, 상황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행복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인 ‘happy’의 어근은 ‘hap’인데, 이는 ‘우연’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무엇을 두고 행복이라 규정하는가는 그때그때 개인의 우연적인 사건에 의해서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겠다. 그만큼 행복을 언표(言表)한다는 것은 분명히 어렵다. 행복 존재론은 몰라도 행복 실재론을 통찰하여 설명하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 1788-1860)처럼 고통은 인간에게 늘 있는 적극적인 상태인데 반해, 인간의 쾌락은 하나의 소극적인 상태로 보고 만족을 얻은 의지의 찰나의 소멸이 가끔 행복감을 느끼게 해줄 따름이라고 염세론을 펼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행복의 존재와 실재를 일치시킬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는 것일까?
칸트(I. Kant, 1724-1804)는 무조건이고 그 자체가 선한 것은 오직 선의지(善意志)뿐이라고 말한다. 선의지는 어떠한 인간의 욕망이나 성향의 명령에 따르는 의지가 아니라 순수한 이성의 명령을 따르는 의지이다. 그는 이 선의지의 사람들이 모인 사회를 목적의 왕국이라 부른다. 또한 최고선(最高善, summum bonum)의 조건은 인간의 의지와 도덕 법칙의 완전한 조화, 즉 도덕과 행복의 일치를 말하는데, 덕이 있는 사람은 그 최고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복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비록 인간의 행복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지는 않았지만, 도덕법칙에 따르는 ‘덕스러운 사람이 행복하다’, 혹은 도덕법칙에 따르는 ‘덕스러운 사람이 신에게 복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맥락의 구구한 해석은 뒤로 하더라도 한마디로 말한다면, ‘행복하려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려면, 혹은 죽어서도 행복하려면 덕이 있는 사람,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칸트가 행복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을 했는데, 그 이유는 행복 때문에 의무나 최고선에 입각한 삶을 등한히 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또한 그는 도덕적 삶 때문에 행복해진다고 말했지, 행복해지기 위해서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칸트의 생각은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으로서 행복은 외부에서, 외부의 환경이나 대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성(의식, 정신) 혹은 내면에서 비롯된다고 본 것이다. 칸트다운 주장이다. 덕은 의지의 문제, 의무의 문제, 자유의 문제이다. 흔히 현대인들은 행복이 돈, 시간, 자녀, 직장, 명예, 음식, 성적 쾌락 등등 외부적 환경이나 변화에서 온다고 생각하지만 행복은 타자에 대해서 내 자유의지가 어떻게 행위 하려고 하는가, 타자에 대해서 어떤 의무를 가지고 있는가를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신에게서 복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의 논리를 내세워 내면의 가치나 타자에 대한 윤리적 행위를 강조한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가 내면의 가치에 충실하며 타자에 대한 윤리적 숙고가 현실화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도덕적 종교 공동체로서의 종교가 행복을 강조하지만 정작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갖고 있었던 윤리적, 도덕적 이야기(narrative)를 제대로 이어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덕스러운 행위를 통해서 이웃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함석헌이 말한 대로 “하늘의 문”인 “마음의 문”을 열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하늘의 문과 마음의 문을 같이 본다. 하늘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이웃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타자를 향해서 닫힐 때는 서로 불행하고, 우리의 마음이 그들을 위해 열릴 때는 서로 행복할 수 있다.

이웃에게 덕을 베풀어야, 이웃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늘의 문도 열려서 나도 행복할 수 있는 법이다.
우리나라 풍습에 설날이 되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덕담을 나눈다. 함석헌은 이에 대해서 “오늘부터는 서로 나쁜 마음먹지 맙시다”하는 뜻으로 풀이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쁜 것이 무엇이야요? 닫는 것입니다. 본래 열린 하늘인데 제각기 마음을 닫고 보니 어둠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면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본다”고 했습니다. 세계를 하나로 오고가는 큰 바닷물인데, 우리 집 마당 도랑에 들어오면 더럽습니다. 본래 하나인 것을 갈라가지고 서로 닫고는 너․나 하기 때문에 고움․미움․슬픔․선악이 생겼습니다”(함석헌저작집9,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2, 한길사, 2009, 245-246쪽).

마음 닫힌 상태는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없다. 마음이 열려야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데, 그 넉넉한 덕스러움에서 행복이 싹틀 수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시간은 우리를 불안하게도, 기대하게도 한다. 시간은 절망과 희망을 가지고 있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고 하는 계기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시간은 시시때때로 우리의 삶과 죽음, 기억과 상실, 기쁨과 슬픔 등의 사건들과 함께 한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인식 범주 안에서 보면 시간과 행복은 나란히 동행하는지도 모른다. 시간 속에서 보면, 인간이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것은 ‘잠정적 행복 상태’를 나타내며, 희망은 ‘절대적 행복 상태’를 예기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의미의 공허’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한다. 잠정적 행복 상태에 있다고 해서 의미 공허감이 지속된다면 절대적 희망은 도래하지 않는다. 물론 의미 공허감이 심해진다는 것은 인간의 욕심이 과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절망의 상황에서 그것이 잠정적 행복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의미 공허를 극복하는 것이고 동시에 일신의 이익과 물질의 유혹으로 인한 욕심에 경도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씨알이 씨알일 수 있는 것은 희망, 즉 절대적 행복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순수정신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또한 약하디 약한 정신을 가진 씨알에게는 잠정적 행복이 현실적 행복이 되도록 그 시간을 앞당기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을 위해서 마음을 나눠주는 덕스러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덕스러운 씨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은 절망하는 사람만이 가진다... 산 생명에는 죽음이 없다. 희망은 그런 사람하고만 말할 수 있다. 생명 그 자체 안에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 욕심은 몸을 위한 것이지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몸을 생명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욕심을 그 몸에 쓰고 정신에 쓰지 않는다. 그것이 잘못 보는 것이다... 희망을 가지는 것이 씨알이다... 씨알은 딴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다 씨알이다”(함석헌저작집9,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2, 한길사, 2009, 260-261쪽).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장애를 가진 이들을 위해서, 슬퍼하는 이들을 위해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을 위해서,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폭력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서, 자신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위해서, 이런 모든 이웃들의 행복을 위해서 덕으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행위 자체가 결국 우리 자신의 행복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 함석헌은 말한다. “복을 빌어준다는 것은 좋기를 바라는 생각․마음․말․식만이 아닙니다... 그대로 엄숙한 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보시오. 거기 영원한 하늘 바람 드나들고 그 하늘 음악 들으면 모든 시름이 가위눌림 사라지듯 사라질 것입니다”(함석헌저작집9,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2, 한길사, 2009, 244, 246쪽).

올해는 마음을 열고 타자(他者), 곧 모든 씨알의 행복을 빌어서 그것이 엄연한 사실(fact)과 현실(actuality, 비존재가 아님)이 되도록 해보자. 그래서 태초에 행복이 있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실재(reality,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느끼게 해주자(2012/01.07,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 본문 내용 중 사진 가운데는 오마이뉴스( 블로그 행복을 그리며)에서 아래는 경향신문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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