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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정치적 행복'을 위해 정부차원의 조문객을 보내라.

by anarchopists 2019. 11. 2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2/22 06:39]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정치미학과 인간의 행복

우리 사회에 행복에 대한 담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한참 가난한 시절에는 백성의 행복이란 단지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에 있었다. 그 근본적인 상황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이제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살만한 환경이 되다 보니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묻기 시작하면서 그 행복에 대한 열
망을 넘어서 오히려 도착적 욕망으로 변하는 듯하다. 물론 그 이면에는 물질적 행복이라는 것이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는 다음과 같이 일침을 놓는다.

“재물이란 엄밀히 말하자면 과도하게 넘쳐나는 사치다.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행복한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교양이나 지식이 세상에 턱없이 부족하고, 또 지적인 작업에 걸맞은 흥미를 못 느껴 불행하다고 느끼는 부자들이 허다하다.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도 이상의 재산이 결코 행복을 더해주지 않는다. 재산이 많으면 오히려 행복에 방해가 된다. 재산을 지키는 데는 엄청난 불안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복에 있어서, 아니 인간의 모든 삶에 있어서 핵심은 그 사람의 내면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A. Schopenhauer, 友田葉子 엮음, 이혁재 옮김, 쇼펜하우어의 행복콘서트, 도서출판 예인, 2011, 22-25쪽).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이미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인간이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고 말하면서, 그 특성이 행복(eudaimonia)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행복’, 즉 ‘유다이모니아’라는 그리스어를 영어로 번역하면 ‘well-being’ 정도가 될 텐데, 오늘날 ‘참살이’, 혹은 ‘복지’라 할 수 있을까? 조금 어색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이란 인간의 도덕적 목적에 가깝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인간의 이성적 사유를 통한 진리를 파악하는 관조적 삶(contemplative life)을 참된 행복으로 보았다.

이것은 함석헌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생각하는 인간, 이성적인 숙고, 세계를 성찰할 수 있는 인간을 강조했던 그의 사상을 상기해보면, 인간은 물질에 몰두에 있을 때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가 비로소 행복한 존재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인간은 모름지기 향락적인 삶이 아니라 이성적인 존재로서 사유하면서 살아가는 게 최대의 행복이라는 것을 깨우쳐야 한다. 바로 이러한 행복을 위해서 정치가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정치와 윤리가 분리되지 않는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는 참된 정치의 구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잘 산다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행복이 증진되는 것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따라서 씨알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씨알 자신에게 국가의 정치적 배려가 보편적인 정서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함석헌도 정치와 행복에 대해서 논한 바가 있다. 좀 길지만 그의 말을 찬찬히 음미해보자. “사람은 처음부터 정치적입니다. 정치는 처음부터 잘못입니다. 하여야 할 참은 아니하고 평화와 행복과 영광을 제 힘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입니다. 씨알은 정치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이 그 근본 덕입니다. 겸손으로써 참을 지켜 이 땅 위에 새 차원의 세계, 곧 하늘나라를 임하도록 해보잔 것이 그 사명입니다. 예수님의 말대로 한다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해 내가 기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고 원통히 여기는 회개하는 심령이라고 했습니다”(함석헌저작집 9,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2, 한길사, 2010, 147쪽).

함석헌의 어록은 정치도, 행복도, 심지어 평화도 인위(人爲)가 아니라 무위(無爲)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에 따르면 정치, 행복, 평화, 영광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드러운 어떤 아니-‘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결과들이다. 만들기 위해서 애쓰다 보면 올바른 다스림의 행위여야 하는 정치(政治)가 결국 거짓이 난무하는 행위가 되고 마는 것이다. 정치는 참의 구현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 참을 통해서 백성이 행복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가이든 백성이든 인위가 아니라 무위로서 ‘겸손’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늘과 땅의 자연스런 이치에 따른다고나 할까?

2천 년 전 『성서』에는 예수가 말했을 법한 ‘행복선언’이 전해온다. 「마태오의 복음서」에는 9개의 행복이 선언되고 있는데, 그중에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온유란 원래 히브리적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된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온유(praotes)란, 지나친 노여움을 의미하는 오르길로테스(orgilotes)와 지나친 태평무사를 의미하는 아오르게시아(aorgesia)의 중간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교만이 사라진 참된 겸손과 온유가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용된다. 온유의 관념 안에는 과잉된 소유가 아니라 그날의 필요만을 생각하는 것이 들어있다. 그런 그들에게는 새로운 땅(ge)이 상으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 땅은 신의 통치 영역이 두루 미치는 곳을 의미할 것이다. 신이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들과 함께 다스리는 나라라, 멋있지 않은가? 하느님의 나라(Herrschaft Gottes)는 바로 그러한 것이요, 세상의 정치 또한 그러한 것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그렇다고 종교가 정치에 간섭을 하고 특정한 종교 이념이 반영된 신정정치(神政政治)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든, 올바로 나라를 경영해 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고 뜻을 합하는 백성들이든 모두가 겸손해야 한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더불어 행복해지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가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겸손한 사람들은 권력이나 재물을 과잉되게 소유하려 들지 않을 것이요, 다른 이웃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사유의 기쁨을 누리는 자들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과 세계를 관조 혹은 명상하는 삶이 전제되어야만 할 것이다.

사족을 달자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후 조문 문제를 놓고 남남 갈등을 우려한 정치계의 입장들이 난무한 가운데, 언어적 표현조차도 신중해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그러나 절대, 상대, 존대, 적대, 환대 등의 엇갈린 감정들을 떠나서 무엇이 백성이 원하는 정치적 덕이며, 정치적 행복인지를 생각해보면 대대로 이어 온 우리나라의 상례(喪禮)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도 가늠이 될 법하다. 또한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에서 이제 갓 북한의 지도자로 승계한 김정은은 백성의 가장 기본적인 행복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써야 할 과제를 떠맡았다. 인간의 이성적인 사유 행위, 인간의 끊임없는 관조적 행위가 독일의 통일을 불러왔듯이 우리나라도, 그리고 북한도 그 미래를 향해 진일보하는 정치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2011/12/22,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 본문 내용 중 사진 아래는 뉴시스 2011년 12월 21이라엣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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