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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토요 시사

6.25전쟁의 진실은 무엇일까

by anarchopists 2019. 12. 1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6/25 06:43]에 발행한 글입니다.


6.25전쟁의 진실은 무엇일까.

이명박 대통령이 6·25전쟁 61주년을 맞아 참전용사들이 죽은 전우들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6·25의 참혹한 역사와 그 진실의 역사를 6·25에 참여했던 세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 그 이후 후손 세대에도 정확히 가르치고 교육해야 합니다."(YTN 2011. 6.24일자) 그렇다. 그러면 6.25의 진실을 밝혀보자. 과연 대통령이 생각하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히로세다카시 지음/위정훈 옮김, 프로메테우스, 2011.3)에 보면, “인간이 인간을 괴롭히는 것이 모든 사회문제의 본질”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6.25 한국전쟁(이하, 6.25)은 1950년대 이념의 냉전시기에 가장 큰 규모의 ‘인간 괴롭힘’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과 소련, 중국과 일본, 영국을 비롯한 세계의 주요 국가들이 직-간접으로 한반도에 개입하면서 한국인을 괴롭혔다. 그리고 한국인끼리 피터지게 싸우는 비명소리를 이들은 즐겼는지 모른다. 6.25전쟁 60주년 수치일(羞恥日)을 맞아 왜 6.25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진실을 깨본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반성을 촉구해본다.

6.25은 이제까지 우리들(40대 이상)이 제도학교의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라면, “이북의 빨갱이들이 적화통일을 위해 남침하였기에 일어난 동족간의 상잔(相殘)”이었다. 그리고 국내의 나약한 학자들도 전문적가랍시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내의 빨갱이와 자유인의 대립, 동아시아의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대결, 미국과 소련이 조장한 냉전이념의 충돌이 복합적인 이해관계를 만들어내면서 일어난 전쟁이었다.”고. 이와 같이 6.25전쟁의 원인으로 국내요인을 더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6.25은 엄밀하게 말해서 한반도의 권력 독점세력들이 외부의 이념 패권주의에 말려든 비극적 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민족해방기, 서로 권력을 독점하려는 단정(單政)세력들이 미국과 중국(소련 초함)의 패권경쟁의 덫에 걸려 일으킨 전쟁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두 못난 독재자(이승만과 김일성)의 야망에 우리 인민들이 심한 고통을 당했고 국제적으로 창피한 전쟁역사를 기록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이 한반도의 전쟁을 주도했는지 그 진실을 민족통일의 필연성 차원에서 살펴보자.

6.25전쟁은 이 전쟁을 일어나게 만든 당사자(한반도의 분단세력과 강대국의 이해관계)들이 계획적으로 숨겨버린 진실된 객관적 자료를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늘 가상의 학설과 일방적인 정치권의 정훈(政訓:세뇌교육)만 있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6.25전쟁의 진실을 사실대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동안 사회인식도 많은 진화를 했다. 이에 따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발견되고 있다.

한반도의 분단과 6.25전쟁의 본질적인 원인은 내부적 요인보다는 외세의 작용(외인外因)이 더 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 외인이 없었다면, 6 25전쟁의 본질을 만들어내는 민족의 분열과 영토의 분단에 따른 분단국가(대한민국과 북조선)의 설립은 없었으리라 본다. 때문에 반공이데올로기는 결코 6.25의 직접적 원인(原因)이 될 수 없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렇다면 6.25전쟁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외부요인)가 본질적 원인이 되었다는 진실이 불지펴나온다. 여기에 한반도의 좌우이데올로기가 부수적으로 상호 상승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좌우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권력을 독점적으로 장악해 보려는 분단정부 수립을 말한다. 만약 한반도 분단세력(자본주의 동맹과 사회주의 동맹, 그리고 이에 부화뇌동한 한반도의 두 권력)이 없었더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곧 남북의 단정수립은 6.25전쟁의 충족조건일 뿐 필수조건이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6.25 전쟁을 전후로 한 당시 한반도의 두 독재권력자들의 태도를 보자. 한반도 남은 미국의 조정을 받는 이승만 주도 하에 친일세력의 청산이나 토지개혁과 같은 탈식민ㆍ구체제 해체조치들을 취하고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민족분단을 심화시키는 반공주의체제 구축, 대미예속적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진행, 자유민주주의의 탈을 쓴 독재체제의 구축에 급급하였다. 여기에 민족통일을 한답시고 ‘북진통일’의 구호를 내걸고 국경 아닌 38도선에서 북을 자극하는 총기사건을 자주 유발하였다.(兒島 襄, 《朝鮮戰爭》, 1976, 일 동경, 文藝春秋 1, 10쪽) 여기에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북의 김일성은 탈식민 조치들을 급속히 진행시키면서 구체제와 단절적ㆍ혁명적 이행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항일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한 사회주의세력들이 소련의 후원 아래 사회주의체제로 이행하였다.

이러한 두 지역의 편협되고 무비판적 분단정권 수립은 한반도의 사회분위기를 정치권력자의 취향에 맞는 특질로 변형시켜놓았다. 즉, 북의 탈식민적 구체제 해체조치는 정치적ㆍ경제적 지위와 재산의 박탈위기에 몰린 식민지조선의 지배계급이었던 관료와 군인, 그리고 경찰ㆍ검찰 출신들을 남하시켰다. 이들은 남의 친미주의자 이승만과 결탁하여 대한민국의 지배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다. 반대로 분단지역 남에 남아있던 사회주의 의식을 가지고 있던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남의 반공주의 사회체제에 밀려 북으로 건너가 그곳의 고위관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남과 북의 지배권력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 분단세력들이 되어 서로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한반도의 전체구성원(여기서는 the people's 개념의 ‘인민’이라고 하자)들은 저들의 권력유지를 위한 들러리 신세로 강제 되었다. 즉 한반도 역사의 주체이며 자신 삶의 장본인인 인민들은 본인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치권력의 입맛대로 그들 삶의 양식이 강제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는 인민 개인의 자유의지와 천부적 권리는 무시되었다. 이 결과, 한반도는 국경 아닌 국경선 38선을 경계로 모스코바-북경-평양으로 이어지는 사회주의 동맹과 위싱턴-동경-서울로 이어지는 자본주의 동맹이 형성되어 대결구도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대결의 최첨병에 이승만과 김일성이 서로 버텨섰다.

이 두 첨병들은 두 동맹의 대리인으로서 충실한 개가 되었다
. 이승만은 유엔에 의한 대한민국 정통론에 근거하여 북진통일을 주장하였고, 김일성은 민주기지론(남한을 민족반역의 친일파 지배체제로 보는)에 근거하여 국토완정론(國土完整論)을 앞세워 남진통일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한반도 내부의 분단체제는 냉전을 이끄는 두 외부세력에 이용된 결과이다. 즉 두 외부세력이 한반도의 분단세력을 이용하여 전쟁분위기를 만들어 갔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외부세력은 소련보다는 중국과 미국이다. 즉 신생 공산주의 국가 중국에 감정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중국세력을 견제할 어떤 대안모색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한반도 분단을 원하는 외부세력들을 보자. 먼저 미국이다. 미국은 중국대륙에서 공산주의세력이 장개석의 친미자유주의정권을 몰아내고 공산당을 최고 권력기구로 하는 사회주의국가가 성립하게 되자,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패권 장악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동아시아정세에서 미국이 꺼내든 카드가 에치슨 라인(Acheson line, 1950.1. 12.)이다. 이 선언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과 류큐열도(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에 이른다.”는 선언이다. 곧 미국의 태평양방위선 밖의 지역(한반도 대만)에서 공격이 이루어진다면 “우선은 공격받은 국민들이 그에 저항해야 하지만, 그 다음에는 유엔헌장 아래에서 전체문명 세계가 개입”할 것을 밝히고 있다. 결국 에치슨의 선언은 치밀하게 계획된 전략이었다. 그것은 한국과 대만을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시킨다는 그의 말이 거짓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전쟁지역이 아님에도 즉각적으로 대만해협에 침입한다. 이것은 곧 미국의 계산된 전략이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공격을 받은 나라가 우선 해결하야 한다.”는 선언을 외면하고 당시 미국의 영향 하에 있던 유엔 안보이사회를 소집한다.(1950.6. 26.) 소련은 당시 중화민국의 안보리 참석을 반대하며 안보리에 결석하였다. 미국의 계산대로 되었다. 북한의 침략을 규정하고 유엔파병을 이끌어냈다. 이미 계획된 음모이다. 미국은 한국에 미군을 즉시 파견한다. 우리는 미국이 동아시아에 대한 패권 장악의 의도가 있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북한의 침공을 허용하면, 공산주의 손에 아시아 전체에 제3차 대전이 일어나게 된다”(兒島 襄, 앞의 책, 76쪽)는 그의 말에서도 입증이 된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를 고대했는지도 모른다. 즉, 한반도전쟁을 빌미로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하려는 음모 말이다.

한편, 중국은 이미 대만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것은 미국의 트루먼이 성명서를 통하여 대만 해협 근처에 있는 “제7함대에 대만에 대한 어떠한 침공도 저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中共中央黨史硏究室, 《中國共産黨歷史》 第2卷 上冊, 中共黨史出版社, 2011, 67쪽)는 주장을 가지고 알 수 있다. 소련 또한, 미국의 장악 하에 있는 ‘대만해방’을 위하여 중국의 해ㆍ공군 창설과 발전을 지원한다.(1949. 12) 그리고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하이난 섬(海南島)을 선제 점령한다.(1950. 5)이 때문에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중국과 미국의 아시아를 둘러싼 패권경쟁은 한반도전쟁이 나면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 물론 북 인민군의 남한침공은 소련 스탈린 권력의 승인 하에 이루어졌음은 말할 나위없다. 미국의 트루먼도 이에 대응하였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미 해ㆍ공군의 한국전선 투입을 결정하고 맥아더에게 지휘권을 부여했다(1950. 6. 27,兒島 襄, 앞의 책, 103쪽) 이어 미 공군은 중국영토에 대한 정찰을 시작한다. 이렇게 미군의 한반도전쟁 투입이 결정되고 미 공군의 중국영토에 대한 정찰을 시작하자, 중국도 중앙인민정부 위원회(제8차)를 소집한다. 모택동은 이 자리에서 “미국이 대만해협을 침공한 것을 비난하였다(1950.6.28.) 이어 중국은 한반도 전세를 관망하다가, 전세가 역전되어 미군 중심의 연합군이 38선을 넘어오자, 북조선을 재빨리 지원한다. 무기의 열세에 있던 중국의 인해전술이다.(1950.10.19.) 이리하여 6.25한반도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된다.

이와 같이 6.25한반도전쟁은 내부적 요인보다도 외세의 이해관계에 의하여 한반도 두 독재권력이 이용된 전쟁이었고 한반도 인민들이 희생된 전쟁이었다
. 그런데도 한국의 역대 독재권력들이 6.25전쟁을 반공이데올로로기에 이용하여 집권연장을 꾀하였다. 이것은 창피하고 한심한 일이다. 다시 말하면, 6.25가 국제사회에서 외세에 이용된 창피한 전쟁이었음에도 정치권력과 그 수하들이 6.25전쟁을 반공이데올로기로 몰아 독재적 권력 장악에 교묘히 이용했다는 거다. 지금도 그렇다. 이 결과 한반도 통일은 요원해졌다. 그리고 한반도 남한사회 수구세력들은 그들의 경제적 이익과 신변안정 도모를 위해 반통일(反統一)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MB가 같은 분단국가인 북한을 모멸하면서 “통일이 도독같이 온다.”고 발언하는 것은 분명 6.25전쟁을 반공이데올로기로 몰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대통령부터 ‘사회인식은 진화한다.’라는 진리부터 배워야 하겠다. 통일은 나쁜 도둑놈 같이 일방적으로 몰래 오는 게 아니다. 통일은 남북이 상호 평화적인 노력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천사의 모습처럼 밝은 모습으로 대낮에 오는 거다. 그걸 알아야 한다.(2011.6.25. 아침.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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