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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토요 시사

친미 '자발적 노예문화'에서 해방이 되자

by anarchopists 2019. 12. 1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7/09 18:02]에 발행한 글입니다.


미국에 종속된 노예문화에서 탈출하자

"주한미군이 1978년 한국의 미군기지에 베트남전쟁에서 쓰다 남은 “고엽제 드럼통 250개(50톤 분량)을 파묻었다”는 한 노병의 양심고백이 있었다. 이후 한미 양국은 해당지역(경북 칠곡군 왜관읍 미군기지 캠프 캐럴의 헬기장 주변)이에 대한 ‘시굴’(試掘)이 아닌 ‘시추’(試錐)를 해보기로 했다. 그 결과 상당한 규모의 미확인 금속성 물질이 묻혀 있
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미확인 금속성 물질이 바로 고엽제 드럼통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한국일보 2011년 7월 8일자) 이 문제는 우리 영토가 미국의 식민지라는 인식 하에서 이루어진 비양심적ㆍ비인륜적 행위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미국에 대한 자발적 식민지근성을 가지고 산다. 그래서 오늘은 미국에 종속된 노예문화에서 탈출해보자는 이야기를 해본다.

1910년 우리가 일제에게 식민지를 당한 원인에 대하여 역사학자들은 민족적 모순과 봉건적 모순을 들고 있다. 민족적 모순은 외세의 침략과 이에 대한 우리 민족의 대응을 말한다. 봉건적 모순은 전근대적 사회구조 속에서 폭악을 휘두른 봉건세력과 이에 맞선 농민민중의 도전을 말한다. 1900년대는 이 두 가지 모순을 극복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민족적 수치인 일제의 식민지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민중들의 민족해방운동과 열강들의 자기이익을 위한 대가(?)로 민족해방을 맞게 되었다.(1945.8.15.)

그러나 또 이번에는 민족해방을 자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우리 민족의 못난 집안싸움으로 외세의 강제에 의한 비극적인 민족의 분단을 맞게 되었다. 이와 함께 한반도 남과 북은 각각 미군과 소련의 주둔이라는 ‘제2의 민족적 모순’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북도 마찬가지지만, 남에서는 식민지 후유증에 편승하여 미국이라는 외세를 등에 업은 친일친미분단세력들이 정치ㆍ경제ㆍ사회적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이의 영향으로 친미사대문화가 이 사회에 팽배하게 됨으로써 자발적 ‘문화적 모순’까지 만들어 내었다.

이제 이러한 ‘제2의 민족적 모순’과 ‘새로운 문화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의 미래는 또 어떠한 민족적 수치를 당할지 모른다. ‘제2의 민족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서 많은 민족민중의 사회단체와 인민(여기서는 ‘국민’이라는 용어가 일제 황국신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the people's의 개념인 인민이라는 용어로 대체한다)들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자발적인 문화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미온적 이다. 하여 ‘자발적인 문화적 모순’ 극복을 위한 대중운동을 제안하고 싶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대미 ‘자발적인 문화적 모순’을 지적해 보면 크게 ‘미국의 헐리우드식 폭력영화’, ‘영어조기교육 풍조’, ‘영어식 간판의 유행’, ‘영어표기, 영어용어의 만연’, ‘미국식 음식문화’, ‘미국식 주거문화’, ‘미국식 의상문화’, 여성들의 ‘미국식 화장문화’ 등이다.

특히 “세계화, 세계주의”라는 엉터리 개념을 뇌까리며 요즈음 유행하는 영어표기와 한국어표기가 뒤섞여서 노래가사가 만들어지는 풍조는 미국에 대한 ‘자발적 식민지노예근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청소년들에게 무분별적으로 오염되어 한국의 자주문화와 모순을 이루고 있다. 그건 고사하고 한국의 무순무순 공사 이름, 아파트 이름, 은행이름, 회사이름이 죄다 영어이니셜을 쓰고 있다. 그럼에도 지식인이나 문화권에서는 거의 뒷짐만 지고 있다. 친미 ‘자발적인 문화적 모순’에 대하여 나라 안 인민(특히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이 방치해 두고 있다는 것은 민족의 자주문화에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남한사회의 영화계에서 대박을 터트린 영화들은 거의 한반도 남과 북의 대결구도를 주제로 한 영화이다. “쉬리”,를 필두로 “실미도”, “태극기를 휘날리며”‘ “공동구역JSA” 등이다. 그런데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폭력(공동구역JSA는 그 성질이 약하지만)을 소재로 하였다는 점이다. 즉 ‘적(敵)과 아(我)’를 상정시켜 놓고 ‘아’가 ‘적’을 과감하게 파괴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적을 파괴하는 과정이 미국의 할리우드식 폭력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헐리우드 영화가 늘 그러하듯이 아의 생존을 위해 적을 살생하는 것을 미화하는 그런 식의 영화가 우리 영화계에도 오염되어 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그 동안 미국의 헐리우드식 폭력영화에 우리 영화관객들이 길들여 있음을 의미한다. 그 폭력의 소재를 우리 것(남과 북, 또는 正과 邪)에서 찾았을 뿐이다. ‘애국적임을 폭력성에서 찾는’ 헐리우드 영화의 패악을 모르고 폭력을 줄기는 것은 이미 우리 정신이 미국의 헐리우드식 폭력에 오염되었다는 증거다. 그리고 우리는 이에 수반하여 은연중 남북분단(북은 빨갱이이고 나쁜 놈, 남은 좋은 사람)을 당연시하는 고정관념을 갖게 되는 무서운 전염병에 걸리게 된다.

우리가 지금 이러한 미국에 대한 ‘자발적인 문화노예’가 된 배경을 생각해 보자. 첫째, 미군정기라는 불행한 시기의 경험과 미국유학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유학하여 학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대학교수직에 진출하거나 교육부에 들어가 미국유학파를 형성하고 미국식 교육제도를 무분별로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국식 교육제도에 의하여 한국의 교육현실이 조성되어 가다 보니 자연히 미국식 문화가 만연되어버렸다. 그 결과의 하나가 고액의 대학등록금제도이다.

둘째, 미국정치의 입김에 민감한 정치인의 ‘자발적 사대주의’다. 미국의 정치변화는 곧바로 한반도의 정치변화에 영향을 준다. 한국 정치인들의 자발적인 사대주의 발상 때문이다. 미국의 분단정책으로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념논쟁에 의한 통일지향세력들이 무수히 죽임과 투옥을 당하여 인생을 망쳤다. 그럼에도 친미사대적 권력자들의 “미국이 자유주의의 수호자이며 민주주의 선진국”인양 거짓선전에 속아 이를 진실로 착각하며 사는 어리석은 한국인을 만들어냈다. 곧 정신문화의 피폐다.

셋째, 그리스도교(특히 개신교)의 만연이다.
유럽이나 미국은 그리스도교가 쇠퇴일로에 있는데도 남한사회는 확장일로에 있다. 개신교회는 성장기 대부분 미국의 원조를 받아 성장하였다. 더구나 목회자들이 미국에서 공부하여 목사직을 수여받고 목회활동을 하는 자들이 많다. 그리고 신학대학 자체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대학들이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개신교가 개화기부터 미국의 선교사들의 영향을 많이 받다보니, 미국의 정치ㆍ경제ㆍ문화적 양향을 많이 받아왔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인들은 민주주의 하면 미국, 자유주의해도 미국, 과학의 나라해도 미국, 잘 사는 나라 해도 미국, 이런 식으로 주입이 되어버렸다.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미국을 반대하면 헛것을 쓴 반공자유주의자들이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빨갱이”라고 야단법석이다. 그런데 미군이 이 나라의 강토를 더럽히고 환경을 오염시켰다. 그런데도 저들 수구세력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곧 속으로 저들은 “미군은 빨갱이를 지키려고 왔다. 그런 그들이 어쩌다 그런 것을 가지고 뭘 그러냐.” 할게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 반공세뇌가 빗어낸 비인간적ㆍ반자연적 비극이다. 이념보다 인간이 먼저이고, 인간보다 자연이 먼저라는 하늘의 진리를 모르는 무지한 인간이라고나 할까. (2004.4 초안 2011.7.9. 수정,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 본문 내용 중 사진은 기사와 무관하며, 인터넷 다음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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