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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환상 너머 공백과 꽉 찬 무

by anarchopists 2019. 10. 30.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4/23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환상 너머 공백과 꽉 찬 무



현상 너머에는 환영만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매우 캄캄한 공간에는 암울한 침묵만이 짙게 깔리고 고통스러운 마음의 심연은 바다의 수심만큼이나 깊었을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 공간과 시간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죽음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저 공백, 무, 허무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나약함, 안일함, 무관심, 방관 등은 충격적인 죽음/죽임으로 몰고 갑니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무능력한 정부의 허둥지둥 대는 꼴이라니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밖에 달리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녀린 목숨들이 하나둘씩 죽어갈 때 무심한 산목숨들은 태연자약이라니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바라보는 필자 역시 슬픔이 몰려오고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리고서는 두 손 모아 기도를 합니다. 대럴 레이(Darrel W. Ray)가 이런 행위를 조롱하듯이 말은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 객관성이라는 논리를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기도는 버튼을 누르는 행위다. 성경 읽기, 교회에 나가기, 기도용 깔개 위에서 기도하기, 찬송가 부르기도 모두 버튼을 눌러서 악마나 질병 같은 문제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내세에 보상을 받기 위한 방법이다.”(Darrel W. Ray, 김승욱 옮김, 침대위의 신, 어마마마출판사, 2013, 38쪽)라고 통렬하게 종교의 기도에 대해서 비판하더라도 기도가 가진 심리학적 효과를 반감시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설령 실제의 사건과 사실로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함의는 삶의 세계에서 발생한 사건을 무(Nichts)나 공허로 보지 않도록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무는 인간에게 참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자신이 무가 아니라 유라고 생각하는 데서 출발하여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세계 자체에 대한 인식하는 인간은, 무를 돌파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허무나 무가 아니며 더군다나 환상이나 환영도 아닙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지젝(S. Zizek)이 “‘진리’는 빈 자리이며 ‘진리의 효과’는 (상징적으로 구조화된 지식의) ‘허구’의 어떤 조각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신을 아주 우연히 발견했을 때 발생한다.”(S. Zizek, 이수련 옮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 2002, 323쪽)고 말했습니다. 진리의 돌파구는 그 허구의 자리, 허무의 자리, 공백의 자리를 뚫고 들어갈 때 생기는 것입니다. 진리가 아니라고 할 때, 진리가 없다고 할 때 오히려 진리는 효력을 발휘하는 법입니다. 종교적 환상이라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허무 너머, 공허 너머를 짚어 주고 그곳에 현전(現前, darstellung)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진리의 현전을 믿는 이들의 마음이 허무와 공포 너머에 신앙을 던져 넣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닐까 싶습니다. “살아서 돌아와 다오!” 이것은 간절한 명령이요 진리입니다. 허무를 뚫고 산 생명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때 진리인 체 가장하지 말고 진리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무엇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종교는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수천 년 동안 상징적인 행위들을 이용해왔다. 이런 행위들은 강력한 심리적 도구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병사들에게 자신이 무적이라는 기분을 심어줄 수도 있고, 엄마에게 자신의 아이가 초자연적인 보호를 받고 있다는 기분을 심어줄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신이 그들의 질병을 치유해주었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도 있다.”(Darrel W. Ray, 앞의 책, 38쪽) 몹시 불편한 설명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분명히 종교는 현상 너머의 불행을 완화시키고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함석헌의 견해로 논박을 해보면, “역사란 결국 자연이라는 무대 위에서 신이라는 감독자의 지도 밑에 배우인 인생이 연출하는 일장극이라 할 수 있다. 고로, 초인간적 신비력을 무시한 역사는 평면화한 기록에 불과하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277쪽)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는 연기나 공연을 하지 말고 현상 너머의 불길한 징조의 빈 자리에 확신의 자리인 물 자체(Ding an sich)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실체가 공허하다고 인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괜한 희망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당분간일 수는 있지만, 그러나 실존의 상황은 급박하고 절대적입니다. 절대적 시간과 자리에서 종교가 강박증이 아니라 초감성적인 것의 현상을 숨기지 말고 내보이는 도래 사건을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무의 자리 뒤 베일에 숨겨져 있는 궁극적 존재는 이미 무와 공허의 자리에 함께 하고 있을 것입니다. 숭고 그 자체인 존재는 그들과, 그 대상과 본질적인 속성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환상이나 환영이 없습니다. 아니 공백이 없습니다. 무가 아닙니다. 남는 것은 완전한 무가 아니라 꽉 찬 무 자체, 초월적이면서 내재적 타자입니다. 그가 그들
과 더불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물도, 객체도, 대상도 아닌 초월적 존재와 더불어 있는 생명적 주체들입니다(S. Zizek, 앞의 책, 323-332쪽). 참 존재, 참 본질은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된 이미지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모든 시민의 상처가 되어버렸지만, 극한의 고통과 스트레스, 그리고 공포와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무와 공백이라 여기는 그 자리를 메우고 그 생명적 주체들이 즐거운 유희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사라져간 이들의 지금과 살아있는 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위 이미지는 2014.4.16/뉴스1과 국제신문 2014. 4. 21.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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