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3/09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는 의례적으로 장소의 신비성, 장소의 특수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합니다. 특정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이미 의미 부여된 장소를 신성시하는 태도는 장소, 혹은 공간의 태곳적 자궁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자궁으로의 회귀를 통해 자기 기원을 끊임없이 확인하려고 하는 욕망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어떤 종교의 태동지를 순례하고 탐방한다는 것도 역시 종교 기원의 자궁을 확인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물론 그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신성하게 여기는 곳을 접함으로써 신령한 기운을 얻으려는 의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영험하다고 하는 곳은 다른 장소나 공간보다는 뭐가 달라도 다른 영기(靈氣)가 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종교는 특별한 토포스(topos)에 대한 열망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성전(temple)이니 제대니 성지니 창시자의 탄생지니 성인의 순교지니 하는 모든 곳에는 장소와 공간을 통한 반복적 자기 재생, 자기의식의 탄생, 자기 정신의 갱신, 원초적이고 원본적인 것과의 일치를 갈망하는 강렬한 모습들입니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그러한 장소나 공간에 대한 타부를 깨고 생명을 내놓고도 토포스의 체험을 강화하려고 합니다. 평생에 걸쳐 그 토포스를 연구하거나 찾으러 다니다 생을 마감하는 것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신비함과 거룩함이라는 어떤 종교성이 있어서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장소나 공간을 체험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종교성입니다. 굳이 애초부터 종교적 장소로 규정되어 있는 곳이 아니더라도 위대한 인물, 카리스마적 인물의 역사적 경험의 발생 장소는 신성시됩니다. 성역화된다고 할까요? 사람들은 그런 곳을 찾고 또 보면서 기억을 재생하고 각오를 다지고 의식을 고취시키면서 자신을 종교적 성의 체험 속으로 내던집니다.
그러나 문제는 장소의 문제 혹은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스럽다고 여기는 장소를 순례하거나 그곳에 가보았다고 함으로써 그 장소를 심적으로 차지했다거나(사물적인 것의 신비화) 가졌다고[所有]하는 생각이 문제입니다. 장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어떤 거룩한 이미타치오(imitatio)나 미메시스(mimesis)가 형성되었다고 착각을 하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장소는 공적 세계이기 때문에 소유할 수 없는 관념 세계이지 특정한 인물에 대한 미메시스가 바라는 장소 소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소 애착과 장소 신비화, 공간에 대한 독특한 종교적 사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 자신을 통한 초월적 존재의 나타남입니다. 공간이 신비하다고 해서 신의 현존화가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의 소비 공간이 되어버린 공간은 세속적 장소와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간을 신비화하게 되면 그 공간의 집착으로 인한 점유 욕망이 생기게 마련이고, 신의 발현과는 상관없는 독점과 소유 논쟁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장소는 바로 그곳 혹은 저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 내가 있는 곳에서 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85-86쪽) 나의 말과 행위가 신의 얼굴을 보여주는 성(聖)의 자리가 되지 않으면 태곳적의 신성한 공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85-86쪽) 성현의 탄생 자리, 기적의 자리, 계시의 자리, 죽음의 자리 등 그곳으로의 회귀와 상상력, 그리고 기억의 재생이 영향을 미치는 자리는 결국 인간 실존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있는 처소 혹은 장소성의 성스러운 가치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신이 유한적 실존인 인간의 마음에 와야 합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85-86쪽) 초월적 존재가 인간의 모습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여준다고 하는 것과 그 초월적 존재가 인간의 마음에 온다는 것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에 와 있다면 내재한 초월자는 자신의 얼굴을 유한자에게서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시적 공간, 구체적 공간에서 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하는 욕망보다 나라는 존재,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서 신의-있음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개별적 인간의 자리가 단지 사적 공간이라고 치부할 일이 아닙니다. 신의 자리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모든 것 속에서 모든 것이 존재하는 자리로서 존재한다. 아니 차라리 모든 개체의 규정과 “장소”(topia)로서 존재한다.”(G. Agamben, 이경진 옮김, 도래하는 공동체, 꾸리에, 2014, 27쪽) 조르조 아감벤(G. Agamben)의 말입니다. 그러니 특정한 공간과 자리의 맹신은 금물입니다.
함석헌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시하는 자는 그 순간에 영혼 안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87쪽)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특정한 공간의 신비 속에 무엇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신의 영광은 봉인된 세계 속에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신의 영광은 마음에서 보게 됩니다. 마음에서 일어나고 마음에서 보게 되고 마음이 변화되는 그곳, 그 자리가 변혁의 장소가 됩니다. 장소 맹신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서 변화와 개혁, 혁명의 자리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는 장소의 종교가 아니라 마음의 종교입니다. 그러려면 절대정신은 일정한 장소에 국한시켜서 제약하고 가두려고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자유로운 정신으로 살아있게 해야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장소 이동, 장소 확인, 장소 신비화, 장소 기념화가 아니라 “길을 닦고 예비하는 것” (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88쪽)입니다. 마음의 길을 닦고 마음의 길을 내어서 초월자가 머무를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일입니다. 내 마음의 자리를 확인하고 점검하고 반성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내 마음이 곧 신이 머물만한 자리인지, 내 마음이 욕망의 덩어리로 가득하지 않는지, 내 마음이 본능으로 채워져 있지 않은지 늘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마음이 성스러운 자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지속적 의식, 주관적 정신의 깨어 있음에서 비롯됩니다. 아무리 공간을 거룩하고 특별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주관적 이성과 종교적 감정을 의식하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몸과 마음으로 신의 존재를 감지하기 위해서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의 욕망과 초월이 화해를 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장소의 선구조화는 “하늘과 땅을 직선으로 연락하는 것, 이것이 예수다” (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90쪽)라는 말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사물화된 장소에 가지 마십시오. 마음으로 가십시오. 마음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벗은 몸으로 신 앞에 서 있으라(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89)고 하는 것이 그 말 아니겠습
니까? 가식적이고 포장된 몸, 사적 이익, 관심,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다 내려놓고 자기의 순수한 마음 밭을 향해서 서 있는 자, 그 마음 밭으로 들어가려는 자가 진정으로 성스러운 공간, 성스러운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장소는 환상일 수 있습니다. 사실의 역사와 시간은 태곳적의 공간을 희미하게 기억하기 때문에 남은 것은 환상과 상상력, 그리고 형식과 덧붙여진 이야기의 허구뿐입니다. 그것에 매여 도리어 진정으로 초월적 존재와 만나게 하는 마음의 자리를 잊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장소가 마음의 고향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당분간입니다. 다만 세계가 주는 위안일 뿐입니다. 고향의 시원은 늘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회귀의 자리는 멀리 있는 장소, 공간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의 자리입니다. 종교인은 항상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장소의 비신화화
성전(temple)이니 제대니 성지니 창시자의 탄생지니 성인의 순교지니 하는 모든 곳에는 장소와 공간을 통한 반복적 자기 재생, 자기의식의 탄생, 자기 정신의 갱신, 원초적이고 원본적인 것과의 일치를 갈망하는 강렬한 모습들입니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그러한 장소나 공간에 대한 타부를 깨고 생명을 내놓고도 토포스의 체험을 강화하려고 합니다. 평생에 걸쳐 그 토포스를 연구하거나 찾으러 다니다 생을 마감하는 것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신비함과 거룩함이라는 어떤 종교성이 있어서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장소나 공간을 체험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종교성입니다. 굳이 애초부터 종교적 장소로 규정되어 있는 곳이 아니더라도 위대한 인물, 카리스마적 인물의 역사적 경험의 발생 장소는 신성시됩니다. 성역화된다고 할까요? 사람들은 그런 곳을 찾고 또 보면서 기억을 재생하고 각오를 다지고 의식을 고취시키면서 자신을 종교적 성의 체험 속으로 내던집니다.
그러나 문제는 장소의 문제 혹은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스럽다고 여기는 장소를 순례하거나 그곳에 가보았다고 함으로써 그 장소를 심적으로 차지했다거나(사물적인 것의 신비화) 가졌다고[所有]하는 생각이 문제입니다. 장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어떤 거룩한 이미타치오(imitatio)나 미메시스(mimesis)가 형성되었다고 착각을 하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장소는 공적 세계이기 때문에 소유할 수 없는 관념 세계이지 특정한 인물에 대한 미메시스가 바라는 장소 소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소 애착과 장소 신비화, 공간에 대한 독특한 종교적 사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 자신을 통한 초월적 존재의 나타남입니다. 공간이 신비하다고 해서 신의 현존화가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의 소비 공간이 되어버린 공간은 세속적 장소와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간을 신비화하게 되면 그 공간의 집착으로 인한 점유 욕망이 생기게 마련이고, 신의 발현과는 상관없는 독점과 소유 논쟁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장소는 바로 그곳 혹은 저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 내가 있는 곳에서 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85-86쪽) 나의 말과 행위가 신의 얼굴을 보여주는 성(聖)의 자리가 되지 않으면 태곳적의 신성한 공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85-86쪽) 성현의 탄생 자리, 기적의 자리, 계시의 자리, 죽음의 자리 등 그곳으로의 회귀와 상상력, 그리고 기억의 재생이 영향을 미치는 자리는 결국 인간 실존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있는 처소 혹은 장소성의 성스러운 가치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신이 유한적 실존인 인간의 마음에 와야 합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85-86쪽) 초월적 존재가 인간의 모습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여준다고 하는 것과 그 초월적 존재가 인간의 마음에 온다는 것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에 와 있다면 내재한 초월자는 자신의 얼굴을 유한자에게서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시적 공간, 구체적 공간에서 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하는 욕망보다 나라는 존재,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서 신의-있음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개별적 인간의 자리가 단지 사적 공간이라고 치부할 일이 아닙니다. 신의 자리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모든 것 속에서 모든 것이 존재하는 자리로서 존재한다. 아니 차라리 모든 개체의 규정과 “장소”(topia)로서 존재한다.”(G. Agamben, 이경진 옮김, 도래하는 공동체, 꾸리에, 2014, 27쪽) 조르조 아감벤(G. Agamben)의 말입니다. 그러니 특정한 공간과 자리의 맹신은 금물입니다.
함석헌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시하는 자는 그 순간에 영혼 안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87쪽)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특정한 공간의 신비 속에 무엇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신의 영광은 봉인된 세계 속에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신의 영광은 마음에서 보게 됩니다. 마음에서 일어나고 마음에서 보게 되고 마음이 변화되는 그곳, 그 자리가 변혁의 장소가 됩니다. 장소 맹신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서 변화와 개혁, 혁명의 자리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는 장소의 종교가 아니라 마음의 종교입니다. 그러려면 절대정신은 일정한 장소에 국한시켜서 제약하고 가두려고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자유로운 정신으로 살아있게 해야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장소 이동, 장소 확인, 장소 신비화, 장소 기념화가 아니라 “길을 닦고 예비하는 것” (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88쪽)입니다. 마음의 길을 닦고 마음의 길을 내어서 초월자가 머무를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일입니다. 내 마음의 자리를 확인하고 점검하고 반성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내 마음이 곧 신이 머물만한 자리인지, 내 마음이 욕망의 덩어리로 가득하지 않는지, 내 마음이 본능으로 채워져 있지 않은지 늘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마음이 성스러운 자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지속적 의식, 주관적 정신의 깨어 있음에서 비롯됩니다. 아무리 공간을 거룩하고 특별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주관적 이성과 종교적 감정을 의식하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몸과 마음으로 신의 존재를 감지하기 위해서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의 욕망과 초월이 화해를 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장소의 선구조화는 “하늘과 땅을 직선으로 연락하는 것, 이것이 예수다” (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90쪽)라는 말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사물화된 장소에 가지 마십시오. 마음으로 가십시오. 마음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벗은 몸으로 신 앞에 서 있으라(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89)고 하는 것이 그 말 아니겠습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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