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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헌재의 '3.21긴급조치 위헌결정'을 접하며

by anarchopists 2019. 11. 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03/22 05:38]에 발행한 글입니다.


헌재의 ‘3.21 긴급조치 위헌결정’을 접하며
-박정희의 독재를 다시 생각해 본다-


헌법재판소에서 박정희시대 전제적 유신헌법에 의해 9차례 발동된 긴급조치 일부(1,2,9호)에 대하여 위헌(違憲) 결정을 내렸다.(2013. 3. 21 오후 2시) 참으로 오랜만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박정희 독재권력이 내지른 긴급조치가 어떤 것인지 당시 시대상황을 말해본다.

4.19시민혁명시대(1960)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번 헌재에서도 선포했듯이 대한민국 헌법의 최고 이념인 국민주권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4.19시민혁명으로 배양되고 실현될 순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제국주의 장교출신인 박정희가 이러한 과도기의 분위기를 기회로 이용하여 5.16군사반란을 일으켰다. 5.16군사반란으로 시작된 쿠데타정권은 올바른 정부, 정통성이 있는 정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만들기 위해 이른바 빨갱이=공산주의=반국가세력이라는 등식을 만들어 자신의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방편으로 이용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 호시탐탐 제제화(帝制化=황제가 이끄는 국가제도를 만들려는)를 꿈꿨다. 그리고 그 음모는 헌정질서의 파괴로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박정희는 이상한 이념을 끌어온다. ‘한국적 근대화’(조국근대화)라는 구호다. 이것을 구실로 박정희는 국헌을 유린한다. 곧, 3선개헌(1969. 9.14. 국회 날치기통과, 1969.10.17. 국민투표)이다. 이것이 첫 번째 제제화 음모다. 그리고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국제사회에 냉전 해빙무드가 조성된다. 미국의 월남파병 철수와 주한미군의 감축이다.(1969년 닉슨 독트린) 그러자 박정희는 남북대화와 냉전체제 와해라는 국제정세를 역이용하여 평화통일론을 앞세운 민족주의 탈을 뒤집어쓴다.(민족중흥론, 1970. 8. 15) 그때 민족주의는 국제사회에서 한물 간 시대사조가 되고 있었다.


한편 박정희는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식 계획경제인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81)을 국정과제로 삼는다. 권력의 하수인들은 이를 ‘성공’이라고 평가하였지만, 이 경제정책은 오히려 우리 사회에 악독한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다. 곧 한국경제가 “수출위주형ㆍ금융특혜형ㆍ정경유착형 유가자본주의사회”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 탓으로, 자본집중, 빈부심화, 저성장율, 실업률 증가 등 비정상적인 사회구조와 비윤리적, 비도덕적, 비인간적 범죄구조가 목걸이의 구술처럼 꽈리를 꾀며 형성되어 갔다. 이를 유가자본주의라고 부른다. 곧 한국사회에 부패하고 타락한 자본주의사회가 형성되었다는 말이다. 말을 바꾸면 박정희의 물질주의 경제정책이 우리 전통사회를 타락시켰다는 말이다. 이명박 및 박근혜 정부가 장관급 사람들을 지명하여,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인간적 비리와 부패가 이것을 입증한다.

결국 박정희의 경제정책으로 한국의 유가자본주의에 대한 민중저항(민중기의)이 일어났다. 곧 전태일의 분신사건(1970.11), 광주대단지 폭동사건, 체불임금 지불을 요구하는 파월(派越)노동자들의 대한항공 빌딩 방화사건 등이다. 이러한 경제정책에 대한 민중들의 부정적 반응은 박정희 제제화 음모에 방해가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박정희는 《국가보위법》(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을 날치기로 통과(1971. 12.27)시켜 사회적 공포분위기를 조성한다. 이어 국가보안법과는 괴리를 보이는 발상을 보인다. 곧 ‘7.4남북공동성명’(1972, 이하 7.4성명)이다. 박정희의 국가지상주의(황제권력화)에 기초한 발상이었다.

‘7.4성명’에는 민족에 대한 진실성(眞情性)이 전혀 없었다. 결과는 박정희 제제화와 김일성부자의 세습화 길을 열어주는 기회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민족분단의 고착화다. 박정희는 7.4성명을 기회로 이용하였다. 느닷없이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모든 대학은 휴교가 강제되었다. 정당의 정치활동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신문· 통신에 대한 사전 검열제가 실시되었다. 비상계엄령은 비상국무회의로 하여금 국무회의와 국회의 입법기능까지 떠맡도록 했다. 이게 바로 10월 유신이다.(1972.10.17. 대통령특별선언) 그리고 그는 일본 메이지유신=일본의 근대화=천황일인체제화를 그대로 모방하여 한국의 조국근대화=유신체제=박정희 황제체제화를 음모하였다. 이것이 10월 유신체제를 낳았다.

박정희는 곧바로 ‘유신헌법’을 발의하여 통과시켰다
.(국민투표 1972. 11.21, 1972.12.27.공포) 명분은 조국근대화를 위한 ‘한국적 민주주의’의 기본법 제정이다. 그런데 ‘한국적 민주주의의 기본법’이라는 유신헌법에는 민주주의제도의 핵심(국가권력에 대한 의회적-시민사회적 통제)이 빠졌다. 그리고 자유주의 이념(국민기본과 노동3권과 정치활동 등)도 없었다. 여기에는 파시즘체제를 이끌 기구만 있었다. 곧 ‘유정회’와 ‘통일주체국민회의’다. 이들 기구의 실체는 박정희를 황제화하기 위한 제도적 틀이다. 유신헌법에 의해 이제 박정희는 8대 대통령에 당선된다.(1972. 12.27 취임) 그러나 그 실은 박정희 황제의 탄생이다. 이어 박정희는 그의 독재적 영도력을 선봉에서 휘날려줄 대중운동을 일으킨다. 곧 ‘새마을운동’의 본격화다. 마치 중국의 국민당 정부시절 장개석이 중국의 군국주의화를 위해 이끌었던 신생활운동(1934~37)처럼. 이어 박정희는 그의 황제화(유신헌법)로 가는 길에 일체 비판이나 어떤 말도 금하는 ‘긴급조치’를 발동한다.(1호, 1974.1.8~ 9호, 1975. 5.13)

이로써 나라사람들은 국가적 감시체제와 억압적 통제체제하에 놓이게 된다. 결국 긴급조치 발동으로 박정희에 대적하는 인재들이 체포되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함석헌은 이를 두고 “국가지상주의가 빗어낸 ‘조직적 악, 제도적 악’으로 보았다.”(《함석헌저작집》13, 한길사, 2009, 302쪽) 이때부터 대한민국 인재들의 죽음의 행진과 감옥행진이 시작된다. 함석헌은 이에 대하여 “사람을 자꾸 죽이면서 나라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라고 비난하였다. 이 말은 실제 인재들을 죽이기도 하였지만(인혁당 사건, 1974) 감옥에 너무 오랜 동안 잡아놓았기에 인재성이 죽었다는 말이다.

글쓴이도 1979년 ‘문혁사건’(지식인들이 문화혁명을 일으켜 박정희 철의 정권을 무너뜨리자)으로 긴급조치 9호에 걸려들어 남한산성(육각)에서 영어의 몸이 되었던 적이 있다. 그 후 함석헌, 장준하 선생님 등과 함께 복권은 되었지만 인생행로가 바뀌었다. 삶의 진로가 너무 엉뚱하게 바뀌어 힘든 세월을 34년간 살아왔다. 이번 헌재의 긴급조치 위헌판결은 이 나라 민주화와 국민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 많은 사람들에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남은 일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헌재의 조치에 입각하여 전직 대통령(아버지)에 의하여 억울하게 매 맞은 이들에게 아픔을 달래주는 보상과 함께 이들(민주화운동관련자)에게 《국가유공자법》과 동격의 ‘민주화유공자법’을 조속히 제정하여 ‘민주화유공자’의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역사를 바로 잡는, 그래서 후손에게 ‘좋은 세상’으로 가는 모범을 보여주는 ‘조상의 아름다운 행동’이 되라는 생각이다.(2013.3.22. 황보윤식)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본문 내용 중 사진은 경향신문(2013.3.21)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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