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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부활한다는 것의 의미

by anarchopists 2019. 11. 20.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4/08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부활한다는 것의 의미



  이맘때면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분주하다. 고난주간이다, 부활주일이다 해서 1년 중 가장 중요한 전례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곧 그리스도교 신자의 신앙 핵심이자 구원과도 직결된 문제이기에 더욱 경건하고 장엄한 전례가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신자가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것은 바로 예수의 죽음으로 인한 구원과 그의 빈 무덤 사건으로 알려주는 내세에 대한 확신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래서 적극적인 신자가 아니더라도 이 시기가 되면 한 번쯤은 교회 예배나 성당 미사에 참석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 참 죽음과 참 부활은 1년 중 한 때의 전례를 통한 상기나 확신은 아니라는 데에 있다. 함석헌의 생각을 빌려서 말해보면 그 이유는 이렇다.

“죽음이 삶 속에 들어 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죽지 않고 시시각각으로 살 수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나무에 달릴 때 비로소 진 것이 아닙니다. 첨부터 시시각각으로 진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졌기 때문에 마지막에 그 십자가가 나타났고 시시각각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마지막에 그 부활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의 살 길은 무엇인가? 한 사람의 죽음입니다. 성냥이 커서 온 산을 불사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모든 사람이 산다는 것은 역시 진리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서풍의 노래5」』, 한길사, 1984, 254-255쪽)


그의 논지는 단순 명료하다. 매일 죽지 않으면 매일 부활이란 없다는 것이다. 예수는 매일 죽었기 때문에 마지막에 가서야 빈 무덤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매일 십자가를 진 사람은 참 십자가를 만나게 된다. 왜 우리
는 이러한 간단한 신앙의 논리를 외면하는 것일까?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의탁해서, 그를 왜 마치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으로 만드는 것일까? 정작 신자 자신은 죽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나라 교회의 문제는 그것이 아니던가. 자신은 죽지 않으면서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것. 나 한 사람이 죽어야 모두가 산다는 신앙 논리는 2천 년 예수에게만 운명처럼 다가왔던 사건이 아니다. 신자라면 응당 예수처럼 죽고 모두를 살리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삶에서 빈 무덤을 만들 수 있으며 세계를 살릴 수가 있다. 세계가 죽고, 사회가 죽는 것은 교회가 죽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다. 교회 죽음의 실존적 사건은 반드시 세계 살림을 가져온다. 예수는 우리에게 그것을 깨우쳐 주었다. 그러므로 부활을 위한 십자가는 단지 상징이 아니라 실제이며 거스를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다.

“개인적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 십자가를 부르는 눈물은 골방에서는 뜨겁지만 길거리에 나오면 냉랭하게 식어버립니다. 길거에서, 뜨거운 것은 길거리에서 흘리는 피입니다. 그리고 이 뜨거운 피가 아니고는 역사적 죄악은 씻어지지 않습니다. 교회당 안에 걸어놓은 십자가, 그것은 죽은 십자가입니다. 참 십자가는 역사의 달려 나가는 수레바퀴에 찍혀 십자 길거리에 꺼꾸러지는 그 십자가입니다. 이 길의 십자가가, 눈으로 바라고 맘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발로 밟는[實踐] 십자가가 정말 산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세워놓은 남긔[나무]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나가는 십자가, 자라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는 골고다에 있지 않습니다. 역사의 제일선에 계십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서풍의 노래5」』, 한길사, 1984, 300쪽)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의 삶을 산다면 교회당의 십자가는 역사적 변혁을 위해서 이미 밖으로 나갔으니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골고다의 십자가는 삶의 시간과 역사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에 십자가는 없는 것이 아닌가. 2천 년 전의 가학적 상징이나 오이디푸스와 같은 대상이 아니라 바로 실제적 사건으로서 삶의 곳곳에 남아 있다는 말이다. 골방의 십자가로만 남아 있지 않도록, 골방에서만 뜨거운 피를 가진 신자들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삶의 곳곳에서 자라나는 십자가를 세워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십자가 사건과 빈 무덤 사건의 재현은 무엇인가? 함석헌의 말대로 “이웃을 나로 사랑”하는 것이다.
“살아도 한 삶이요 죽어도 한 죽음이다. 믿음은 참 살림이어야 한다... 예수의 종교는 두 겨냥을 가진 종교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로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은 내게 좋은 자만이 아니고 저 인생 온통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서풍의 노래5」』, 한길사, 1984, 315쪽) 비천하다고 여기는 이웃을 자신의 전부로 여기고 그들을 위해서 예수는 십자가를 졌으며,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빈 무덤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전체를 붙잡는다면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빈 무덤에 사는 것이리라. 우리는 그렇게 잊어 버렸던 것을 기억하기만 하면 참된 진리(aletheia)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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