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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특별기고

(하승우) 공동체는 환상인가

by anarchopists 2019. 12. 2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5/25 06:37]에 발행한 글입니다.


공동체에 관한 몇 가지 생각

1. 공동체는 환상인가?

1997년 겨울에 발표된 ‘나눔의 집 영성’이란 선언문을 읽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제가 고민하고 연구하는 많은 얘기들이 이미 그 속에 많이 담겨있더군요. ‘우리는 공동체로 살고자 한다’라는 부분에서 눈에 띄는 말들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동체의 해체와 인간의 파편화”
“가난한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는 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기에 앞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과 생활 속에서 그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회심은 이기적인 자기 너머에 있는 해방된 자기, 공동체적인 자기, 참자기를 만나는 문이다”
소모임이 “살아있는 유기체와 생명체로 성장”

공동체라는 것이 결국은 인간의 삶과 행복의 문제이고, 혼자서도 알아서 잘 살아남을 사람들에게 공동체가 절실하지 않다면, 같이 아파하고 기뻐하며 힘을 모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공동체는 참으로 절실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공동체는 가난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힘을 모은다는 것은 어느 한 편이 다른 편을 일방적으로 도와준다는 의미가 아닐 겁니다.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삶의 디딤돌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고, 그런 관계와 상호부조를 깨닫는 건 외부로부터의 학습이 아니라 자기 내부로부터의 자각이어야 힘을 가질 겁니다. 그게 내 속에 있는 관계성과 상호부조를 깨닫는 것일 텐데요, 그런 자각의 과정을 개인이 거치도록 무한정 기다려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과정도 서로 도와줄 소모임이 있으면 좋겠지요. 서로가 유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제가 하려는 말이 사실 선언문에 다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새로운 얘기를 하기는 어려울 듯하고, 그 선언이 지금 우리 현실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를 얘기하겠습니다.

공동체에 관해 얘기하기 전에, 여기 계신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공동체와 가난을 연관지어 얘기하면 굉장히 싫어합니다. 가난하게 살기 싫은 거죠. 다 좋은데 왜 꼭 가난하게 살아야 하나? 부유하게 살면서 행복하면 되지 않느냐. 삼성 래미안이나 재벌들의 아파트 선전에 나오듯이 말이죠.

제가 삼성을 유달리 싫어하게 된 개인적인 이유가 하나 있는데요, 예전에 제가 동대문구 이문동 옥탑방에 살 때입니다. 안기부 건물이 있어 재개발이 안 되던 동네였는데요, 민주화가 되더니 어느 날 갑자기 래미안 아파트가 들어서더군요. 달동네에 번듯한 아파트가 들어선 거지요. 어느 날 그 앞을 지나는데 동네 아이들이 아파트 담벼락에 매달려 있어요. 왜 그런가 봤더니 아파트 안에 놀이터가 있는데 굉장히 잘 만들어놨어요. 그런데 경비하시는 분들이 동네 아이들을 못 들어가게 하니 아이들이 담벼락에서 아파트 아이들 노는 거 구경하는 거죠. 경비하시는 분들이 왜 동네 아이들을 못 들어가게 했을까요? 분명 아파트 주민들이 경비실에 얘기했을 겁니다. 동네 아이들 못 들어오게 해달라고. 그때 제 속에서 뜨거운 게 뭉클 솟아오르더군요. 그때부터 옥탑방 옥상에서 담배 필 때마다 아파트 째려보는 게 일과가 되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의 일만은 아니죠. 한국의 도시들 대부분에서 구도심과 신도심은 분리된 공간입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신도심은 구도심과 분리되고 싶어 하죠. 공간과 분리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생활 자체가 구분되길 원합니다. 그 욕망의 끝이 이미 브라질에서는 구현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요. 총을 든 경비원들이 부자들의 공동체를 보호하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세콤이나 민간보안회사들이 보호하구요.^^

이들은 공동체를 만들어도 자기들끼리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하지요. 제가 보기에 한국에서 공동체운동이 된다고 곳들 중에도 그런 곳들이 있습니다. 자기들끼리 아주 만족스러운 공동체 생활을 누리지요. 하지만 그게 공동체일까요? 그걸 공동체운동이 말하는 공동체와 똑같이 공동체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래도 좌측 공동체보다 우측 공동체가 더 안전해 보입니다. 허나 정말 그럴까요? 우측 공동체에 계신 분들은 무장경비원들이 호위하는 차를 타고 출퇴근하고 그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 속에서만 평생 살 수는 없으니까요. 자기 공동체 안에서는 그나마 안전하겠지만 밖을 나서면 그야말로 이들에겐 무법천지입니다. 총과 카메라가 없으면 어떤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지요.

좌측 공동체도 안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겠죠. 브라질 빈민가에서 마약과 폭력이 판을 친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허나 좌측 공동체에서는 새로운 흐름이 싹트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 폭력과 마약이 아니라 음악과 사랑을 가르쳐서 변화를 꾀하는 자치운동이 싹트기도 하거든요. 한국사회에도 요즘 유행이 되고 있는 주민참여예산제도라는 운동도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쉽진 않겠죠. 허나 좌측 공동체에는 희망이 싹틀 수 있고 새로운 미래가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측 공동체는 어떨까요? 그 곳에서는 어떤 희망과 미래가 싹틀 수 있을까요?

제인 제이콥스라는 도시학자가 쓴 『미국대도시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이콥스는 도시공간이 분리되지 않고 주거지역과 상업지구가 뒤섞이고 직선이 아닌 복잡한 길로 공간이 뒤엉켜야 안전하다는 새로운(?) 학설을 펼칩니다. 자신이 겪은 사건을 직접 설명하기도 하는데요. 어느날 자신이 사는 아파트 앞에서 나이 많은 남자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된 여자애를 강제로 데려가려 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제이콥스가 그 장면을 자신의 2층 창문에서 내려다보며 개입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정육점 주인의 아내와 식료품 가게 주인이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여기에 술집에 있던 2명의 손님, 과일가게 아저씨, 세탁소 주인 그리고 다른 몇몇 사람이 자신들의 집 창문으로 그 광경을 내다보자 유괴 가능성은 좌절되었습니다. 어떤 ‘보안관’도 출동하지 않았으며, 그럴 필요도 없었다는 거죠. 이건 좌측의 공동체와 가깝습니다.

우측의 공동체는 어떨까요? 보안카드와 높은 담장, 곳곳에 설치된 CCTV가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리라 믿습니다. 허나 이런 건 주변 사람들이 함께 사는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물건들이 아니라 관심을 끄게 만드는 물건들입니다. 더구나 이런 물건들은 인간이 아니기에 즉시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조금 끔찍한 상상을 한다면, 만약 대지진이나 쓰나미가 닥친 다면 두 곳의 공동체 중 어느 쪽이 더 질기게 살아남을까요?

어쨌거나 이런 걸 보면 부유함과 공동체가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부유할수록 격리되고 취향의 공동체는 가능하겠지만 삶의 공동체는 불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가? 당연히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제가 최근에 읽은 책 얘기를 잠깐만 하겠습니다. 제가 더글러스 러미스라는 분을 좀 좋아합니다. 러미스와 쓰지 신이치의 대담이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녹색평론, 2010년)으로 번역되어 나왔는데요. 그 책에서 러미스가 가난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가난이 왜 고통스러운가 하면, 가난하기 때문에 싫은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고, 가난하기 때문에 관리나 억압에 저항하지 못하고 착취당하기 때문입니다. 상사가 아무리 보기 싫어도 이를 악물고 일해야 하고, 경멸당하고 무시당해야 하니까 그것이 고통스러운 거죠. 물질이 풍요롭지 않다는 것, 즉 가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관계의 문젭니다. 관리되는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위험이 상처받는 것이 고통스러운 게 아닐까요?” 우리는 가난을 빈곤의 문제로 생각하는데 러미스는 관계의 문제로 봅니다. 가난이 가졌던 관계는 현대 사회에서는 계속 파괴되고 있습니다. 특히 세계화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제는 가난이 아니라 ‘잉여’가 되는 사회이니까요. 잉여사회에서는 가난한 사회가 가졌던 관계망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반자본발전사전』(아카이브, 2010년)이라는 책을 보면 마지드 라흐네마는 유럽에서 빈민이라는 말의 반대말이 부자가 아니라 세도가라고 얘기합니다. 가난은 경제적인 부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힘의 문제였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가난이나 빈곤에 대한 해법도 달라져야 합니다. 좀 길지만 라흐네마의 얘기를 같이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요컨대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 자원이나 서비스의 생산이 아니다. 그런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이나 다음 세대를 살찌운다. 가난한 사람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경제학자들이 자원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달리 자기가 사는 향토에서, 고장에서 자원을 조달하는 실용적 능력을 되찾는 것이다. 실업, 인구, 교육, 보건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부문 혁신도 차별이 심해지는 추세를 줄이는 데 이렇다 할 긍정적 효과를 거의 혹은 전혀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혁신이 목표를 달성한 경우에조차 그 결과는 빈곤층의 특수한 요구와 무관한 것으로 드러났다.

‘좋은’ 학교는 대체로 빈곤가정 출신의 중도 탈락생 숫자를 크게 늘리는데 이바지했다. 보건소, 특히 병원은 자신의 소임을 저버리고 가난한 사람을 그다지 따뜻하게 대접하지 않았다. 고용정책은 지역사회에서 대도시의 빈민가로 쏟아져 들어오는 수백만 명의 대량 탈출을 막아내지 못했다.…바꿔 말하자면 빈곤 퇴치라는 명분 아래 가난한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일하도록 몰아간다. 향토 사회에서 풍요는 자연의 한 상태로 인식된다. 생명을 가진 모든 종이 그리로 다가와서 자신의 특수한 요구를 채운다. 그리고 이런 요구를 생명이 유기체로서 살아가고 사회문화적 존재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로 본다면 이런 요구는 끝이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지난날 유럽에서 공유지를 만들었던 상황과 비슷하게 공기, 물, 땅 같은 풍부한 자원을 공유하기 위한 합의가 이루어져서 누구나 그런 자원에 접근할 수가 있다. 한 공동체가 자연의 풍부한 자원을 구성원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조직하는 수준이 그 공동체의 상대적 번영 수준을 규정한다.…그렇다고 해서 금욕주의나 수도사의 생활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것 없이는 진정한 뜻에서 인간관계가 불가능한, 존재의 총체적이고 자비로운 차원을 모든 사람에게 되돌려주려고 노력할 뿐이다.…아마도 그때는 공생의 빈곤이라는 더 높은 형식의 융성이 ‘더 많은 소유’에 집착하기보다는 ‘더 많은 존재’를 누리는 데서 기쁨을 얻는 다양한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마지막 희망으로 나타날 것이다.”

결국 가난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능력’이 존중되어야 하고, 그러면서 그들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고, 우리가 기쁨을 얻고 누리는 방식이 소유보다 ‘존재’로 향해야 합니다. 그런 걸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 바로 공동체이겠죠.

2. 사회운동과 공동체
공동체와 인간성을 파괴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공동체를 만드는 작업은 사회운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했던 일도 바로 그런 사회운동이었죠. 아주 강력한 운동이었기 때문에 기득권층은 그 운동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 운동을 제도로 변질시켜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속에 자신들의 ‘규율’을 각인시키고 협력보다 경쟁을, 관계보다 소유를, 연대보다 시기심을, 사랑보다 무관심을 퍼뜨립니다.

사회운동은 운동의 변질과 규율에 맞서야 합니다. 제가 미리 보내드렸던 ‘한국의 풀뿌리민주주의운동에 관한 이론적 고찰’이라는 재미없는 논문은 한국사회에서 그런 운동을 추구했던 몇몇 사람과 그들의 생각을 다뤘습니다. 남미의 교육학자인 파울로 프레이리, 미국의 빈민운동가인 솔 알린스키, 원주의 협동운동에 기반을 다졌던 장일순, 말의 힘으로 사람들을 움직였던 함석헌, 이 네 분의 생각을 다뤘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인용했던 부분들을 다시 인용하면요.

“민주주의의 실체는 그 민중이고 그 실체가 좋다면, 즉 민중이 건강하고 관심을 가지며 참여하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회의 구조는 실체를 반영할 것이다. 민중을 적극적으로 만들고 그들이 자신의 잠재력과 의무를 깨닫게 하기 위해 민중조직은 그 자체가 대단한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민중의 프로그램이다.”(솔 알린스키).

“비판적 사고란 세계와 인간의 보이지 않는 연대감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분법을 버리는 사고이며, 현실을 정태적인 실체가 아니라 과정으로서, 변화로서 파악하는 사고, 행동과 분리되지 않고 두려움 없이 과감하게 현실 속에 빠져드는 사고를 가리킨다. 비판적 사고는, ‘역사적 시간을 과거의 지식과 경험이 층층이 쌓인 결과물로’ 여기고, 거기서 정상적이고 ‘행실이 단정한’ 현재가 나온 것으로 여기는 단순한 사고와는 다르다. 단순한 사고에서 중요한 것은 정상적인 ‘오늘’에 적응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비판적 사고는 현실의 지속적인 변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지속적인 인간화를 지향한다.”(파울로 프레이리)

“육신이 사는데 집 옷이 있듯이 제도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울타리다. 집은 닫기운 것이요, 닫겼기 때문에 집이지만 집 안에 오래 있으면 공기가 흐리고 독소가 생겨 사람이 죽게 되듯이 제도는 고정한 것이요, 고정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하지만 제도가 오래면 사회는 반드시 해를 입는다. 그것은 생명은 쉴 새 없이 자라는 것인데 제도는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회를 언제나 건전하게 발전시키려면 제도를 끊임없이 고쳐야 한다.”(함석헌)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해서 진정한 자기 긍정으로 가는 것 아닌가? 예수가 철저한 자기 부정으로 참된 자기를 얻는데 그 참된 자기라는 게 뭐냐 하면 우주의 본체와 같은 것임을 깨닫는 거라. 그러니까 여기서 ‘신비로운 수동성’이란, 위대한 자기 긍정에 이르도록 하는 철저한 자기부정을 말한다고 봐야겠지.”(장일순)

저는 이런 생각을 한국의 사회운동이 얼마나 지키고 있고 더욱더 발전시키고 있는지 걱정입니다. 맑스주의와 국가주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의 사회운동은 사회를 바꾼다고 하지만 대부분 몇몇 사람들의 구상에 바탕을 둔 인위적인 변화를 생각합니다. 그러니 변화가 이루어질리 없지요. 변화가 생기려면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고 서로의 삶이 달라지며 서로의 변화를 위한 디딤돌이 되어야 할텐요. 그런 일은 아주 구체적이고 섬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운동이 일일이 그런 일을 다 할 수도 없고 다 해서도 안 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나키즘에 관심을 두고 있기도 한데요. 사회운동은 사람들의 발심(發心), 나눔의 집 용어로 말하면 회심의 장을 마련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겁니다. 제가 영성이라는 것과 무관하게 살다 몇 년 전부터 영성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런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군요)도 그 때문입니다. 운동이 바꾸지 못하는 건 마음이고 마음을 바꾸는 건 결국은 마음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분이 두 분 계신데요. 미국에서 가톨릭노동자운동을 이끌었던 도로시 데이라는 분과 동화작가인 권정생 선생님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언제나 가난하고 헐벗은 자, 버림받은 자, 혹은 낙오자, 탕자에게 각별한 것으로 나타났으니,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하여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을 떠나시기까지 하셨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전쟁의 참화를 겪은 사회에서는 상부상조를 해야지 어느 한편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편에게 도움을 베푸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현재로서 가장 실행 가능한 방법을 외면하고 포기할 때, 가난이라는 사회문제는 더욱더 악화되고 결국은 곪아터지게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우리가 벌이고 있는 사업이란 응급조치일 뿐이며 또 한편으로는 사회의 전위적 역할에 불과한 것이다. 분명히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길을 따라올 것이며, 지금도 계속 따라오고 있다. 우리의 뒤를 밟아오는 사람들은 이 실천의 학교에서 배워 성인교육운동이나 신용조합운동, 또는 협동조합운동을 널리 전개하고 새로운 학교를 세우며 교사로서, 작가로서 혹은 새로운 분야의 개척자로서 활동할 것이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대로 혹은 그들이 자기들의 소명을 발견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일에 헌신하게 될 것이다.”(도로시 데이)

이런 환대의 삶은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요. 권정생 선생님이 말하듯이

“가족 중에 누군가 먼 길을 떠나면 그날부터 끼니마다 밥을 한그릇씩 떠놓”고

“우연히 집에 찾아오는 나그네가 있으면 기꺼이 대접”하는 마음, “좀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아예 사랑채를 비워놓고 나그네를 받아들”이고

“들판에서 점심을 먹다가도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으면 큰 소리로 불러 함께 점심을 먹는” 마음은 우리 식으로 표현된 환대의 삶이었죠. 심지어 이런 마음은 자연의 생명체와도 우정과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산에 사는 노루나 토끼가 마을에 내려오면 절대 잡지 않는다. 그들이 마을에 내려온 이상, 우리 마을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집안에 살고 있는 능구렁이도 우리 집을 지켜주는 집지키미가 된다”는 마음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환대의 전통을 설명해줍니다.

왜 사람들은 환대할까요? 환대가 함께 누리고 함께 즐기는 삶의 기쁨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은 내 것을 무한히 확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나 생명의 것을 짓밟고 빼앗아도 좋다는 길들여진 가르침에서도 벗어나도록 돕습니다. 국가는 ‘국가 경쟁력’과 ‘국익’을 따르라고 가르치지만, 환대는 스스로 충족하고(自給) 서로 보살피는(相互扶助) 삶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좀 생뚱맞지만 시 한 수 읽어볼까요? 백무산 시인의 ‘기대와 기댈 곳’이라는 시입니다.

방글라데시에서 왔다고 했다
검은 얼굴의 두 사내가 쇼핑을 나왔다

할인매장 계산대에서
기름때가 다 가시지 않은 손으로

라면과 야채를 넣었다 뺐다 들었다 놓았다
돈에 맞추느라 줄였다 늘렸다 했다

계산서를 구기던 여직원이 무전기 든 덩치를 불렀고
덩치는 주먹을 흔들고 욕을 퍼붓고 침 튀겼다

깜둥이 새끼들 돈 없으면 처먹지 말지
여기까지 와서 지랄은 지랄이야!

옆 계산대를 빠져나오던 자그마한 한 비구니가 그 소리를 들었다
두 배는 됨직한 그 덩치를 무릎 꿇렸다

저 자리에서 절절매며 살던 덩치가
우리도 인간이라고 외치던 때가 엊그제였다

힘 있는 덩치와 문명의 나라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은 맑스였고

희망 없는 ‘인류의 쓰레기’들과 땅을 잃은
뜨내기들이 우글거리는 나라에
새로운 역사의 기대를 걸었던 사람은 바꾸닌이었다

한줌 가진 것에 기대 비굴하게 오염되어
열정을 잃어버린 덩치들을 그는 경멸했다
그로 인해 그는 패배자가 되어 역사에
이름을 더럽혔지만 진실은 그의 것이었다

꿈꾸지 않는 자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다
마음에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비구니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순결한 것은 스스로 기댈 곳이 없다

원래 시를 감상하고 나서는 바로 얘기를 하지 않는 법입니다.^^ 나중에 한번 여기 계신 분들끼리 이 시를 읽고 난 느낌을 공유하면 좋겠습니다.

3. 우리 시대의 공동체란?
제가 이렇게 얘기해도 여전히 변화나 공동체를 불안하게 느끼거나 보는 분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하는 말이 있는데요, 그렇게 살지 않으면 어떡할 꺼냐. 그럼 우리도 연금 넣고 보험 넣고 재테크하며 미래를 대비할 꺼냐. 아무리 미래를 대비한들 지금 닥쳐올 식량위기, 에너지위기, 기후변화 등에 우리가 일일이 대처할 수 있을 꺼냐. 그냥 지금 현재를 다른 이들과 즐기며 사는 게 좋지 않겠냐. 먼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행복을 위해, 내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 살자, 뭐 이렇게 얘기하기도 합니다.

캐나다에 나오미 클라인이라는 언론인이 있습니다.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여러 권 쓴 사람인데요. 이 사람이 쓴 『쇼크 독트린』을 보면 끔찍한 재난에도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기득권층의 모습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낙관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인데요.^^

그 책 전체가 거의 다 우울한데 결론에 희망의 소식을 전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남미에서 민중들이 일어나 농업의 파괴를 막고 주요한 자원의 공동소유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 쓰나미로 밀려난 태국의 어민들이 마을을 되찾은 소식 등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미국 뉴올리언스주의 주민들이 태국을 방문한 얘기입니다.

“카트리나가 닥친 지 일 년이 지나자 태국의 민중재건운동 리더들과 뉴올리언스의 허리케인 생존자 대표단이 교류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온 방문객들은 재건축된 태국 마을들을 둘러보고는 복구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속도에 경악했다.
“뉴올리언스에서는 정부가 일해주기만을 기다리는데, 여기서는 당신들이 직접 하는군요.”

엔데샤 주아칼리가 말했다. 그는 뉴올리언스 ‘생존자 빌리지’의 설립자이다.

“미국으로 돌아가면 당신들의 모델을 새로운 목표로 삼을 겁니다.”

뉴올리언스 지역사회의 리더들이 고국으로 돌아간 이후, 수해 도시에는 직접 행동하려는 물결이 넘쳤다. 주아칼리는 현지의 계약업자들과 자원봉사팀을 조직해 피해 가옥을 방문해 홍수로 망가진 내부를 치웠다. 그러고는 역시 다음 집으로 이동해 도움을 주었다.

“쓰나미 지역의 답사여행을 통해, FEMA와 주정부를 배제하고 직접 복구에 나서야 한다는 좋은 관점을 배웠습니다. 정부만 믿고 있는 게 아니라, 정부가 있더라도 우리 스스로가 복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묻기 시작했지요.”

아시아 답사에 참여했던 비올라 워싱턴도 뉴올리언스 지역인 젠틸리에 완전히 바뀐 새로운 태도로 돌아왔다. 그녀는 젠틸리의 지도를 구역별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 구역마다 대표위원회를 조직해 재건에 필요한 사항들을 논의할 대표자들을 임명했다.

“정부에게서 돈을 얻어내기 위해 투쟁할 때, 우리 마음속에는 원래 것을 되찾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 뉴올리언스에서는 더욱 직접적인 행동도 나타났다. 2007년 2월 부시 행정부가 파괴하려 했던 공영주택 프로젝트 지역의 거주민들이 예전에 살던 집을 재침입해 점거했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은 가옥 청소를 돕고, 발전기와 태양열 패널을 위한 기금을 모았다.…스스로 재해를 복구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공통된 주제를 얘기한다. 참가자들은 단지 건물만 보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치유했다고 말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큰 충격을 겪으면 무기력함을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연의 엄청난 힘 앞에서 부모들은 아이들을 구할 능력을 상실했다. 혹은 배우자와 이별을 했고, 보호의 공간이었던 집은 죽음의 덫이 되었다. 무력감에서 벗어나는 최선책은 지역 복구에 참여할 권리를 얻는 것이다.

뉴올리언스 주 로우어 나인스 워드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초등학교의 교감은 이렇게 말했다. “학교를 다시 열었습니다. 그러자 단지 지역으로만 연결된 것이 아니라, 영혼, 혈육,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으로 똘똘 뭉친 특별한 공동체라는 느낌이 들었죠.”(2011.5.22., 하승우)

하승우 선생님은
경희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현재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시민자치정책센터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북매거진 『텍스트』의 정기기고자, 무크지 『모색』 편집위원 등으로도 활동했다. 최근 아나키즘, 자치운동, 공간정치 등을 연구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희망의 사회윤리 똘레랑스>(2003) <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한다> (2002/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아나키스트의 초상>(2004)이 있다.

의 이력은 인터넷에서 따온 것임 /함석헌평화포럼

위 글은 인터넷 네이버 불로그 자유바람님에게서 다운 받은 것입니다.
하승우 선생님의 양해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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