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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평화적인 아나키즘의 상상력

by anarchopists 2019. 11. 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07/29 23:46]에 발행한 글입니다.


평화적인 아나키즘의 상상력


혹자는 아나키즘(anarchism), 혹은 무정부주의를 폭동이나 테러를 일삼으며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온갖 체제와 조직, 심지어 정부와 국가도 거부한다고 비판하지만 실상은 그 본질을 다 담아냈다고 볼 수 없다.
고드윈(W. Godwin), 골드만(Emma Goldman), 슈티르너(M. Stirner), 크로포트킨(Pyotr A. Kropotkin), 푸르동(Pierre-Joseph Proudhon), 바쿠닌(Mikhail A. Bakunin), 톨스토이(Lev Tolstoy),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스푸(본명 류사오빈, 후에 스푸-師復-로 개명함), 신채호(申菜浩), 유자명(柳子明), 정화암(鄭華岩), 이정규(李丁奎), 박열(朴烈) 등이 꿈꾸었던 세계가 어떤 모습인가를 생각해보면 아나키즘을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인식할 것이 못된다. 글쓴이는 이런 역사적 인물들과 같은 맥락에 있는 한 아나키스트를 더 거명한다면, 이견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함석헌을 들고 싶다. 그의 여러 글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는 국가주의에 대해서 반대하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세계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이 민족의 장래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나는 국가주의 아주 반대하는 사람인데, 세계 국가라는 것 때문에 이렇게 잘못되고 있어요. 이 국가주의, 이걸 청산하지 못하는 한은 인류의 구원 아마 없을 거예요. 지금까지는 나라 없이는 살 수 없었지만, 지금은 나라 때문에 사람 살 수가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런 점을 믿음으로 어떻게 극복을 하느냐...”(함석헌, 함석헌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33쪽)


함석헌은 국가 혹은 국가주의 해체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或] 울타리가 커진[口] 형태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공동체는 개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을 나타내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배타적 국가공동체는 극단의 민족주의가 낳은 폭력과 전쟁으로 개인의 자유와 생존권을 철저하게 유린하고 짓밟았다. 한편 “한국에서 국가란 이성을 발휘해 심사숙고해서 만든 정치질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연적·운명적 정치 공동체로 이해되었다”(최장집, 민중에서 시민으로, 돌베개, 2009, 102쪽).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성’이라는 말인데, 인간 이성의 반성과 성찰에 의해서 이루어진 근대 계몽주의의 산물로서의 서구 국가의 모습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철학자들의 사유에 의해서 그 기반을 다져왔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특수한 역사적 현실 때문에 선험적 정치 공동체
를 배태하고 그 속에서 개인은 국가의 정체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국가의 과제를 개인의 과제로,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개인의 자유, 개인의 도덕, 개인의 이성, 개인의 주체성, 개인의 정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와 개인은 같은 운명 공동체였기 때문에 존재론적 개인과 자유는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서양 아나키즘의 최고 목표는 개인이 절대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의 아나키스트들은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양심의 소리에 따라 자유를 추구했으며, 이에 방해가 되는 모든 권위와 권력에 맞서 싸웠다. 그들의 눈에 인류의 자유를 억압하는 대표적인 것은 바로 국가와 정부였다.”(조세현,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 책세상, 2001, 153쪽)


새롭게 일어나는 국가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는 계속해서 개인의 자유와 도덕성을 희생하기를 원하고 그럴 때마다 개인의 권리와 사유는 국가 공동체에 양보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국가주의로 인해서 개인의 존재론적 자유가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개인은 국가라는 존재 때문에 일어나는 다양한 폭력에 대항해야 하고 민족과 조국을 초월한 세계적인 보편주의적 인류애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조세현,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 책세상, 2001, 28쪽). 한 국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이미 전혀 다른 국가의 세계에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고, 그로 인해 개인을 구속하고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이념적, 정치적 토대를 민주주의(Democracy)라고 한다. 그런데 민주주의란 민중(Demos) 스스로의 정치, 민중의 권력을 의미하는 정치 체제인데, 과연 그러한가 라는 회의마저 들게 만든다. 국가라는 권력, 국가라는 시선, 국가라는 통치, 소수 엘리트에 의한 통치, 정부 조직에 의한 억압과 속박이라는 현실 정치에서 데모스는 없다. 이 때문에 시민사회(Societate Civili; Civil Society)라는 공동체 개념이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시민 혹은 민중에 의한 자율적 결사체인 시민사회는 국가에 대해서 적대적, 비판적 정치적 상상력을 가진 공동체이다.
이는 임마누엘 칸트(I. Kant)가 말한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제약되거나 방해받지 않는 개인”, 곧 자율적 개인들의 공동체 혹은 자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장집, 민중에서 시민으로, 돌베개, 2009, 76, 100쪽). 이 공동체가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또 하나의 유토피아적 정치 공동체나 대안적 삶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정치적 존재의 생활세계에서 치열한 고민과 삶으로 나타날 때 증명될 것이라 본다.


“아나키즘은 국가, 즉 사회 전체에 법적·물리적 힘을 휘두르는 특정 기구의 존재 자체가 억압적이고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억압을 없애고 자유를 쟁취하려면 국가의 지배를 중앙집중적 권위가 없는 자치 공동체의 지배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J. Molyneux, 이승민 옮김, 아나키즘: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책갈피, 2013, 23쪽).


한쪽만 잘 사는 사회, 한쪽만 편드는 국가, 한쪽만 잘 낫다고 하는 정치, 한쪽만 복 받는다고 하는 종교. 이렇게 두남두기보다 모두가 평등하며 서로 돕고 조화를 꾀하는 사회가 바람직하지 않는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자신의 밥그릇을 생각하여 씨알(민중)은 아랑곳하지 않는 정치․국가․종교는 인간도, 자연도 살리지 못하는 바보가 아니던가. 이것이 왜곡된 현상이 한낱 주의(ism)가 되어 버린다. 그것의 시발점이 잘못된 경쟁, 우승열패,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른 자본주의 윤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약자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상부상조, 상호부조할 수 있는 평화적 아나키즘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철저한 개인의 금욕주의 윤리에 입각한 삶을 기반으로 평화적 소공동체, 생명적 대안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구체화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다시 박정희식 국가 발전 모델, 권위주의적 정부를 민중의 정치적 상상력으로 만들 거라면 국가에 의한 민중 억압, 민중 소외, 민중 자율 침해, 민중의 정치적 배제는 불을 보듯 뻔하다. 따라서 사회시민권의 요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도덕적 자율성과 평등 의식에 기초한” 민주 정치 체제가 보장되어야 한다(최장집, 민중에서 시민으로, 돌베개, 2009, 124, 154쪽). 인간의 사실성이 국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존재는 자유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자유와 존재론적 자유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인간의 존재론적 자유를 택해야 한다. 글쓴이는 요즈음 부드럽고 평화적인 아나키즘을 통한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러나 이미 그럴 자유조차도 없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말한다. “나는 자유롭게 살 운명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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