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08/17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전쟁은 악이다.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의 말대로 전쟁이 또 하나의 정치 형태라는 논리를 들이 댄다하더라도 평화를 유린하고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 전쟁으로 남의 나라를 점령하고 인권을 빼앗으며 지배국가연하는 것은 전쟁을 도발하는 국가나 침략을 당하는 나라 모두에게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므로 그것을 선이라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전쟁은 메모리얼(memorial), 즉 기념이나 기억이 될 수 없다. 비록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기에 오늘에 되새기고 반드시 그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않도록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기 위한 메모리얼일지라도, 그것은 인간이 극복하지 못하는 반복적인 트라우마나 폭력 콤플렉스를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더군다나 전쟁이 일어난 것도, 폭력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지속적으로 되새김질하여 그 아픈 상흔을 건드리면서 전쟁 경험자와 비경험자 사이의 간극을 심화시키는 일은 건강한 정치적 태도가 아니다.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전쟁 후 스트레스장애를 겪고 있는 이들에게 가하는 폭력이고, 그것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와 같은 일에 지극히 안일한 태도를 갖고 있다는 냉엄한 채찍질이나 혹독한 꾸지람과도 같은 것이기에 동일한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데올로기의 양극화다. 한 이념적 체계가 가장 완벽하거나 올바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념으로 인한 뼈아픈 상처와 고통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그 이념 자체는 악이 된다. 정치는 그 틈바구니를 교묘하게 파고들어서 그 이념을 추종하는 무리를 악으로, 그렇지 않은 무리를 선으로 규정하는 역설을 조장한다.
정전 협정을 체결한 지 수십 년이 지났건만 전쟁에 대한 메모리얼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념적 대립이 발생하는 순간 반공단체는 세력을 모아 목청을 돋우어 구호를 외쳐대고, 이념의 진의와 상관없이 악으로 매도되고 있는 상황이다. 메모리얼에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도 강요되는 선전을 학습하고, 전쟁을 미화하고 참전자를 전쟁영웅으로 추켜세우는 국가적 행사는 도를 넘어선다.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애국심이나 국방에 흠집을 내는 비국민(?)으로 낙인이 찍힌다. 로빈 마이어스(Robin R. Meyers) 목사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꼬집는다.
“전쟁을 미화하고 군인들을 신성한 존재로 만드는 일에 열중하는 미디어 산업은 어디에서나 인기가 있다... 예수님의 처음 따르미들과는 달리, 오늘날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곧바로 우리의 “제복을 입은 용감한 젊은이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들은 참된 양심적인 반대자들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군인들에게) 감사할 줄 모르며 비애국적인 존재들로 간주된다.”(Robin R. Meyers, 김준우 옮김, 언더그라운드 교회, 한국기독교연구소, 2013, 174쪽)
따라서 이제는 비폭력적인 평화가 바로 선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때이다. 그냥 평화가 아니라, 비폭력적 평화다. 로빈 마이어스가 말하고 있듯이, 그것이 종교적 정신, 즉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이 때문만은 아니다.
“비폭력은 기독교인들을 위한 선택사항이 아니다. 비폭력은 본질에 속한다. 우리의 평화주의적인 뿌리로 되돌아가지 않고서는 기독교가 서양에서 활력이 있으며 변혁적인 힘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언더그라운드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것은 교회가 시작될 당시의 원칙이며, 근본이 되는 특성이며, 또한 신성한 전통을 가장 중요하게 회복시키는 것이다. 비폭력적 평화주의의 특성이 근본적으로 체제변혁적인 것처럼, 그 특성은 미래의 교회를 위해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본질이다.”(Robin R. Meyers, 김준우 옮김, 언더그라운드 교회, 한국기독교연구소, 2013, 181쪽)
비폭력이 예수의 정신이었고,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적 근간이었다는 사실만으로는 비폭력적 평화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폭력에 대해서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며, 전쟁에 대해서 응징으로 맞서지 않고, 테러에 대해서 보복으로 맞서지 않는 소극적(동태적) 평화에서 아예 상대를 끌어안는 적극적인 평화가 필요하다. 지금의 평화정책은 사실 평화정치의 구현이 아니라 내가 의도하는 노선과 정치, 전략을 용인하거나 수용하지 않으면 반평화적 축으로 단정 짓는 것이다. 그런 정치에는 포용과 관용, 사랑과 호의는 평화 덕목조차도 아니다.
함석헌은 상대의 양심을 일깨워서 무기를 내려놓고 사람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비폭력의 비결이라고 말한다(함석헌, 함석헌 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125쪽). 모두가 평화로운 세계가 되려면 무기를 내려놓고, 인권을 짓밟는 행위를 멈추고, 분노를 잠재우는 데에 있다. 나아가 보다 더 근원적으로 그런 감정과 행위가 발생할 수 있는 타자의 내면으로 들어가 ‘아니오’(안 돼)라고 깨닫게 하는 양심의 각성이 비폭력적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가 평화주의자라면 자기희생은 본래부터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우리가 싸우는 것은 저쪽을, 사회의 약한 것들은 세상에서 없애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저들이 나의 이웃이기 때문에, 우리와 한 몸을 이루는 한 지체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약하고 어리석은 자라도 버려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는 싸움입니다. 사랑의 싸움이기 때문에 첫 번에 잘못하면 그 잘못한 것을 말해줘야 하지요. 안 들으면 들을 때까지 해야지요. 죽일 수는 없습니다. 만일 죽인다면, 아무리 내가 옳더라도, 그가 죽기 전에 죽이는 내가 먼저 죽어버립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88-89쪽)
평화는 ‘자기희생’이 뒤따른다. 폭력, 전쟁, 테러, 비난 앞에 저항하는 개별적 존재의 자발적 희생 없이 평화가 구현되지 않는다. 그 희생이란 궁극에는 죽음일 수도 있다. 자기의 죽음으로 평화를 구현한 예수의 희생처럼, 우리도 폭력, 전쟁, 테러에 대한 잘못을 말하고 또 말하면서 사랑의 싸움을 하는 것이다. 그 언어와 행위로 인해 타자의 양심을 깨운다면 “전체를 건지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함석헌, 위의 책, 89쪽)이라는 함석헌의 말처럼, 나도 타자도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궁극의 평화는 어느 개인만의, 어느 한 나라만의 평화가 아니라 전체의 평화, 전체의 자유, 전체의 사랑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평화 때문에 전쟁을 하는 것이라는 명분은 용납될 수가 없다. 최소한 침략에 의한 방어 목적의 전쟁은 있을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전쟁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평화가 될 수가 없다. 반면에 평화는 살림이다. 평화는 생명이다. 그런데 평화를 강조해야 할 시기에 전쟁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는 역설은 납득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서 전쟁을 미화해서 정치적 전략으로 사용하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전
쟁으로 인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아니 그들의 이성과 육체는 남용, 오용, 사용되었다. 뜻없이 백성들만 고통과 죽음을 겪었다. 이제는 평화를 위해서 저마다 희생을 해야 한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전쟁은 나의 전쟁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내가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 피할 수도, 도망을 칠 수도,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곧 나의 선택적 행위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선택할 수가 있다. 나는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을 선택할 수가 있다. 내가 존재하는 한 나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폭력적 전쟁이냐 비폭력적 평화냐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언어이자 자유요, 결단이자 이성이다. 비폭력적 평화, 그것은 결코 추상적 현실이 아니다. 그로인해 앞으로 국가의 평화, 녹색의 평화, 종교의 평화가 가능해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갖지 않는다면 인간의 자유와 미래,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삶의 행복은 꿈꿀 수 없거니와 영원히 동물적 본능의 투쟁과 다툼, 그리고 싸움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전쟁 미화 비판과 비폭력적인 평화
정전 협정을 체결한 지 수십 년이 지났건만 전쟁에 대한 메모리얼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념적 대립이 발생하는 순간 반공단체는 세력을 모아 목청을 돋우어 구호를 외쳐대고, 이념의 진의와 상관없이 악으로 매도되고 있는 상황이다. 메모리얼에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도 강요되는 선전을 학습하고, 전쟁을 미화하고 참전자를 전쟁영웅으로 추켜세우는 국가적 행사는 도를 넘어선다.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애국심이나 국방에 흠집을 내는 비국민(?)으로 낙인이 찍힌다. 로빈 마이어스(Robin R. Meyers) 목사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꼬집는다.
“전쟁을 미화하고 군인들을 신성한 존재로 만드는 일에 열중하는 미디어 산업은 어디에서나 인기가 있다... 예수님의 처음 따르미들과는 달리, 오늘날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곧바로 우리의 “제복을 입은 용감한 젊은이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들은 참된 양심적인 반대자들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군인들에게) 감사할 줄 모르며 비애국적인 존재들로 간주된다.”(Robin R. Meyers, 김준우 옮김, 언더그라운드 교회, 한국기독교연구소, 2013, 174쪽)
따라서 이제는 비폭력적인 평화가 바로 선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때이다. 그냥 평화가 아니라, 비폭력적 평화다. 로빈 마이어스가 말하고 있듯이, 그것이 종교적 정신, 즉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이 때문만은 아니다.
“비폭력은 기독교인들을 위한 선택사항이 아니다. 비폭력은 본질에 속한다. 우리의 평화주의적인 뿌리로 되돌아가지 않고서는 기독교가 서양에서 활력이 있으며 변혁적인 힘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언더그라운드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것은 교회가 시작될 당시의 원칙이며, 근본이 되는 특성이며, 또한 신성한 전통을 가장 중요하게 회복시키는 것이다. 비폭력적 평화주의의 특성이 근본적으로 체제변혁적인 것처럼, 그 특성은 미래의 교회를 위해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본질이다.”(Robin R. Meyers, 김준우 옮김, 언더그라운드 교회, 한국기독교연구소, 2013, 181쪽)
비폭력이 예수의 정신이었고,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적 근간이었다는 사실만으로는 비폭력적 평화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폭력에 대해서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며, 전쟁에 대해서 응징으로 맞서지 않고, 테러에 대해서 보복으로 맞서지 않는 소극적(동태적) 평화에서 아예 상대를 끌어안는 적극적인 평화가 필요하다. 지금의 평화정책은 사실 평화정치의 구현이 아니라 내가 의도하는 노선과 정치, 전략을 용인하거나 수용하지 않으면 반평화적 축으로 단정 짓는 것이다. 그런 정치에는 포용과 관용, 사랑과 호의는 평화 덕목조차도 아니다.
함석헌은 상대의 양심을 일깨워서 무기를 내려놓고 사람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비폭력의 비결이라고 말한다(함석헌, 함석헌 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125쪽). 모두가 평화로운 세계가 되려면 무기를 내려놓고, 인권을 짓밟는 행위를 멈추고, 분노를 잠재우는 데에 있다. 나아가 보다 더 근원적으로 그런 감정과 행위가 발생할 수 있는 타자의 내면으로 들어가 ‘아니오’(안 돼)라고 깨닫게 하는 양심의 각성이 비폭력적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가 평화주의자라면 자기희생은 본래부터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우리가 싸우는 것은 저쪽을, 사회의 약한 것들은 세상에서 없애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저들이 나의 이웃이기 때문에, 우리와 한 몸을 이루는 한 지체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약하고 어리석은 자라도 버려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는 싸움입니다. 사랑의 싸움이기 때문에 첫 번에 잘못하면 그 잘못한 것을 말해줘야 하지요. 안 들으면 들을 때까지 해야지요. 죽일 수는 없습니다. 만일 죽인다면, 아무리 내가 옳더라도, 그가 죽기 전에 죽이는 내가 먼저 죽어버립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88-89쪽)
평화는 ‘자기희생’이 뒤따른다. 폭력, 전쟁, 테러, 비난 앞에 저항하는 개별적 존재의 자발적 희생 없이 평화가 구현되지 않는다. 그 희생이란 궁극에는 죽음일 수도 있다. 자기의 죽음으로 평화를 구현한 예수의 희생처럼, 우리도 폭력, 전쟁, 테러에 대한 잘못을 말하고 또 말하면서 사랑의 싸움을 하는 것이다. 그 언어와 행위로 인해 타자의 양심을 깨운다면 “전체를 건지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함석헌, 위의 책, 89쪽)이라는 함석헌의 말처럼, 나도 타자도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궁극의 평화는 어느 개인만의, 어느 한 나라만의 평화가 아니라 전체의 평화, 전체의 자유, 전체의 사랑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평화 때문에 전쟁을 하는 것이라는 명분은 용납될 수가 없다. 최소한 침략에 의한 방어 목적의 전쟁은 있을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전쟁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평화가 될 수가 없다. 반면에 평화는 살림이다. 평화는 생명이다. 그런데 평화를 강조해야 할 시기에 전쟁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는 역설은 납득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서 전쟁을 미화해서 정치적 전략으로 사용하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전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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