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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흔적뿐인 목자, 곤혹스러운 정치

by anarchopists 2019. 11. 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10/11 00:20]에 발행한 글입니다.


흔적뿐인 목자, 곤혹스러운 정치



약속은 있지 않은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든다. 반면에 있는 것을 있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은 거짓이고 속임수이다. 지금까지 약속은 흔적이 있을 뿐 신의 전능한 발언도, 신의 친필도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백성은 목자(牧者)의 말과 문자가 진리인 줄 안다. 아니 그것만 볼 수 있다. 백성은 자신의 이익과 편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목자는 자신이 정작 해야 하는 말과 문자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백성에만 국한시킬 것도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치적 언어와 문자 이면의 의미와 영향,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깊이 숙고하는 것을 습관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목자는 물신숭배의 해독불가능한 기호를 문자화, 언어화한다. 문제는 물신숭배와 권력의 관계성에서 또한 민주주의와도 관계가 없는 오직 물신의 거짓 기호를 독해하지 못한 백성의 무지에 있을 뿐이다. 목자에게서 발언된 말과 기호는 거짓인데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것이다. 다음은 함석헌의 말이다.


“우리가 먼저 할 것은 힘의 숭배, 돈의 숭배를 그만두는 일이다. 오늘 세계를 이렇게 만든 것은 군국주의, 제국주의, 산업주의의 국가관이다... 큰 배가 지나간 뒤에 작은 배가 그 물결을 겪듯이 앞서 해먹고 간 힘 숭배 돈 숭배자들이 일으키고 간 죄악의 결과를 당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형편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앞의 것을 따라가려 부국강병만 외고 있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양심이 예민하고서 소위 강력한 목자 될 수는 없다. 성인들이 정치 못한 것이 이 때문이다. 소위 지도력이란 결국 자기 생각을 남에게 요구하는 일이다. 인간의 정신연령이 낮은 때는 그럴 수 있었다. 이제는 이미 그것이 사회악의 근본인 것을 안 시대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을 계속해서는 아니 된다... 제법 진리 비슷하면서도 모든 사회악을 만들어내는 근본이 소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인데 이것을 내세워서 하나의 이기심으로 인해 모인 단체 위에 씨알로 하여금 거짓으로 꾸며 따라가게 한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서풍의 노래 5, 한길사, 1984, 143쪽).


공리주의적 발언과 마치 신의 친필인 양 공언된 문자는 백성에게 강요, 강제, 요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설령 그것이 약속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약속은 이성의 자기 신뢰를 통한 인간 이성의 자기 발언과 인격의 확신과 확증이다. 그래서 약속은 개인에게는 신념과 성실의 문제, 타자에게는 믿음과 희망의 문제이다. 신의 약속을 철썩 같이 믿은 백성들은 그 약속의 언저리에 자신의 삶과 생명을 얹어놓고 기다린다. 약속은 다만 희미한 흔적이나 아물거리는 기억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표현과 실현과 책임이다. 그렇다면 목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분투적인 몸부림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 실현하지 못할 약속이면서도 목자라고해서 언어화하고 의식적으로 실행가능하다고 백성들에게 호언장담하는 독선은 그야말로 흔적도 없는 음성의 찌꺼기나 다름이 없다. 약속은 자기 자신과의 문제이자 타자와의 관계성의 상징이다. 따라서 약속은 이미 세계 내부적인 의미에서, 세계 구성적인 의미에서, 백성의 마음과의 관계에서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공유된, 공통된 구원의 공공성이다.


“참 지도자는 내가 한다는 의식이 없다... 자기를 믿고 자기가 위대하여 모든 것을 독점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될수록 모든 사람의 스스로 하는 것을 막고 자기 것만을 억지로 내세우려 한다. 그러므로 선전하고, 달래고 강제하고 속이는 것까지 꺼리지 않는다. 사람은 깊을수록 조용하다”(함석헌, 위의 책, 145쪽).
왜 목자는 모든 일을 자기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분명히 목자는 기적을 일으키는 만능의 기계적 신(deus ex machina)이 될 수 없다. 목자에게 필요한 소양은 이성과 합의, 소통과 경청이다. 그러한 바탕에 서 있는 목자라야 군림, 독재, 독선, 위선이 아닌 섬김과 배려의 참된 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 “거짓 목자는 다스리는 자요 지배하는 자요 사람을 폭력을 써서 몰아치는 자지만, 참 목자는 가르쳐주는 자요 같이 짐을 져주는 자요 받들어 섬기는 자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스스로 할 수 있게 하는 자다”(함석헌, 위의 책, 144쪽). 가시적 혹은 비가시적 정치의 이미지를 통해서 그 누구보다도 독단에 치우친 목자는 백성의 짐을 지고 가는 듯하지만 실상은 백성의 눈을 가리고 짐을 지게 하는 사람이다. 두려움과 공포는 실체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두터운 장막 뒤에 감추어진 진짜 실체를 모르는 미욱하고 연약한 백성은 보이는 것만이 참이라 믿으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을 느낀다. 그럼에도 정치 경제적 모험이나 실험을 모르는 백성들의 소박함은 형이상학적 가치나 이상도 중요하지만 국가가 계도와 계몽을 통해서 자신들의 짐을 나누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목자는 자신의 말과 문자 속 약속들의 위선과 거짓을 참으로 세우고, 백성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세상을 밝게 만들려면 마음을 알아주어야 한다. 약한 국민일수록 그렇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가물거리는 등잔도 끄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다... 마음이 맑으면 맑은 것을 뵈고 마음이 흐리면 흐린 것이 뵌다. 그렇건만 생각 없는 마음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모른다... 전체의 참을 볼 수 있는 눈이 맑은 눈이요 전체를 모르고 부분만 보는 눈은 흐린 눈이다. 나만 아니라 남을 아는, 이제만 아니라 영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보면 역사는 결코 사납고 강한 자의 것이 아니고 착하고 부드러운 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경에게 빛을 말할 수 없듯이 믿지 않는 자에게 정신의 세계를 말할 수 없다”(함석헌, 위의 책, 146쪽, 148쪽).


목자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문제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전체를 조망하고 영원을 바라볼 수 있는 진정성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함석헌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백성을 위한 마음이 없다는 것은 결국 생각 없는 정치를 하고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음과 생각을 다듬고 자신의 왜곡된 흔적은 지우고, 약속한 흔적들을 확연히 드러낼 수 있는 목자가 백성들로 하여금 축제의 춤을 추게 할 것이다. 백성들 또한 과거의 감상적 정치의 화신을 지금의 목자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거짓 목자가 되라고 하는 것이다. 적어도 올바른 경험적 인격자라면 그러한 정치적 상징과 정치적 존재자에게 순종의 파토스를 드러낼 수 없지 않겠는가. 그것이 정치적 오류라면 오류요, 정치적 오염이라면 오염이다. 백성 스스로의 정치적 무의지와 무능력을 거기서 드러내고자 하는가?


“오늘의 인류는 스스로 문명인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보기 싫고 듣기 싫은 더러운 것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은 소위 목자라는 소리다. 물건이 더러우면 사람의 몸을 더럽힐 수 있고 일이 더러우면 몇 사람을 상처 낼 수가 있으나 소위 목자라 하는 것이 잘못되면 사람의 겉만 아니라 속까지, 일부분의 사람만 아니라 나라나 인류 전체를 그릇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는 거짓 목자의 시대다. 스스로 문명이라 자랑하느니만큼 그만큼 도리어 어둠이요 야만적이다. 그러므로 현대를 건지는 길의 중요한 하나는 우리 속에 품은 목자의 모습을 밝히는 일이다. 요새를 오염의 시대다 공해의 시대다 하지만 오염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오염은 그 그리는 목자의 모습으로
인해 되는 오염이다”(함석헌, 위의 책, 139-140쪽).


정치 없는 백성은 있을 수 있지만 백성 없는 정치는 있을 수 없다. 노자(老子)는 배부르고 등 따뜻해도(鼓腹擊壤) 군주가 누구인지 모르게 하는 정치를, 맹자(孟子)는 정치 행위의 근본에 백성을 두는 민본정치(民本政治)를 외쳤다. 고금을 막론하고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정치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백성에 대한 정치적 불감증에 걸리다 못해 잔인한 정치적 축제를 즐기는 목자와 그리고 정치인들에게 백성을 위한 성스러운 흔적은 정말 비어 있는(vacuus) 것일까?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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