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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지도자는 '자연'을 말할줄 알아야 한다.

by anarchopists 2019. 11. 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12/14 06:06]에 발행한 글입니다.


정치의 또 다른 이름,
‘백성의 자연’을 부르는 자


“민주주의, 이는 사람들입니다. 특권층이 아닌 보통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가 도처에서 최상층 부자들과 극빈자들의 기막힌 격차를 목도한다면, 민주주의는 뭔가 행동하고 또 해야 하며, 극빈층이 그들의 권리와 자유를 누리고 살 수 있게 도와야 합니다. 정치는 이런 것을 위해 하는 것이며, 우리는 여기서 정신적 영역을 회복합니다.”(달라이 라마, 스테판 에셀, 임희근 옮김, 《정신의 진보를 위하여》, 돌베개, 2012)

사르트르(J. P. Sartre)는 “인간은 인간의 미래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실존적 의식과 행위들에 따라서 인간 삶의 존재 가능성/불가능성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필자는 이 말을 바꿔서 “자연은 인간의 미래다”라고 말하고 싶다. 다소 역설로 들릴 수 있겠지만, 실상 오늘날의 환경문제를 보면 자연을 주체(의식의 주체가 아닌 생명의 주체)로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경제 민주화니 정치적 쇄신이니 하면서 새로운 정치적 패러다임을 공약으로 내세우지만, 환경, 즉 자연은 뒷전이라는 점이다. 백성의 거처가 자연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자연은 추상의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삶의 실재라는 점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지도자가 자연에 대해서 새줄랑이가 아니라면, “자연은 정치의 미래다”라고 목 놓아 외쳐야 될 일이다.

정치경제의 배경은 자연[본성]이라면 억측일까? 먼 안목이 아닌 가까운 안목을 가지고 경제학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경제의 토대는 자연이다. 자연을 통해서 노동이나 재화가 발생한다. 진공 상태에서 정치경제 시스템이 발생하지 않는다. 생태학(ecology)과 경제학(economics)의 동근원적 어원인 ‘오이코스’(oikos)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스테판 에셀(S. Hessel)이 적시하듯이, 그럼에도 가족과 같이 유기적 생명체인 자연을 정치적 대화 영역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구적 사고를 가로지르는 ‘나’와 ‘나 아닌 것’, 인간과 자연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지금 같은 인류의 위기를 초래했어요. 모든 것이 대화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환경’(Umwelt)이라는 단어가 이미 대화를 암시해 주고 있는데도 말이죠. 게다가 우리 서구는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교는 인간에게 지구를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하고 있어요. 이런 식의 사고를 벗어나야 합니다. 이런 사고는 파괴와 착취로 직결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인간의 복지와 경제 민주화, 정치 쇄신에 밀려 자연이 정치 무대의 뒷방으로 밀려나서는 안 될 것이다. 새로운 정치 지도자(통치자)는 자연환경 보전도 복지와 행복의 본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도자는 자연이야말로 오히려 정치경제의 무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생명적인 것뿐만 아니라 비생명적인 것조차도 한 나라의 백성들과 함께 모두 무대 위에 있는 주연들이다. 그런데 그런 공통적인 무대가 인간의 자의적인 해석과 이념으로 파괴가 된다는 것은 우주 공동체적 토대가 사라질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의 장도 더불어 상실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스테판 에셀이 말한 ‘공감’의 환경정치적 사유가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공감(Mitgefuehl)의 ‘mit’는 우리가 뭔가를 직접적으로 대하기 전에도 이미 모든 것들과 관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나는 공감을 새로운 공생 정치의 토대로 여기고 있습니다. 공감은 글로벌 사회를 수립하는 데 필요한 연대적인 관계를 만들어 주지요.”

공감은 연대적 사유와 실천을 가능하게 해주는 관계적 태도이다. 공감이 현실 정치적인 측면에서 타자에 대한 존엄성을 기반으로 하겠다는 의지와 정서의 표현이라면, 새로운 지도자는 사람과 자연에 대해서 똑같이 공감의 정치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정치와 자연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 정치 지도자가 자연에 관한 한 찾을모라고는 전혀 없어서 백성의 자연을 존엄(dignity)하게 여길 줄 모르더라도 그를 모욕(indignity)하지는 않겠지만,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백성의 자연이 결국 분노하고(indignant) 말 것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달라이 라마(Dalai-Lama)가 말했다시피 새로운 지도자는 우리 모두가 ‘큰 우리’ 속에 살고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계속해서 스테판 에셀의 말을 인용해보자. “자연과 더불어 스스로를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희망이요, 폐쇄적인 태도로 스스로를 자연과 단절시키며 자연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 위험이” 된다. 새로운 지도자는 환경파괴가 자신[인간]을 파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를 위기에 처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친환경적 사회, 친환경적 국가를 건설하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백성과의 교감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교감이다. 또한 백성에 대한 연민과 자연에 대한 연민은 이어져 있다. 그러므로 백성을 생각하는 만큼 자연에 대해서도 백성 생각하듯 한다면 그 연민의 정치가 궁극적으로는 나라를 더욱 풍요롭고 살만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장차 지도자가 될 사람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백성의 정치적 욕망은 자연에서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향후 정치 지도자는 식량 전쟁, 물 전쟁, 석유 전쟁 등 매우 중대한 정치적 사안들을 잘 극복하고 대처해 나가는 능력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더더욱 백성의 자연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지도자가 요구되는 것이며, 그 지도자는 백성의 자연을 위한 정신적 전투를 치를 수 있는 환경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은 “사람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면 사람은 귀하고 사물은 천하며, 사물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면 사물은 귀하고 사람은 천하다. 하지만 하늘로부터 보면 사람과 사물은 균등하다”라고 일갈했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쇄신이니 경제적 민주화니 복지니 운운하지만 정작 자연의 목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지도자가 아니라 백성을 하늘로 여기듯, 그 하늘의 마음 또한 잘 읽을 줄 아는 현군(賢君)이 선출되기를 소망한다. 스테판 에셀은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여, 공감, 감정이입, 이해심-한마디로 인류의 단합-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정치 지도자와 미래 정부에게 필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한다.(2012. 12.13,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 본문 내용 중 밑의 사진은 파이낸셜 2012년 1.19일자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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