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02/12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근사(近似)적 진리로는 종교 행복이 있을 수 없다!
“성경적 종교에서 하느님은 언어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은 언어의 힘(force), 빛(light), 능력(power)으로 보기도 합니다. 때로는 좀 범신론적으로 하느님을 의미 자체로, 언어의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인간 삶의 예지성(intelligibility)으로 보기도 합니다.”_돈 큐피트(Don Cupitt)
“종교 신자가 자기네 믿는 종교의 글월을 열심히 믿고 존경하면서도 아무 큰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 가장 큰 까닭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높이는 나머지, 사람의 참된 힘씀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는 데 있다. 하나님 말씀이야 물론 하나님이기 때문에 역사를 꿰뚫고 서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오려면 반드시, 예외는 하나도 없이, 꼭 참된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만 온다. 통한다는 것은 거친단 말, 꿰뚫는단 말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람의 마음을 뚫고 거쳐 나와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그럼 그것을 뚫고 거쳐 나오는데 그 빛깔이나 울림이 거기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악기 따라 다른데 음악의 맛이 있듯이... 그 사람스러운 점을 빼면 종교 경전은 집 없는 울타리, 곡조 없는 소리 같이 크기만 무섭게 크지 속은 아무것도 없는 싱거운 것이다. 참된 사람 되잔 정성은 없이 굉장한 능력, 놀라운 신비만 바라는 종교가, 마음의 정도가 낮은 사람들에게만 있고, 그리고 그 종교가 어떤 것임을 오늘도 잘 볼 수 있지 않은가? 사람이 참 사람이 되려 힘쓰고 애쓰면 하나님에게 가 닿을 수 있어도, 사람 되잔 생각하기 전 하나님부터 되려면 짐승 중에도 가장 더럽고, 독하고, 간교한 뱀같이 되어 버린다. 그것이 잘못된 종교의 그림이다. 문제는 그저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어떻게 뚫었나,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한테 뚫리었나 하는 데 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19, 한길사, 1985, 20-21쪽)
종교 경전이 초월자의 궁극적인 뜻이 활자화되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정작 그 활자가 초월자의 것이었음을 애초에 증명해내는 몫은 유한한 인간에게 달려 있다. 다시 말하면 말해진 말(입-말)과 씌어진 말(글-말)의 진정성은 그것을 읽고 받아들인 인간의 몸-말(몸-짓poiesis/몸행위)에 의해 밝혀진다는 의미다. 입-말과 글-말이 종교인의 마음을 꿰뚫어 전달되어진 언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초월자의 마음이다. 따라서 초월자의 마음은 종교인의 몸-짓/몸행위에서 거룩한 “빛깔과 울림”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 경전의 활자는 사어(死語)나 다름이 없다.
함석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 빛깔과 울림”이란 참된 사람이 되는 것, 참을 진리의 구현으로 보고 참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초월자의 마음에 의해 입혀진 삶의 빛깔, 그리고 말에 의해 일어난 삶의 파장은 종교인으로 하여금 다름을 보이게 만드는 중요한 몸-말/몸-짓/몸행위이다. 따라서 종교의 능력은 기적이나 신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참-사람-됨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빛깔과 울림은 “종교의 그림”이다. 그림은 초월자에 대한 거룩한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진 놀이다. 그런데 그 놀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초월자의 마음이 인간을 꿰뚫어 마음에서 일어난 빛으로 살아가는 생명의 놀이다. 그 놀이를 잘 할 수 있어야 참 사람이 된다.
종교가 1차적으로는 초월자에 대한 인식과 규범, 그리고 진술에 목적을 둔다 하더라도, 그것은 곧 불트만(R. Bultmann)의 주장처럼 인간에 대한 이해와 진술(이야기)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참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한 인간학, 즉 신과 같이 되자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기 위한 방편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이 되자는 본질이 되어야 한다. 얼마 전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한 ‘2012 한국인의 종교 생활과 의식조사 결과’를 보면 비종교인의 90%가 종교를 가질 의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을 믿는다는 비율은 38.5%, 영혼을 믿는다는 비율은 36.5%로 미미하다. 이러한 결과로 보자면 일반 대중들의 종교에 대한 선호도가 자꾸 낮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진단을 내려 볼 수 있겠지만, 우선은 종교와 종교인 자체가 참 인간으로의 표지를 보여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종교의 밑그림을 잘 드러내 주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B. Russell)이 혹독하게 비판하듯이, 어쩌면 뭇 사람들에게 “인류는 이제 황금시대의 문턱에 서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첫째 이 문을 막고 있는 괴물을 무찌를 필요가 있는데, 그 괴물이 바로 종교”라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신이 되려고 애를 쓰기보다 참 인간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종교의 지향성, 즉 신과 같이 되기 위해서는 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다 보면 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를 갖고 신을 믿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행복은 종교의 행복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종교의 행복은 신자를 많이 확보하고 성장한다고 해서 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믿는 인간이 신에 의해서 그려지는 깨달음, 즉 신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는 사람, 참 인간의 바탈을 보는 사람이 많아지면 된다. 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믿는 가시적 복보다 더 무게를 두어야 할 것은 신이 내 안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내 안을 비추고 있는가, 경전의 빛이 어떻게 나를 조명하는가, 내가 믿는 신만으로 즐거워할 줄 아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신을 믿는 사람의 글속(건전한 종교인식능력, 종교적 자율성, 종교 행복의 이해) 수준이 아닐까?
“오늘날에는 인류가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위험한 맹수는 인간이다”_버트런드 러셀“종교 신자가 자기네 믿는 종교의 글월을 열심히 믿고 존경하면서도 아무 큰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 가장 큰 까닭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높이는 나머지, 사람의 참된 힘씀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는 데 있다. 하나님 말씀이야 물론 하나님이기 때문에 역사를 꿰뚫고 서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오려면 반드시, 예외는 하나도 없이, 꼭 참된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만 온다. 통한다는 것은 거친단 말, 꿰뚫는단 말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람의 마음을 뚫고 거쳐 나와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그럼 그것을 뚫고 거쳐 나오는데 그 빛깔이나 울림이 거기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악기 따라 다른데 음악의 맛이 있듯이... 그 사람스러운 점을 빼면 종교 경전은 집 없는 울타리, 곡조 없는 소리 같이 크기만 무섭게 크지 속은 아무것도 없는 싱거운 것이다. 참된 사람 되잔 정성은 없이 굉장한 능력, 놀라운 신비만 바라는 종교가, 마음의 정도가 낮은 사람들에게만 있고, 그리고 그 종교가 어떤 것임을 오늘도 잘 볼 수 있지 않은가? 사람이 참 사람이 되려 힘쓰고 애쓰면 하나님에게 가 닿을 수 있어도, 사람 되잔 생각하기 전 하나님부터 되려면 짐승 중에도 가장 더럽고, 독하고, 간교한 뱀같이 되어 버린다. 그것이 잘못된 종교의 그림이다. 문제는 그저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어떻게 뚫었나,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한테 뚫리었나 하는 데 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19, 한길사, 1985, 20-21쪽)
종교 경전이 초월자의 궁극적인 뜻이 활자화되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정작 그 활자가 초월자의 것이었음을 애초에 증명해내는 몫은 유한한 인간에게 달려 있다. 다시 말하면 말해진 말(입-말)과 씌어진 말(글-말)의 진정성은 그것을 읽고 받아들인 인간의 몸-말(몸-짓poiesis/몸행위)에 의해 밝혀진다는 의미다. 입-말과 글-말이 종교인의 마음을 꿰뚫어 전달되어진 언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초월자의 마음이다. 따라서 초월자의 마음은 종교인의 몸-짓/몸행위에서 거룩한 “빛깔과 울림”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 경전의 활자는 사어(死語)나 다름이 없다.
함석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 빛깔과 울림”이란 참된 사람이 되는 것, 참을 진리의 구현으로 보고 참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초월자의 마음에 의해 입혀진 삶의 빛깔, 그리고 말에 의해 일어난 삶의 파장은 종교인으로 하여금 다름을 보이게 만드는 중요한 몸-말/몸-짓/몸행위이다. 따라서 종교의 능력은 기적이나 신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참-사람-됨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빛깔과 울림은 “종교의 그림”이다. 그림은 초월자에 대한 거룩한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진 놀이다. 그런데 그 놀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초월자의 마음이 인간을 꿰뚫어 마음에서 일어난 빛으로 살아가는 생명의 놀이다. 그 놀이를 잘 할 수 있어야 참 사람이 된다.
종교가 1차적으로는 초월자에 대한 인식과 규범, 그리고 진술에 목적을 둔다 하더라도, 그것은 곧 불트만(R. Bultmann)의 주장처럼 인간에 대한 이해와 진술(이야기)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참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한 인간학, 즉 신과 같이 되자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기 위한 방편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이 되자는 본질이 되어야 한다. 얼마 전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한 ‘2012 한국인의 종교 생활과 의식조사 결과’를 보면 비종교인의 90%가 종교를 가질 의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을 믿는다는 비율은 38.5%, 영혼을 믿는다는 비율은 36.5%로 미미하다. 이러한 결과로 보자면 일반 대중들의 종교에 대한 선호도가 자꾸 낮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진단을 내려 볼 수 있겠지만, 우선은 종교와 종교인 자체가 참 인간으로의 표지를 보여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종교의 밑그림을 잘 드러내 주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B. Russell)이 혹독하게 비판하듯이, 어쩌면 뭇 사람들에게 “인류는 이제 황금시대의 문턱에 서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첫째 이 문을 막고 있는 괴물을 무찌를 필요가 있는데, 그 괴물이 바로 종교”라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신이 되려고 애를 쓰기보다 참 인간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종교의 지향성, 즉 신과 같이 되기 위해서는 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다 보면 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를 갖고 신을 믿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행복은 종교의 행복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종교의 행복은 신자를 많이 확보하고 성장한다고 해서 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믿는 인간이 신에 의해서 그려지는 깨달음, 즉 신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는 사람, 참 인간의 바탈을 보는 사람이 많아지면 된다. 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믿는 가시적 복보다 더 무게를 두어야 할 것은 신이 내 안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내 안을 비추고 있는가, 경전의 빛이 어떻게 나를 조명하는가, 내가 믿는 신만으로 즐거워할 줄 아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신을 믿는 사람의 글속(건전한 종교인식능력, 종교적 자율성, 종교 행복의 이해) 수준이 아닐까?
'함석헌평화연구소 > 김대식 박사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도자는 '자연'을 말할줄 알아야 한다. (0) | 2019.11.08 |
---|---|
씨알의 융합철학 (0) | 2019.11.07 |
삼월의 민족정신, 삼일정신 (0) | 2019.11.05 |
함석헌의 진리 인식과 초월자에로의 기투 (0) | 2019.11.05 |
의식의 사물화와 참을 수 없는 삶의 가벼움 (0) | 2019.11.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