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죽어가는 세계, 환경 의식혁명이 필요하다

by anarchopists 2019. 12. 2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4/20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죽어 경직되어 가고 있는 세계,
환경세계에 대한 의식 혁명이 필요하다!

“나로서는 지금 출구도 입구도 모른다. 나는 출구도 입구도 모르는 채 그저 서성거리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바로 이것이 현대성의 탄식이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현대성에 의해서 병들어 있는 것이다.”
“내가 약속해야 할 최후의 것이란 바로 인간을 <개혁하는 것>일 것이다”_
프리드리히 니체

전세계는 또 한 번 자연의 가스러진 소리, 곧 대자연의 기침에 놀라고 말았다. 문제는 재채기가 날 것을 알면서도 코앞에서 촛불을 붙이면 안 된다는 단순한 논리를 망각하고 말았다는 데에 있다. 원자력 그 자체는 촛불에 비유하기에는 가공할만한 위협적 존재이지만, 현재 우리의 초점이 스러져간 인간의 생명에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첨단의 기술문명에 의한 2차적 피해에 쏠려 있는 것은 또 다른 아이러니다. 이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위압적으로 다가온 것보다 더 두렵고 공포스러운 존재가 아니겠는가.

독일 철학자 칸트(I. Kant)는 자신의 저서 『판단력비판』에서 대자연의 거대한 실체와 위력 앞에서 왜소해지는 인간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오히려 자연보다 더 위대한 도덕적, 이성적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는 이른바 ‘숭고미’를 말한 바 있다. 숭고미의 요지는 자연 앞에 선 인간의 감성(혹은 이성)이 외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지향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저마다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를 바라보면서 인간이 한없이 작고 연약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매우 미약하고 미욱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흔히 갖고 있는 생각과는 달리, 수만 명의 생명을 사라지게 한 자연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고자 작정을 한 것이 아니다. 자연은 늘 그래왔듯이 ‘스스로 그러함’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시선 혹은 이성이 어떻게,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이런 일을 경험하게 되면 자연 초월적 존재를 향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해석의 과잉은 자칫 쓰라린 상처만 남기게 된다.

자연은 자연일 뿐이다. 그럼에도 지금 일본 열도에서 발생한 사건을 두고 ‘트리플 재난’(지진, 쓰나미, 원전 사고)이니 ‘재해’니 하는 말들을 한다. 그러나 재해가 사전적인 의미에는 부합할지 모르지만, 이 말의 원의를 뜯어보면 인간중심주의적인 발상이 묻어난다. 자연으로 인한 ‘피해’라는 말을 쓸 때도 역시 마찬가지지만, 알고 보면 재해는 언제나 인간재해만 있을 뿐이다. 이를 두고 신이 자연을 통해 인간에게 징계를 한 것처럼 몰지각한 해석을 내놓는 것은 절대 금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연이 우리에게 가지고 온 인간의 죽음(제1차)보다 원자력의 핵방사능 유출이 가지고 올 인간의 죽음(제2차)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자연이 아닌 가공된 인위적인 2차적 자연이 인간에게 그야말로 막대한 피해(이것이야말로 피해요, 재해다!)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문명사회를 이끌어 온 원자력에 대한 맹신과 과도한 의존도는 지구를 무(無)의 상태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은 한스 요나스(Hans Jonas)의 말을 빌린다면, 자칫 인류의 ‘환경적 자살’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 인간이라는 개별적 존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이란 없다. 자살은 늘 공동체적, 사회적 자살이다. 환경적 자살도 인류 전체의 사멸이요, 멸망이다. 핵은 일순간에 인류의 환경적 자살을 가지고 올 잠재태이다. 발터 벤야민(W. Benjamin)은 이러한 문명에 대해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죽어 경직되어 가고 있는 세계를 두고 진보를 이야기 하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렇다면 현대문명을 이끌어가는 원자력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수는 없는 것일까? 그 해답은 역시 우리 자신의 에너지 절약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미 우리나라도 4개의 발전소에서 20여기가 운용하는 에너지를 통해 경제성장(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는 것도 문제이지만)을 이어가고, 인간 개개인의 문명적 혜택을 풍요롭게 유지해 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이때 교회는 자연환경을 배려하는 환경사목적(環境司牧的) 마인드로 전환해야만 할 것이다.

이를테면 크게는 생태적 부담이 가장 큰 폐쇄적 폐기형 대형교회를 지향하기 보다는 지역사회와 호흡하는 순환형(循環型) 생명교회를 지향해야만 한다. 작게는 생태적 교회가 되기 위해 재생용지를 사용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주보 또한 가능한 한 재생용지로 대체해 나가는 방향을 검토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더 나아가서 교회는 태양열을 이용해 자가발전이 가능한 구조로, 미사를 드릴 때는 자연 채광을 통해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예배가 가능한 교회 구조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사목적 차원에서도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승용차가 아닌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오는 주일(말하자면 No Impact Man Day)을 제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조금 불편하고', '조금 더럽게', '조금 부족하게' 살겠다는 “의식”과 함께 교회의 신앙적 전통인 “가난”의 아스케제(Askese)를 몸소 살아 보겠다는 의지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일본은 가족, 친인척, 마을 주민, 더 나아가서 국민의 죽음과 더불어 핵방사능 유출이라는 초국가적 재난의 사태를 경험하고 있다. 그런 일본을 보고 행여 민족적 감정을 앞세우거나 신앙적 편견과 주관적 신앙의 잣대를 들이대서 저주스런 망언을 퍼붓는 태도를 삼가야 할 것이다. 그들의 지정학적 위치가 우리에게 닥쳐 올 피해를 막아주었다고 하는 것도 그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베푼 은덕(virtus)일 수 있으니 말이다.

다시 한 번 주지해야 할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번 일본의 사태에 대해서 자연은 자연일 뿐, 하느님이 자연을 통해 그들을 벌하신 게 아니라는 건강하고 이성적 사고가 필요한 때라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강의를 수강하고 있는 대학생들이 지난 4월 1일 저녁 9시에서 10시까지 한 시간 동안 전기를 소등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참에 전기 사용의 금욕, 절제 등의 아스케제를 통해서 고스러진 자연을 위해서, 그리고 자연의 포효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전지구인의 아픔에 동참하는 일도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2011. 04. 20,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  본문 내용 중 사진은  인터넷 싸이트 네이버에서 따온 것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