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31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는 역사를 수레바퀴나 나선운동과 같이 제 자리를 돈 것 같으나 실제는 앞으로 나아간 것이라는 발전사관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었다.1) 그리고 역사를 사람의 일생(출생, 성장, 장년, 노년)에 빗대어 발생기, 성장기, 단련기, 완성기로 나누어 발전 단계를 이해하였다. 그의 역사발전 4단계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1단계(발생기) : 인류의 출현에 대한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으며, 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7천년 경에 이르러 상당한 문화의 지역에 들어섰으며 석기시대 이전까지가 발생시기이다. 동굴 거주 인류의 유물을 통해 보면 그들은 순박했고 신화적이었다.
․제2단계(성장기) : 고대국가가 발생하고 민족문화의 개성의 기초가 생겼는데, 애급, 바빌론, 인도, 지나(중국), 조선,일본, 아메리카 등의 문화가 그 중 현저한 것이다. 定住의 농경문화가 물질의 풍요를 가지고 와 도시를 낳고 사회제도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낭만적이었다.
․제3단계(단련기) : 중세 이래 지금까지로서, 조선은 삼국시대 이래이고 중국은 한(漢) 이래이다. 동양에서는 소분립시대를 지나 대통일시대가 되고, 서양에서는 로마제국이 출현하여 비로소 근대국가가 시작된다. 이 시대는 회의의 시대, 고투의 시대로서 현세적에서 내세적으로, 물질에서 정신으로, 필연에서 자유로, 노예에서 자녀로 나아가기 위한 시대이다.
․제4단계(완성기) : 아직 오지 않았고 언제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애'(愛)안에 해결되는 시대가 올 것은 확실하다. 이는 통일의 시대요, 정화의 시대요, 영화의 시대요, 영원의 시대이다.2)
함석헌은 우리나라 역사도 이처럼 4단계 발달 단계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가 세계사의 윤곽 속에서 한국사를 논의한 것은 일제의 식민사관인 ‘조선사의 특수성’을 배격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일제는 한국사와 세계사의 연결 고리를 차단하고 분리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틀 속에서 패배주의적이고 저열한 역사상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세계사와 대등한 관점에서 우리 민족사를 논의함으로써 식민사관이 허구적인 것임을 은연중에 설명한 것이다.
1단계는 단국시대, 2단계는 열국시대, 3단계는 삼국시대, 4단계는 통일의시대
그러나 통일의 시대는 안 왔다.
그는 단군시대를 제1단계인 발생기로 설명하였다. 그는 단군시대의 역사를 매우 과학적이면서도 치밀하게 논의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의 상황을 혈족단체 부락이 있었고, 각 부락은 님금에 복속된 수장들이 통솔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또한 그들은 산곡을 의지하여 소박한 원시적 생활을 하였다고 하였고 이 시대를 태고시대(太古時代)라고 표현하였다.3)
그리고 골을 떠나 벌에 정착하고 혈족단체를 단위로 하던 공동체로부터 지리적 단위로 확대되며 소형의 국가가 곳곳에 생겨난 열국시대(列國時代)를 거쳐 정치단위가 3개로 정리된 삼국시대의 도래까지를 제2단계 성장기로 이해하였다. 그는 단군 조선 1천년이 발아시대(發芽時期)라면, 열국시대 1천년은 묘상시대(苗床時期)로서 장래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자격자를 기르기 위해 싹이 튼 종자를 특별한 방법으로 양육하는 때라고 비유하였다.4)
그는 삼국시대를 제3단계 단련기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를 ‘용광로 중의 삼국시대’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이 시대의 민족적 과제로서 역량을 기르고 이상을 세우고 식견을 높여 든든한 통일국가를 이루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시대에서 주목해야 할 것으로 민족적 자각을 일깨워 준 낙랑군과, 민족통일의 정신적 기초가 된 불교의 전래를 중요한 사실로 지적하였다. 그러나 삼국은 조선역사상 그렇게 의미심장한 시기였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광채 찬란한 正金을 얻기도 전에 용광로가 터지고 말았다고 아쉬워하였다.5)
고려는 성장기에서 시련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로 이해하였고, 삼국시대의 참담한 실패를 딛고 자아를 재건해야 할 책임이 큰 시기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세 차례의 기회가 있었으나, 자아를 찾지 못해 결국 실패한 왕조가 되고 말았다고 보았다. 그는 조선왕조를 본격적인 수난시대, ‘중축(中軸)이 부러진 역사(歷史)’로 규정하였다.6)
그는 조선민족이 지내 온 역사의 변천을 산세에 비유하였다. 즉, 단군 이전은 만주 평원의 위대한 초원이고, 단군시대는 백두산에서 초석을 놓은 시대라고 하였다. 그리고 천지(天池)의 정기가 넘쳐흘러 산록을 따라 여러 산계를 이루니 이를 열국시대에 비유하였다. 이후 개마고원으로부터 금강산에 이르는 산세는 삼국시대로 비유하였고, 일만 이천 봉의 빼어남을 웅장한 삼국 문화라 하며 이 시기를 ‘단군 이래 최성기’로 보았다. 그러나 신라의 통일은 척추가 부러진 태백산 형세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절하하고, 태백산 이하에서 산세가 점차 줄어들고 지리산에 이르러 척양(脊梁)의 주맥이 아주 형적을 잃어버린 것을 고려시대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은 지리산 남쪽에 갈기갈기 찢긴 소백산계의 위약(倭弱)한 산맥에 빗대었다.7)
이 같은 한국사 인식은 당대 민족주의 계열의 사가들과 큰 차이는 없다. 특히 안확의 "朝鮮文明史"와 흡사한 구조를 보인다.8) 그러나 단군에 대한 냉철한 분석, 고대사에 대한 인식, 고려의 책임론 등은 뛰어난 인식 구조라 할 수 있다. 다만, 그가 일제 강점기에 대해 서술하거나 평가하지 않은 것은 만족스럽지 못하며 한계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당시 여타 사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시휘에 저촉되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1.
역사 발전 단계와 한국사 전개의 인식
함석헌은 한국사의 역사발전단계를 4단계로 구분하였다.
함석헌는 역사를 수레바퀴나 나선운동과 같이 제 자리를 돈 것 같으나 실제는 앞으로 나아간 것이라는 발전사관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었다.1) 그리고 역사를 사람의 일생(출생, 성장, 장년, 노년)에 빗대어 발생기, 성장기, 단련기, 완성기로 나누어 발전 단계를 이해하였다. 그의 역사발전 4단계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1단계(발생기) : 인류의 출현에 대한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으며, 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7천년 경에 이르러 상당한 문화의 지역에 들어섰으며 석기시대 이전까지가 발생시기이다. 동굴 거주 인류의 유물을 통해 보면 그들은 순박했고 신화적이었다.
․제2단계(성장기) : 고대국가가 발생하고 민족문화의 개성의 기초가 생겼는데, 애급, 바빌론, 인도, 지나(중국), 조선,일본, 아메리카 등의 문화가 그 중 현저한 것이다. 定住의 농경문화가 물질의 풍요를 가지고 와 도시를 낳고 사회제도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낭만적이었다.
․제3단계(단련기) : 중세 이래 지금까지로서, 조선은 삼국시대 이래이고 중국은 한(漢) 이래이다. 동양에서는 소분립시대를 지나 대통일시대가 되고, 서양에서는 로마제국이 출현하여 비로소 근대국가가 시작된다. 이 시대는 회의의 시대, 고투의 시대로서 현세적에서 내세적으로, 물질에서 정신으로, 필연에서 자유로, 노예에서 자녀로 나아가기 위한 시대이다.
․제4단계(완성기) : 아직 오지 않았고 언제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애'(愛)안에 해결되는 시대가 올 것은 확실하다. 이는 통일의 시대요, 정화의 시대요, 영화의 시대요, 영원의 시대이다.2)
함석헌은 우리나라 역사도 이처럼 4단계 발달 단계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가 세계사의 윤곽 속에서 한국사를 논의한 것은 일제의 식민사관인 ‘조선사의 특수성’을 배격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일제는 한국사와 세계사의 연결 고리를 차단하고 분리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틀 속에서 패배주의적이고 저열한 역사상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세계사와 대등한 관점에서 우리 민족사를 논의함으로써 식민사관이 허구적인 것임을 은연중에 설명한 것이다.
1단계는 단국시대, 2단계는 열국시대, 3단계는 삼국시대, 4단계는 통일의시대
그러나 통일의 시대는 안 왔다.
그는 단군시대를 제1단계인 발생기로 설명하였다. 그는 단군시대의 역사를 매우 과학적이면서도 치밀하게 논의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의 상황을 혈족단체 부락이 있었고, 각 부락은 님금에 복속된 수장들이 통솔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또한 그들은 산곡을 의지하여 소박한 원시적 생활을 하였다고 하였고 이 시대를 태고시대(太古時代)라고 표현하였다.3)
그리고 골을 떠나 벌에 정착하고 혈족단체를 단위로 하던 공동체로부터 지리적 단위로 확대되며 소형의 국가가 곳곳에 생겨난 열국시대(列國時代)를 거쳐 정치단위가 3개로 정리된 삼국시대의 도래까지를 제2단계 성장기로 이해하였다. 그는 단군 조선 1천년이 발아시대(發芽時期)라면, 열국시대 1천년은 묘상시대(苗床時期)로서 장래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자격자를 기르기 위해 싹이 튼 종자를 특별한 방법으로 양육하는 때라고 비유하였다.4)
그는 삼국시대를 제3단계 단련기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를 ‘용광로 중의 삼국시대’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이 시대의 민족적 과제로서 역량을 기르고 이상을 세우고 식견을 높여 든든한 통일국가를 이루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시대에서 주목해야 할 것으로 민족적 자각을 일깨워 준 낙랑군과, 민족통일의 정신적 기초가 된 불교의 전래를 중요한 사실로 지적하였다. 그러나 삼국은 조선역사상 그렇게 의미심장한 시기였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광채 찬란한 正金을 얻기도 전에 용광로가 터지고 말았다고 아쉬워하였다.5)
고려는 성장기에서 시련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로 이해하였고, 삼국시대의 참담한 실패를 딛고 자아를 재건해야 할 책임이 큰 시기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세 차례의 기회가 있었으나, 자아를 찾지 못해 결국 실패한 왕조가 되고 말았다고 보았다. 그는 조선왕조를 본격적인 수난시대, ‘중축(中軸)이 부러진 역사(歷史)’로 규정하였다.6)
그는 조선민족이 지내 온 역사의 변천을 산세에 비유하였다. 즉, 단군 이전은 만주 평원의 위대한 초원이고, 단군시대는 백두산에서 초석을 놓은 시대라고 하였다. 그리고 천지(天池)의 정기가 넘쳐흘러 산록을 따라 여러 산계를 이루니 이를 열국시대에 비유하였다. 이후 개마고원으로부터 금강산에 이르는 산세는 삼국시대로 비유하였고, 일만 이천 봉의 빼어남을 웅장한 삼국 문화라 하며 이 시기를 ‘단군 이래 최성기’로 보았다. 그러나 신라의 통일은 척추가 부러진 태백산 형세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절하하고, 태백산 이하에서 산세가 점차 줄어들고 지리산에 이르러 척양(脊梁)의 주맥이 아주 형적을 잃어버린 것을 고려시대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은 지리산 남쪽에 갈기갈기 찢긴 소백산계의 위약(倭弱)한 산맥에 빗대었다.7)
이 같은 한국사 인식은 당대 민족주의 계열의 사가들과 큰 차이는 없다. 특히 안확의 "朝鮮文明史"와 흡사한 구조를 보인다.8) 그러나 단군에 대한 냉철한 분석, 고대사에 대한 인식, 고려의 책임론 등은 뛰어난 인식 구조라 할 수 있다. 다만, 그가 일제 강점기에 대해 서술하거나 평가하지 않은 것은 만족스럽지 못하며 한계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당시 여타 사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시휘에 저촉되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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