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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서평, 독후감

이 책을 추천한다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by anarchopists 2019. 10. 2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9/06 05:08]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김대식 지음, 모시는사람들


이 책(“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은 그 동안 저자가 함석헌과 관련하여 《함석헌평화포럼》(오마이뉴스)에 써왔던 글과 대학강단에서 강의해왔던 주옥같은 글들을 항목별로 분류하여 한 권으로 엮은 책입니다. 이 책에 대한 추천사를 쓰는 이 사람은 글쓰기 능력이 탁월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추천사를 부탁하는 저자의 말에 기꺼이 화답(和答)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책을 추천하는 사람보다 정신세계가 더 높은 저자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미리 받아 촘촘히 읽어보았습니다. 참으로 함석헌을 자신의 해박한 지식으로 분석하면서 해석하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함석헌의 사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든 책입니다. 이 책의 핵심 주제어는 함석헌의 저항의식과 평화사상, 인간중심, 생태환경, 아나키즘입니다.

이 책을 추천하는 사람은 역사를 전공하였고 이 책의 저자는 철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철학은 변화하지 않는 진리를 연구하는 학문이고, 역사는 변화하는 진리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역사학자가 철학자의 글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움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저자의 글이 읽기가 편한 것은 이 책이 함석헌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지만 저자의 글이 ‘변함’과 ‘안변함’을 동시에 합성하여 글을 섰기 때문입니다. 곧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가고 있는 책입니다. 글쓴이가 저자를 좋아하는 점은 바로 저자의 글을 통하여 함석헌이 철학자로, 사상가로 새로운 탄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석헌, 그러면 요즈음 젊은이들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60대를 전후로 하는 그 이상의 연령을 가진 분들은 대부분 잘 아는 분입니다. 《교수신문》사에서 전국의 대표적 교수들이 ‘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 중 일곱 번째 인물로 함석헌(1901.3.13.~1989.2.4)을 꼽을 정도입니다. (2010년 08월 31일자) 이러한 함석헌에 대하여 많은 학자와 지식인들이 그의 사상을 연구하고 있지만, 진정 그의 사상과 철학을 학문적으로 그리고 함석헌이 즐겨 썼던 용어로서 씨알(민중)과 연계하여 함석헌을 다시 살려내고 있는 글쟁이들은 드뭅니다.

함석헌 사상의 확연한 형성 시기는 어릴 적 일제강점기라는 배양기가 있었지만, 우리 역사에서 동서이념에 의한 냉전논리가 기승을 부리던 1950년대부터 1970년 말 사이가 됩니다. 한반도의 독재적 두 분단권력들은 냉전논리에 편승하여 국가폭력으로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인권을 짓밟았습니다. 이 탓으로, 이 시기는 ‘다스림의 윤리’가 처절할 정도로 구겨지고 때 묻고 찢겨졌습니다. 권력의 끝 모르는 독선, 황제화를 위한 맹목적인 자기 확장, 통치의 자기 정당화를 위해 이기심의 치졸함이 극에 달해 있던 시기입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함석헌의 사상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함석헌에 대하여 함석헌 연구가들이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 그들 나름대로 단정(斷定)을 내리고 있지만 아직은 함석헌을 뚜렷한, 이렇다 할 일가(一家)를 이루는 사상가로 자리매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가운데 《함석헌평화포럼》에서는 이미 그를 흉합철학자(무지개사상가)라고 규정지은 바 있습니다. 함석헌을 ‘무지개사상가’라고 규정짓는 것은 이 책의 저자도 표현하였듯이 함석헌이 ‘아나키즘적 그리스도교 사상’을 바탕에 두고 동서양의 사상을 넘나들며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진지한 사유 흔적을 통하여 우리(아시아)의 전통 학문과 서구 학문을 생산적으로 종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를 통하여 독자적인 ‘우리 학문’의 길을 개척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렇다고 함석헌은 학자가 아닙니다. 그는 대중연설가로 고난 받는 민중의 해방을 염원하면서 재야의 투쟁현장에서 존재했던 사상의 실천가였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융합철학에 대한 개념을 다음과 같이 새롭게 설정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르지만 조화를 이르는 것이 융합이다. 다시 말하면 보편성 안에 개별성이 녹아 있는”(16쪽) 그래서 저자는 최근에 한국 사회에서 일고 있는 ‘대중적 보수성’에 대하여 융합철학적 사고의 결여에서 나온 어리석음이라고 비판하면서 씨알의 ‘철학적 무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함석헌의 무지개사상은 종교다원주의로 표출됩니다. 그는 이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함석헌은 종
교에 대한 정의로,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지배권력적으로 강제되는 개념을 반대하였습니다. 함석헌의 주장대로 “각 종교란 시대의 언어와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말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것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은 각 종교의 존재 방식의 특수성을 말하는 것일 터, 결코 그 종교가 열등하거나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함석헌은 각기 다른 민족과 문화에는 고유한 입장과 견해가 있기에 아무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함석헌은 종교적, 사상적, 문화적 다원주의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함석헌의 사상 중 전반에 걸쳐 흐르고 있는 또 다른 사상은 아나키즘입니다. 함석헌은 우리나라가 현대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새롭게 아나키즘 사상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는 신채호와 관련은 없지만 분명 신채호의 아나키즘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함석헌학회》 이만열, 2012) 이러한 사상적 바탕에서 함석헌의 실천철학이 나옵니다. 곧 자유주의 씨알사상과 세계평화주의사상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어떤 국가조직과 기구도 반대하였습니다. 함석헌은 국가주의를 씨알이 겪는 고난의 원천이라고 보았습니다.

지구는 이제 지역의 국가를 넘어 세계가 하나로 가고 있다고 예언합니다. 그의 사상을 일관하여 꿰뚫고 있는 통일된 사상은 국가권력을 넘어선 씨알 중심의 사람주의입니다. 곧 그는 씨알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씨알의 자유의지를 억제하는 일체의 국가권력을 부정하였습니다. 바로 이게 함석헌식 아나키즘 철학입니다.

때문에 그는 국가주의를 배제하는 평화주의적, 세계주의적, 공동체적 사상을 통합하면서 창조적 사상세계를 개척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함석헌은 자연 씨알의 자치를 중시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씨알의 자치’사상이 1970년대 박정희 권력에서 신음하던 씨알들에게 저항의 희망을 주게 됩니다. 이러한 씨알의 자발적이고 자연스런 생명의 힘을, 그는 국가주의에 핵심을 두는 유학의 천명사상과 씨알의 자치정신에 핵심을 두는 노장사상의 조화(융합)에서 찾습니다. 함석헌이 말하는 천명(天命)은 임금이 아니라 바로 씨알입니다.

이 책을 통하여 글쓴이가 감동을 일으킬 수 있었던 까닭은 이 책이 갖는 시의적절함입니다. 함석헌을 다시 살려놓아야 하는 이 시대에 이 책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함석헌의 존재가 다시 부각되면서, 이 책은 그 귀함을 새삼 주목되게 그를 제 자리에 제대로 놓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김대식 박사는 함석헌 연구를 통하여 함석헌식으로 사유하면서 함석헌식 글을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 예를 들어봅시다. 영성신학을 전공한 저자는 예수와는 다르게 ‘바로 가지 못하는, 엇나가는, 교회와 사목자들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의 비판을 들으면 요즘 한국사회에서 밥 벌어먹고 있는 교회/목회자 대부분은 예수를 섬기고 따르는 교회/목회자가 아니라 예수를 배반하는, 예수를 팔아 치부(致富)하는 교회/목회자임을 자각시킵니다. “교회가 교회 본연의 임무와 사명에 충실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제도적, 구조적으로 사람들을 구속하여 공동체에 묶어둘 수 있을까? 재원 마련을 보다 더 확고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세속적, 물질적, 물량적 사목에만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갖는”(56쪽)다라는 대목을 읽을 때는 김대식 박사의 한국 교회/목회자에 대한 비통한 함석헌식 충언(衷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교회/목회자의 본질과 역할에 대하여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의 말을 요약하여 인용해 봅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는 성령의 활동이지 어떤 기관이나 체제가 아니다. 그런데 한국의 교회는 하느님의 역동성이 드러나는 활동보다 기관 확장과 체제 유지에만 급급하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의례(제의) 권력, 성직자 엘리트 중심의 권력을 확고하게 다지겠다는 발상이다.” “이런 식으로 한국교회가 나간다면 교회나 목회자는 힌두교의 브라만 계급처럼 될 것”이다. 또 “세상의 부조리, 불합리, 권력의 독점, 가난한 자들의 착취 등이 모두 인도의 사제 브라만이 지켜온 신과 그것에 대한 숭배의례에서 나온 것”이다. “힌두교의 세계관, 브라만의 귀족화에 반대하여 혁명가로서 붓다가 나왔다. 붓다 자신도 성직자 체제, 권력, 지배, 착취 등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직자(브라만)로 인해서 서민(농민)들의 삶의 근간이 무너지고 경제적으로 파탄에 이르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리스도교 교회 헌금이 결국은 성직자의 축재와 연결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57~58쪽) 바로 함석헌식 비판입니다.

반가운 일은, 김대식 박사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함석헌 해석에 새로운 페러다임을 개척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함석헌입장에서 세계철학(동서양의)을 논하는 게 아니라 세계철학자들이 사유하였던 사상세계와 함석헌의 사상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테마에서 함석헌의 사유가 세계철학자들이 사유했던 사상이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김대식 박사는 함석헌의 귀함을 이 시대의 중요성에 비추어 들어냄과 동시에, 특히 함석헌을 세계적인 철학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함석헌을 연구하는 다른 연구자들은 함석헌을 세계적인 사상가, 철학자로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김대식 박사는 함석헌을 세계적인 철학자로 재 탄생시켰습니다.

그것은 함석헌의 말과 글을 유럽의 저명한 철학자의 말과 글에 대입하여 사람(씨알)에 토대를 둔 함석헌의 행동철학(몸-짓)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석헌의 이러한 사상의 토대를 저자는 왕양명사상의 지행합일(知行合一)에서 찾고 있습니다.(105쪽) 때문에 이 책을 통하여 함석헌의 철학세계는 물론, 동서양의 철학세계까지 모두 섭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한 권의 책을 가지고도 세계철학자들의 사유세계를 요약해 읽는 동시에 함석헌의 사상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자 김대식 박사에 의하여 함석헌은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저자는 인간의 갈등(스트레스)문제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 갈등이 정치, 예술, 성 행위윤리, 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합니다. 종교의 갈등에도 다차원적 성격, 중층적 특성을 무시할 수 없는데, 동일한 공동체 안에서도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이 서로 반목하거나 싸움을 하는 경우와 서로 다른 이질적인 공동체가 이해관계나 이익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종교적 갈등을 극복하고 종교의 평화로 가자고 제안합니다. 바로 저자의 ‘종교평화지수제정’에 대한 동의입니다. 저자가 종교평화지수제정에 동의하는 가장 중요한 철학적 의미는 타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68쪽) 곧 현대 우리 사회는 자기 자신이 아닌 ‘타자’를 통한 자아의 이성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종교의 갈등 해소, 혹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종교의 평화를 위해서는 종교 자체의 정화나 각성은 시대의 당위성이라고 합니다. (70~71쪽)

앞에서도 함석헌에 대한 설명에서도 말했지만, 저자도 함석헌의 사상 중 아나키즘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김대식 박사는 특히 함석헌을 국가권력을 넘어서는 종교적 아나키즘(religious anarchism)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함석헌을 통하여 김대식 박사는 종교와 정치를 깊숙이 연결합니다. 정치가 잘못 가는 것은 종교의 책임으로 봅니다, 그래서 국가권력의 폭력에 대하여 종교는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더불어 종교자체가 권력화 되었을 때도 신도들은 그 종교권력에 대하여 저항해야 한다고 합니다. 함석헌 역시 인간의 절대자유와 종교자유를 강조합니다. 저자는 함석헌이 자유로운 종교, 노예의 종교(신앙적 평등성), 무교회적 신앙을 주장하는 것은 그가 ‘종교적 아나키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저자는 함석헌의 종교적 아나키즘을 ‘평화적 아나키즘’으로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함석헌의 평화 아나키즘을 실천하는 방안으로 “평화적 소공동체, 생명적 대안공동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쪽만 잘 사는 사회, 한쪽만 편드는 국가, 한쪽만 잘 낫다고 하는 정치, 한쪽만 복 받는다고 하는 종교. 이렇게 두남두기(편들기)보다 모두가 평등하며 서로 돕고 조화를 꾀하는 사회가 바람직하지 않는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자신의 밥그릇을 생각하여 씨알(민중)은 아랑곳하지 않는 정치․국가․종교는 인간도, 자연도 살리지 못하는 바보가 아니던가.”(13쪽)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자연 환경에 대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논의를 탈피하고 생태중심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어원적인 고찰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99쪽)

김대식 박사는 얼키고설킨 함석헌의 글을 꼼꼼히 풀어가며 “종교적 현상을 꿰뚫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렌즈를 통해서 세계를 깊이 인식한 사상가요, 강연자요, 작가”라고 함석헌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함석헌을 작가/종교적 작가라고 말합니다. “함석헌은 종교문제를 비롯하여 사회, 정치 등 여러 방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참여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라고 파악함으로써 세계의 여타 철학자와 함석헌이 다른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세계철학자들이 사유와 비판 자체로 끝났다면 함석헌은 그 사유와 비판을 실천으로 옯겼다.”는 주장입니다.

역사는 오류의 시간을 거쳐, 성찰의 시간을 만나 정의시간으로 가는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변증법적 역사발전법칙) 아직도 한국의 역사는 오류의 시간을 끝낼 시간에 와 있습니다. 그 와중에서 민주주의가 옥중에 갇혀 있고, 독재권력이 제왕처럼 행사하고 있습니다. 설득과 포용의 리더쉽을 가지고 국태민안(國泰民安)에 진력하는 지도자가 없습니다. 개인의 영달과 국가이익을 사유화하는 권력자와 정치인들만 우굴 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반대 당파와 사회단체조차 감히 이를 비판하고 공격할 엄두도 못 내고 서로 짜고 고스톱(화투에서 말하는)을 치고 있는 판입니다. 함석헌처럼 옥살이도 두려워하지 않고, 협박도 무서워하지 않고, 위기에 빠져 혼탁해진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그런 신념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이런 이 시대에 이 책은 우리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고 ‘추구하고 지향하는 인간’으로 만들어 주리라 믿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오늘날 이 위기의 시대, 혼탁한 시대에 함석헌을 다시 그리워해 봅니다.

2014. 3.1
소백산 醉來苑 豊士堂에서
황보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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