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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서평, 독후감

이호재, 포스트종교운동

by anarchopists 2019. 10. 2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7/22 05:13]에 발행한 글입니다.

“포스트종교운동”, 종교의 대체재인가? 보완재인가?
[서평] 이호재 <포스트종교운동>(문사철)


물음1: 감산혼합의 종교를 극복할 수 있을까?

서양미술사에서 인상파 화가들은 물감을 섞으면 섞을수록 검정이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을 ‘감산혼합’이라고 한다. 빛은 반대다. 빛은 섞으면 섞을수록 백색광이 된다고 해서 ‘가산혼합’이라고 한다. 종교는 건축, 신앙, 신비적 경험, 종교이론 등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빛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어쩌면 종교의 역사는 어두움이 존재했던 시대에 빛으로 세상을 밝히려 했던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종교는 빛과 어두움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감산의 세계에서 가산의 세계를 만들고자 노력했던 종교가 이제는 거꾸로 감산의 세계로 추락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굳이 종교학자들이 아니더라도 세계의 종교 흐름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우려가 아니라 무관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혹자는 교회 이후, 종교 이후의 시대를 논하려고 시도하는 것 같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종교학자 이호재 박사(현 紫霞院 원장)다. 중국종교를 전공한 학자로서, 제도적, 조직적 종교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음에도 종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몇 년 전부터 예리한 비판을 견지해왔다. 그 일환으로 등장한 것이 이번에 출간한 『포스트종교운동』(문사철, 2018)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물음2: 자본화된 종교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그는 일전에 한국 종교사상가로서의 변찬린을 소개한 묵직한 저서로 종교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은 저자는 후속으로 종교가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하고자 일필휘지로 종교 이후, 혹은 현재의 종교를 탈피한 종교 이후의 종교를 논하고 있다. 『포스트종교운동』에서는 부제가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종교가 자본화되어 있고 외형적인 건물이나 조직, 제도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고도비만체형이 되어버린 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경제학적으로 풀어보면, 종교란 사실 경제재가 아니다. 자유재다. 다시 말해서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 얻을 수 있는 무슨 상품이 아니라, 공기가 햇볕과 같이 양이 무한하여 특별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개별자의 신앙과 영성은 주체적인 절대 자유여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는 자본주의 사회의 무기력한 경제재가 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이윤극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처럼 손실을 입지 않으면서 신자들은 물론 비신자들까지도 종교를 소비하도록 장려하는 것은 애초에 종교가 경제재가 아니라 자유재라는 것을 망각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장삿속이 되어버린 종교를 뿌리 뽑고 새로운 종교를 모색해야 한다는 저자의 야심찬 기획은 ‘운동’이라는 성격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총 5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포스트종교운동』은 제1편은 변찬린에 대한 종교사적 위상을 밝히고 있고(변찬린에 대한 자세한 연구서는 이호재 박사의 『한국종교사상가 ᄒᆞᆫᄇᆞᆰ 변찬린』, 문사철, 2017을 참조할 것), 제2편은 한국의 종교운동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제3편에서는 현재의 한국종교문화의 이상(異狀) 현상을 직접적 언어로 비판한다. 학자가 정제된 학문적인 언어를 뒤로 하고 직접적이고 원색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사안이 그만큼 급박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그친다면 저자의 비판은 결국 또 하나의 종교비판으로 끝날 수 있겠지만, 제4편과 제5편에서 한국종교가 나아가야 할 현실적인 방향과 제안을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우리 한국의 종교가 어떻게 처음 마음과 처음 신앙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본주의 속으로 빠져 들어갔는가를 분석하고 있는데, 이를 근거로 현재의 종교인 혹은 종교적 전문가를 ‘교주형 직업종교인’, ‘기복부흥사형 직업종교인’, ‘권력지향형 직업종교인’ 등 ‘직업종교인’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얼마나 종교가 개인과 공동체의 복을 강조하고 성직자의 본질이 변질되어 교주가 되었는가를 밝히고 있다. 더군다나 지금의 종교는 건물 혹은 구조적, 외형적 하드웨어에 힘을 기울인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피안신앙으로 흐르게 하고, 자본주의적 기업형, 권력형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조목조목 현대의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맹점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교리적이고 교파중심적이고 바울로신학에 경도되어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이라는 구호에 갇혀 있다는 좀 더 현재 종교의 현실적 문제점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

물음3: 새로운 종교운동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책의 중간에서 한국 종교가 나아가야 할 역사적 사명은 함석헌의 ‘씨ᄋᆞᆯ종교공동체운동’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개체와 공동체 전체를 아우르는 종교운동이어야 하고, 더불어 같이 살기와 조화, 그리고 평화와 영생이라는 시의적절한 운동의 방향성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의도하는 새로운 종교운동의 과제는 함석헌과 그와 함께 활동했던 변찬린이 제시한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주체의식을 가진 씨ᄋᆞᆯ종교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데에 있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종교운동은 분명히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종교공동체가 실현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호재 박사는 그것을 ‘새교회운동’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새’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지금까지의 종단과 교파를 넘어서는 전혀 새로운 종교, 새로운 신, 새로운 초월자, 혹은 새로운 진아(眞我)를 만나는 종교를 일컫는다. 서평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새교회란 단순히 교회만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를 포괄하는 대표개념이라고 보고 싶다. 그 이유는 변찬린이 개신교의 신앙적·신학적 세례를 받았다고는 하나, 그의 영성적·종교적 스펙스럼을 볼 때 반드시 교회만을 상정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새교회란 신의 뜻에 합당한, 신에 뜻에 부합한 종교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종교는 신의 뜻에 반하였다는 말인가? 이호재 박사는 변찬린을 언급하면서, 새교회운동, 혹은 새종교운동은 구조적 건물 지향이 아닌 인격적 내면 지향, 어느 누구의 계도를 받아서 성장하는 양적 변화가 아니라 주체적인 신자의 행동 변화에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이는 경전과 교리를 맹신하는 신자가 아니라 참 인간을 추구하는 인격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이른바 ‘인간이 곧 성전’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포스트종교운동으로서의 새교회운동은 새종교운동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반드시 진리공동체로서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종교는 서로 폐쇄적인 모나드와 같은 종교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종교 이후는 모나드적 영성으로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성적으로 서로 소통이 안 된다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향후 포스트종교운동의 사활이 ‘영성생활공동체’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그것은 단적으로 “사랑과 자율과 공감”을 나누는 인격적 종교공동체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 종교적 권위에 대한 저항, 건물성전의 해체, 종교경전의 해방을 통한 주체적 경전 읽기, 인격 신앙을 통한 생활공동체의 형성을 목표로 해야 할 것을 설파한다. 이상과 같이, 그의 요지는 간명하다. 자본신앙과 자본종교에 물든 종교를 해방시키고 영성적 인격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종교운동의 ‘포스트’는 ‘탈’(脫)이나 ‘초’(超)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물음4: 포스트종교운동, 보완재가 될 수 있는가?

지금의 종교는 한계효용체감의 주술에 빠져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없는 듯하다. 공급과잉은 많아진 반면, 수요는 줄어들어 종교적 소비는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일부의 종교적 상품만 판매가 되고 있는 것은 역시 자본에 의한 홍보전략에 기인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다 보니 독과점의 종교만 양산될 뿐 소수의 종교들은 그 틈새를 들어갈 수가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자본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종교나 영성의 생산품이 있다고 하더라도, 경쟁에서 밀리다보니 판매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호재 박사의 포스트종교론를 다시 경제학적 측면으로 부각시킨다면 무리일까? 종교시장에서 종교상품들은 계속 경쟁을 할 것이다. 이호재 박사가 내세우는 포스트종교론은 서로 경쟁 관계에 있어 어느 한 상품 대신 다른 것을 소비하여도 만족에는 큰 차이가 없는 종교대체재(substitute goods)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한 상품을 따로 소비할 때마다 함께 소비할 때 더 만족을 얻게 되는 상품처럼 종교보완재(complementary goods)가 될 것인가. 그 귀추가 주목된다. 평자의 급한 마음에 보완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앞서는 것은 지금의 제도종교에 대한 단순한 기우 때문일까? 그러나 소비에서 베블렌 효과(Veblen effect)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소비자도 값비싼 것을 소비하여야 자신의 품위가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과시욕구현상을 말한다. 종교도 반드시 경제학적 이론으로 판단할 수는 없어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종교를 소비해 온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종교를 통해서 과시욕구를 실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도와 조직, 교리와 종교지도자로 구성되어 있는 기성종교 안에 있으면 안정감을 줄지는 몰라도, 그 종교를 소비하면서 젖어드는 마약과도 같은 습관적 중독성으로 말미암은 비본질적인 종교성에서는 헤어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이미 자신이 몸담고 있는 종교의 아비투스 때문에 이호재 박사의 비판이 좋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종교 소비를 하고 있는 자신에게 그 소비가 잘못되었고, 되레 종교소비욕구는 병이라고 지적을 하고 있으니 반발심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종교인은 때에 따라서는 이성과 영성을 좀 구분하면서 동시에 겸비하려는 건강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의 종교의 존속은 보장될 수 없거니와 포스트종교조차도 도래하지 않는다.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cool head and warm heart). 알프레드 마샬(A. Marshall)의 교수 취임연설문에 등장한다. 오늘날 종교에도 적용·응용되는 말로 삼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그나마 완전히 분해되지 않은 희망적인 인격공동체로서의 포스트종교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을까?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기독교미래교육연구소 부소장이며, 종교학과 철학으로 각각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함석헌의 평화론』,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함석헌과 이성의 해방』, 『칸트철학과 타자인식의 해석학』, 『그리스도교 감성학』, 『아시아평화공동체』(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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