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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일요 시론, 시평

이상한 판결, 그리고 또 다른 폭력

by anarchopists 2020. 1. 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1/16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대한민국에 사법권은 존재하는가.

한국의 근대 이후, 전통적으로 왕이 가지고 있던 사법권을 민주주의 원칙에 의거 분리ㆍ독립시켰다. 바로 ‘국민의 주권’이 국가권력(검경찰과 군대)에 의하여 유린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곧 국가권력으로부터 국가구성원의 권리를 보호하자는 취지였다. 다시 말하면, 이 나라에서 행정ㆍ입법ㆍ사법의 삼권이 상호 견제하면서 독재권력의 출현을 막고 주권자의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민주주의를 하자는 취지였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이 수립한 이후에도 삼권은 제대로 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그때는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원칙을 잘 알고 있는 정치꾼이 없었기 때문이다. 권력만 아는 정치꾼들이 우글거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법부(국회)와 사법부(법원)가 늘 행정부 수장인 통령에게 예속되어 독재권력을 수호하는 수단으로 전락되고는 하였다. 그래도 민주주의를 안다는 김영삼 대통령부터는 점차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원칙이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시절이 되면서 한국의 사법부는 제 구실을 다 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역역했다. 곧 사법부가 ‘통령권’으로부터 독립된 자세를 취하려는 노력을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명박 통령이 들어서고 나서는 다시 사법부가 행정권력에 자발적 예속을 취하고 나서는 면면들이 보이고 있다. 우리는 흔히 ‘나약한 지식인’, ‘뻔뻔한 엘리트’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이것은 지식인들이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소신껏 행동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다. 즉 정의와 자유정신이 없다는 말이다. 사법부의 판사들은 사법고시를 통하여 출세와 영달을 한 자들이다. 그들도 사법고시를 보기 전에는 청운의 꿈을 꾸었을 게 분명하다. ‘청운의 꿈’을 끌 때는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사회비판적, 체제비판적 사고 말이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힘든 사법고시 준비를 하면서 그들이 갖고 있던 유연한 사고는 점점 옅어진다. 그리고 고시 합격 후에는, 현실의 영달과 출세지향의 사고를 보인다. 곧 그들 스스로 보수세력으로 편입했다는 말이 된다. 잘못된 사회구조에서 생겨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또 법을 공부했기에, 또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기에, 또 ‘자유와 평등과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에 일말의 양심은 있으리라.

2011년 1월 13일, 대법원 법정에서 박정희 전두환 때 있었던 반공시국사건 피해자들(아람회사건, 민족일보사건, 간천조작사건 등)에 대한 국가손해배상 청구에 대한 최종 판결이 있었다. 그러나 대법원의 대법관들이 해괴한 논리를 내세워, 1심과 2심에서 판단한 국가배상액을 엄청난 액수로 삭감하였다. 그 해괴한 논리는 법적 근거도 없는 ‘예외적 손해’ 기간이라는 애매한 개념이다. 즉 “불법행위를 보상하는 위자료 계산이 물가에 큰 차이가 없는 ‘단시간’에 가능했다면 문제가 없지만, 수십 년이 지나 뒤늦게 이뤄지면 ‘예외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법적 근거도 없는 ‘이상한 논리’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사회이다 이 때문에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자들에 대한 보상을 돈으로 보상한다. 그런데 그 돈도 못주겠다면, 국가권력으로부터 온갖 고문과 협박과 공갈 등 폭력으로 희생된 이들의 삶은 무엇으로 보상을 할 것인지. 아람회사건의 경우, 한 사람은 당시 대만국립사범대학의 초청으로 박사과정을 밟기 위한 유학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일이 벌어졌다. 대한민국 경찰에 의하여 영문도 모르는 채, 불법체포와 감금을 당하고 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경찰과 검찰조서가 조작되었다. 이어 재판이 강제되었다. 7년형의 유죄판결이 나왔다. 그는 감옥에 갇혔다. 이후 그의 인생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삶 자체가 파괴되었다. 시간이 흘러 암울한 시대가 지나면서 억울한 누명으로 옥살이를 했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법원은 국가에게, 그에 대한 잘못에 대하여 돈으로 보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대법관이 보상액수를 깎았다. 이러한 판결을 내린 대법관은 적은 액수의 돈으로 그 사람의 삶의 좌절을 모두 보상할 수 있다고 보는지.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보상액수를 깎겠다면, 사법부는 국가(행정부)폭력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그들에게 다른 방도의 보상이라도 주었어야 했다. ‘구상권’(求償權) 말이다.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두들겨 패고 감옥에 처넣었던, 그 당시의 청와대, 내무부, 검찰, 경찰, 그리고 국가폭력을 옹호한 판사 등, 관계자들에게 잘못을 받아내고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이번 판결로, 국가 잘못에 대하여 주권자인 국민은 아무런 이유도 대지 말라는 판결이 되고 말았다. 대법관 박시환 판사는 이번 판결을 통하여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는 모르지만, 법복을 벗고 나가는 게 그나마, ‘또 다른 정신적 피폭력’을 당하게 된 자들에 대한 미안함을 표시하는 게 되지 않겠는지.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이상한 판결’을 듣고 나오면서 대법원 현관에 붙어있는 ‘자유, 평등, 정의’의 글귀가 부끄럽고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2011. 01.14,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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