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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일요 시론, 시평

그리스도교 장로, 천당을 바라는가

by anarchopists 2020. 1. 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1/23 05:46]에 발행한 글입니다.


그리스도교 장로, 천당을 바라는가.
-일본 속의 한국역사문화 기행을 다녀와서-

1. 1987년, <일본속의 한국역사문화기행>을 처음 시작하였다. 서울 YWCA에서 실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후로 매년 어린학생들을 데리고 같은 코스(때로는 답사지를 달리 하며)로 <일본속의 한국역사문화기행>을 하며 해설을 하였다. 물론 가이드는 따로 있지만 사적(史蹟)에 대한 해설은 글쓴이가 했다. 대략 기억하건데 2007년까지는 <일본속의 한국역사문화기행>지인 오사카[Osaka, 大阪], 나라[Nara, 奈良], 쿄도[Kyoto, 京都], 후쿠오카[Fukuoka, 福岡], 구마모토[Kumamoto, 熊本] 지역의 신석기, 청동기 중심의 야요이문화, 우리나라 삼국시대 문화 중심의 아스카문화, 그리고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불교문화, 한반도와 일본의 외교문제 발생과 관련한 성곽문화, 상업교류와 무역문화 등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런데 2010년 이전만 해도 각급학교에서 이 지역은 한국 학생들의 역사문화 기행지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한국 학생들의 기행이 부쩍 줄었다는 느낌이다. 그곳 가이드의 이야기에 의하면, 역사문화 기행보다는 도시 중심의 놀이시설과 상업관광지를 더 많이 찾고 있다고 한다. 이것도 한국의 경제수준이 높아진 탓일까. 아니면 인문과학이 점점 땅에 떨어진 탓일까. 일본관광을 하는 것도 좋지만, 굳이 역사문화를 빼고는 불 것도 없고 물가도 비싼 일본관광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시 중심의 관광에서는 인생에 얻을 것이 없지만, 역사기행에서는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서로 다른 문화의 차이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우리는 남을 이해하는 자세를 갖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종교다. 믿음생활이다. 일본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국과 중국, 그리고 서양을 통하여 다양한 종교와 사상, 그리고 이념들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일본은 농경시대문화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고유한 종교인 신도(神道)를 지금까지 신봉하고 있다. 그래서 신사(神社), 신궁(神宮)이라는 신앙의 마당이 지금도 일본인 정신문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한국인들이 자기 신념과 신앙을 버리고 서양종교(그리스도교)에 빠쳐드는 것과는 다르다.


이번 <일본속의 한국역사문화기행>에는 전국철도노동조합 산하의 철도생활협동조합의 일꾼 가족과 그 외 지인(知人)들이 참여하였다. 이번 역사문화기행에서도 문화의 다양성과 다원화과정을 이해시키는 것을 해설의 주제로 삼았다. 인류의 문화는 상호 접촉과 교류를 통하여 새로운 지역의 기후와 풍토, 그리고 생활풍습에 맞는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고유문화를 지키는 동시에, 남의 문화도 존중하고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남의 문화에 대한 편협한 사고는 위험하다. 내 민족 최고, 내 나라 최고, 내 부모 최고, 내 문화 최고, 내 종교 최고라는 사고는 낡은 사고다. 모든 인종, 민족, 사상은 서로 존중되어야 한다. 민주와 자유를 문명(文明)으로 위장하여 나보다 문명치 못한 이웃, 민족과 인종, 그리고 나라를 침략하고 그 곳의 경제이익을 착취하는 오늘날의 미국식 제국주의와 패권주의는 그래서 나쁘다. 또 자기 국가의 이익에만 매달려 남의 나라의 이익을 이용하려는 일본과 중국의 태도 또한 나쁘다. 이제는 국가주의가 극복되고, 모든 지역의 자연과 공동체, 그리고 개인의 문화적 가치가 더 존중되는 사회로 나가야 한다. 이 문제를 종교에 국한하여 이야기를 지어보자.

2. 모든 종교의 발생은 단순하다. 종교에는 교조가 있다. 그 교조를 따르던 제자(인간)들에 의해 종교는 탄생한다. 그 교조의 가르침을 어떤 종교에서는 신의 계시라고 하기도 하고, 깨달음이라고도 한다. 종교의 영적세계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 하던, 외형상 종교는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래서 후대 제자들의 생각과 느낌이 달라지면서 초기 교리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종파라는 분파가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만약 어떤 종교의 탄생이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신의 계시였다면, 후대 사람들의 해석의 차이 때문에 종파의 분열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그 신은 전지전능이 아니다. 일부 종교들은 자기 종교의 권위와 전파의 필요성에서 신의 계시라는 등 영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렇지만, 종교는 인간사회의 발전과 문화의 폭이 넓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원시종교가 보편적ㆍ과학적ㆍ합리적으로 다듬어지면서 발전하기 마련이다. 즉 보편적이고 합리적으로 깨달음을 얻은 자들에 의해 종교의 탄생과 발전이 있게 된다.

그래서 종교교리 또한, 인간의 사회발전과 문화의 확장과정에 따른 그 '시대의 필요성과 목적'에 의하여 합목적적으로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예수 탄생 이전의 그리스도교는 일원적 사고에 근거한 영생관(永生觀)이었다. 곧 인간이 죽으면 천당(天堂)에 가는 것만 있었다. 그러다가 예수 이후 제자들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성립되고, 그 발전과정상에서 로마의 정치세력과 결탁(신의 계시든 아니든)하게 된다. 종교가 정치와 결탁하는 과정에서 로마의 이원론적 사고가 그리스도교의 교리 속에 들어오게 된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든 사물을 로마식의 이분법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여기서 천당과 지옥의 영생관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정치와 결탁하면서 갑자기 확장된 교회조직에 대한 지배의 필요성에서 교회조직인 교황제와 교구(敎區)제가 생겨나게 된다.

천당, 또는 극락(極樂)을 가기 위해 신앙을 갖는 태도는 21세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종교와 그 믿음행위는 내세보다 현실을 바르게살기 위한 방편이 되어야 한다. 곧,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생활태도여야 한다.
글쓴이는 가톨릭교회를 다닌다. 그러나 믿음행위의 중심은 남과 다르다. 예수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받되, 예수님의 삶의 태도 중 사회개혁과 정신개조의 가르침(곧, 개혁적 사고)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믿음행위는 각자 다르겠지만, 보이지 않는 천당을 찾기 보다는 현실 속에서 정의와 평화를 찾아가는 삶의 태도가 바른 신앙(信仰)이 아닌가 한다.

그리스도교 장로가 신앙의 탈을 쓰고 나라사람 대부분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정책을 쓰고 있다면, 그것은 바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다. 신앙의 탈을 쓴 악다구니일 뿐이다. 권력탐욕에 신앙을 이용하고 있는 자일뿐이다.(2011. 01.20 초안, 01.23 다시고침,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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