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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일요 시론, 시평

이승만이 국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나.

by anarchopists 2019. 12. 2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1/30 07: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이승만이 국부(國父)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나.


최근에 00대학의 김00교수를 중심으로 ‘이승만기념사업’을 펼치면서 몇 가지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이승만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자유민주주의 체제 확립”, “사회경제적 근대화 견인”을 이끌어 낸 “건국 대통령”, “대한민국의 가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최근에 뉴라이트 계열들은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고, '자유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았다”고 찬양한다. 게다가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회장 강영훈)와 <우남연구회>(회장 이주천)는 “국가안보 현실과 2011년의 중요성”이라는 주제로 제58차 이승만 강좌를 개최하였다.(연합뉴스 1,27) 또 이승만을 연구하는 이00교수는 “이승만과 박정희 등 우리나라에 중요한 인물 10명을 선정해서 폄하 왜곡된 사실을 바로 잡자”는 이른바 이승만 관련 ‘역사바로잡기운동’을 벌이고 있다.

수구정권이 ‘정치적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틈을 타서 여기저기서 용서할 수 없는 인물들을 다시 ‘역사의 화해’라는 이름으로 미화시키려 든다. 창피한 일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이 마당에 다시 한 번, 역사 속에서 용서할 수 없는 인물 곧,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에 대해서는 ‘역사와 화해’가 아니라 ‘역사의 정의’로서 심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이승만에 국한하여 살펴보자.

이승만은 그가 살고 있던 시대, 모든 민중들이 어렵게 살 때, 어찌했건 미국의 조지워싱턴대(학사) - 하버드대(석사) - 프린스턴대(박사)를 나온 부르주아적 인텔리이다. 미국이 정책적으로 중국의 자유주의자 후스[胡適; 1891~1962)을 길러냈다면, 한국의 이승만은 타의건 자의건 미국의 앞잡이로 길러졌다. 따라서 이승만은 중국의 후스처럼 미국이념의 추종자였다. 이 탓으로 이승만은 당시 국제사회의 다양한 시대적 사회조류를 냉철하게 읽어내지 못하고 맹목적 미국일변도의 추중세력이 될 수밖에 없는 성장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승만을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라고 한다. 이에 사실적 근거를 두고 그의 행적을 추적해 보자. 1910년 그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탄(倂呑)한다. 이때를 기하여 이승만은 자신을 드러낼 절호의 기회를 잡는다. 미국에서 공부한 배경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미국세력을 등에 업고자 노력한다. 그것은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에 잘 드러난다. 상하이[上海] 임시정부가 결성되고 이승만은 이의 집정관 총재(執政官總裁)와 국무총리로 추대된다. 그러자 그는 독단으로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설치하고 위원장이 되어 스스로 대통령 행세를 한다. 이 결과 이를 반대하는 세력(박용만, 안창호)과 파벌을 만들게 된다. 이후 해방될 때까지 그의 행적은 식민지 한국의 독립보다는 오르지 미국의 환심을 사는 데 주력한다. 그리고 결혼은 자유지만, 독립운동을 하고 민족운동을 한다는 그가 과연 미국여자(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와 결혼(1934)할 수 있었겠는 지에 대해서도 그의 본질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한다.

해방공간이 되었다. 동서이념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미국은 일본을 자유진영의 보루로 만들기 위하여 한반도 38〬 선 이남을 사수할 필요성을 갖게 된다. 이에 미국의 농간에 의하여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체였던 임시정부의 존재가 부정되는 가운데 이승만은 순조롭게 귀국한다. 그리고 김구 등 임시정부 관련 사람들은 어렵사리 귀국하게 된다. 이후 이승만은 미국세력의 지원 하에 우익 미국진영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하게 된다. 이로부터 이승만은 처음부터 ‘단독정부론’을 주장하면서 미국의 대외이념인 반공정책을 국시로 삼는다. 그리고 한반도 통일정부를 바라는 좌익세력과도 타협을 거부한다. 이에 김구 등 ‘통일정부론’을 주장하는 임시정부 세력과도 등을 돌린다. 이러한 와중에서 마땅히 초대 대통령이 되어야 했던 김구는 암살되고 민족통일은 “물 건너 불구경 꼴”이 되고 만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 한민족은 비극의 영토분단과 혈육의 별리가 이루어진다. 이 결과 남에서 먼저 자본주의 국가의 대한민국이 성립되고(1948.8.15. 이하 남함) 북에서는 조금 늦게 사회주의 국가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된다.(1948. 9.9)

내각책임제를 반대하고 대통령제를 주장하던 이승만이 결국 남한사회의 대통령이 된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맹활약을 한다. 이에 일제의 보안유지법을 계승하여 국가보안법을 제정(1848.12.1.) 하고 연일 북진통일을 주장한다. 그리고 북과 잦은 충동을 일삼는다. 여기에 더 얹혀서 목적이 어디에 있었던 간에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외교정책을 바꾼다.(에치슨라인) 이에 사회주의국가들의 결집이 일어나고 침략전쟁이 일어난다. 한반도에서 동서이념전쟁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민족상잔의 6.25한국전쟁이다.(1950) 6.25한국전쟁은 한반도의 영토분단의 고착과 함께 남북 쌍방이 건너서는 안 되는 비극의 ‘혈육끼리 원수지간’을 만들어냈다.

한편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배일(排日)정책을 고수한다. 그러나 그는 배일정책과 달리 일제침략기 제동포를 압박하고 갈취하였던 친일지배세력들을 그의 관료조직에 대거 포진시켰다. 자기모순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들 친일지배세력이 친미반공주의 세력으로 변신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친일지배세력으로서 친미반공세력으로 변신한 이들 이승만 추종관료들은 국가사회와 국민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이익(자본주의)을 먼저 앞세웠다. 그리하여 조봉암이 입안한 농지개혁법(農地改革法, 1949.6.21)을 '공산당식 토지개혁'이라고 뒤집어버렸다. 그리고 끝내는 ‘진보당사건’(1958. 1. 14)을 조작하여 조봉암을 사형시켰다.(이는 2011. 1.20, 대법원에서 무죄로 선고되었다.)

이승만은 고령의 나이에도 노망을 부려 자유당 독재를 통한 권력유지에 혈안이 된다. 권력에 눈이 어두워 민주주의의 기본질서를 파괴하였다. 부산정치파동(1952.1), 발췌개헌(1952.7.4.), 사사오입개헌(1954.11.29.), 2,4파동 및 국가보안법 개정과 지방자치법 개정(1958. 12. 24)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3.15부정선거(1960)를 저지른다. 이에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결국 ‘4.18과 4.19학생시민혁명’이 일어난다. 그러자 이승만은 그의 정신적 조국 미국의 하와이로 도망하고 만다. 이런 자를 ‘국부’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만약 이승만을 국부로 부활시킨다면 그를 몰아낸 4.19학생시민혁명은 어떤 역사적 평가를 내려야 할까. 국부를 내쫓은 반란으로 평가해야 할까.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승만은 이 나라의 단추를 처음부터 잘못 끼운 사람이다. 초대대통령으로서 나라의 기틀을 잘못 세운 장본인이다. 그는 민족의 죄인이면서 민주사회의 이단아다. 농지개혁법 실패 유도와 유교자본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친일친미반공세력을 양성하여 민족분단을 획책한 민족분열세력이었다. 남한사회를 미국에 대한 자발적 식민지국가로 만들었다. 독재의 초석을 쌓았으며, 친일ㆍ친미적 지배관료조직을 구조화함으로써 사회정의를
파괴하였다. 부정선거와 인권의 탄압으로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차단시켰다. 민족분단을 영속화시킴으로써 민족주의 완성을 방해하였다. 이러한 여러 부정적 결과들로, 한국 사회에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자가 준동하게 만들었다.

이승만은 이렇게 우리나라를 ‘공정한 가치’가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회로 만들었다. 그래서 ‘정치적 폭력’을 대통령의 통치행위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통치자들이 ‘정치적 폭력’을 통치행위로 착각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상처들을 받고 고통에 신음하고 있지 않은가. 민족일보사건(1961.5)으로 희생된 자들, 인혁당사건(1964.8.14.)으로 희생된 자들, 민청학련사건(1974.4)으로 희생된 자들, 아람회사건(1981.8.20.)으로 희생 된 자들이 대표적이다.

역사의 발전단계에서는 ‘역사의 화해’란 없다. 다만 역사에는 ‘오류의 단계-성찰의 단계-정의의 단계’만 있을 뿐이다. 이승만은 ‘역사의 오류’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반성과 성찰만이 있을 뿐, 그와 ‘역사의 화해’는 있을 수 없다. ‘역사의 화해’라는 용어는 맞지 않는다. 지금도 창피한 나라인데, 게다가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게 되면 우리는 더욱 창피한 나라가 되고 만다. 그만 떠들고 좀 조용히 있자. (2011.01.29.,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 본문의 사진은 인터넷 네이버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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