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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일요 시론, 시평

왜, 국가가 교육행정과 학생선발권을 장악하나

by anarchopists 2020. 1. 1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8/22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학생선발권’을 대학에 돌려줘라
왜 국가가 교육행정과 학생선발권을 장악하나


교육과학기술부의 의뢰를 받아 ‘대입제도개선안’을 연구해 온 <중장기 대입 선진화 연구회>가 ‘대입선진화’ 방안을 어제 발표했다.(8.19) 내용의 골자를 보면, “2014년부터 수능 복수시행, 수준별 시험, 영역별이 아닌 교과목 중심으로 바꾼다는 내용이다. 대입선진화 방안의 취지는 “수험생의 학습부담 및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자”는 의도다. 그러나 글쓴이가 볼 때, ‘대입선진화’ 방안은 이 나라 교육개선에 주금도 도움이 안 되는 내용이다. 지금 이 나라의교육제도와  대학입시제도는 큰 모순에 놓여있다. 이 모순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입시제도 개혁안도 무의미하다. 이 나라 교육제도와 입시제도의 모순은, 상급학교의 학생선발권과 시험관리를 국가(교육과학기술부)에서 관장하고 있다는 점과 교육부 장관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해 본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 우리나라 대학입학제도 개혁은 늘 국가권력과 대학세력 그리고 피교육자세력 간에 얽힌 이해관계 면에서 이루어져왔다. 따라서 권력이 바뀔 때마다 내놓은 입학시험제도 개선안은 문제점이 늘 노정되어 왔다. 이를 종합해본다.

첫째, 국가는 권력의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대학의 주체적인 학생선발권을 통제해 나갔다.
그 결과 대학의 학생선발권은 점차 국가로 이관되어 갔다.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저질은 <대학입학국가예비고사>(이하 예비고사, 1968) 실시와 <7.30교육개혁>(1981) 조치가 대표적이다. 시간이 흘러, 군부독재가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와서 잠시 대학의 자율적 학생선발권을 회복시켜주는 듯 했다.(1994년 이후) 그렇지만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때부터 25년 이상 지속되어 온 국가의 학생선발권에 대한 통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 결과, 국가에서 관장하는 획일적 시험이 대학 입학지원자에게 무비판적으로 강요되었다. 이의 영향으로 초ㆍ중등 교육의 방향이나 내용도 권력순응적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이는 결국 대학입학제도가 한국의 교육내용 전반을 결정하는 중심체 구실을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국가통제하의 획일적 대학입시제도의 개편은 1) 정권의 정당성 조작과 장기집권화의 이데올로기로서 중요한 도구로 기능하였다. 2) 대학이 학생선발권을 주체적으로 행사하지 못함으로써 대학의 자치능력에 대한 불신감을 사회에 확산시켰다. 3) 또 이러한 국가권력의 대학통제는 우리 사회에 국가의 통제만능주의를 만연시켰다.

둘째, 조변석개 식으로 바뀌는 입시제도의 변화는 사회심리적인 병폐로 교육적 불안감을 만연시켰다. 해방 이후 대학입시제도가 변하지 않은 해는 거의 없었다고 할 정도로 매년 개편되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잦은 입시제도의 개편은 집권자들이 ‘교육의 100년 대계’를 무시한 채 집권정당의 새로운 아이디어의 실험무대로 활용되었다. 즉 “성공하면 자기덕분이요, 실패하면 말고”식 조변석개의 정책 실험장으로 이용하였다. 떫은 감을 씹은 기분이다. 이 때문에 한국의 모든 학부모와 학생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입시제도개편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긴장감이 높아져갔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전체를 ‘대학입시의 심리적 포로’로 만들고 말았다. 게다가 대학의 입학전형에서 고등학교에서 내린 모든 평가자료를 보조자료 내지는 참고자료로 취급하였다. 이 결과로 중등교육의 권위나 가치가 크게 손상되어왔다. 이 때문에 지금은 조금 개선되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중등교육기관의 교육성과를 불신하는 풍조는 여전히 남아있다.

셋째, 대학입학시험을 국가가 주관하다보니 자연 관리의 편의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학생의 입학관계 자료를 점수화하고 대학이 학생을 선택하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대학에 들어가 교육을 받는 것은 학생 당사자이다. 때문에 어느 대학에서 무슨 교육을 받을 것인가는 학생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 교육 현실은 점수화된 자료에 근거하여 타율적으로 대학의 선택을 일방적으로 강요당하고 있다. 이의 비판을 의식한 듯 교육부는 <5.30 교육개혁조치>(1995)에서 복수지원제를 내놓았다. 그러나 이마저도 이른바 일류학교라고 불리는 서울대ㆍ고려대ㆍ연세대 등의 ‘학교이기주의적 악용’, 그리고 ‘대학 간 학력격차의 심화’로 무용지물의 정책이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최근에 조금은 점수화된 자료가 아닌 비점수화 되는 사회정의 노력, 학생의 다양한 능력에 의하여 대학이 학생들을 선발하고는 있다. 그러나 미흡한 수준이다. 문제는 학생이 대학선택권을 갖지 않는 한 이 나라의 대학입시제도의 병폐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철저한 학력위주의 선발원칙은 대학생의 본분을 망각시켰다. 대학생은 학문연구 뿐 아니라, 개인의 인격도야와 사회의 바른 일꾼으로 성장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문도 중요하지만, 높은 도덕성, 민주시민이 갖는 책임의식, 평등의식, 봉사정신 등 비점수화 되는 사회정의적인 면도 대학생활 동안에 갖춰나가야 한다. 그런데 대학입학 전형애서 객관타당성을 명분으로, 점수화하기 쉬운 학력ㆍ내신ㆍ시험 위주로 입학사정을 해버린다. 이러한 입시제도의 병폐가 대학으로까지 연장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리나라 교육 장소는 "점수높이는 요령을 배우는 장소의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결과로 대학생들 사이에는 비인간적이고 경쟁적인 풍토가 지배하게 되었다.

끝으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해 보자. 먼저 대학이 학생에게 선택되는 입시제도를 하루빨리 도입해야 한다. 곧 학생이 대학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교육은 정치적 예속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 정치적 논리로 접근해서도 안 된다. 이제는 더 이상 국가가 대학의 학과와 정원을 조정하고 시험을 통제하는 등 대학에 대한 간섭을 해서는 안 된다. 대학교육은 대학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고 맡겨져야 한다. 그럴 때만이 학생이 대학을 선택할 수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가 권력 중심의 교육행정을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하면, 더 이상 권력과 돈으로 대학교육을 좌우지하려는 권력 중심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부와 교육청을 완전히 폐지하고, 지방자치단체별로 국가의 행정지도와 통제를 받지 않는 지역주민들로만 구성된 ‘교육자치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그래서 지역의 ‘교육자치위원회’에서 결정된 교과목ㆍ교과서 선정과 교육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둘째, 대학도 반성해야 한다
. 대학의 수는 많고, 지원학생 수가 적어지는 시대적 추세로, 대학들이 상아탑의 기능에서 취업학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속도로변에 대학들이 내건 한심한 머리간판들이다. “벤처가 강한 대학”, “공무원사관학교” “취업 100% 달성 대학”, “취업이 잘 되는 대학” 등 한심한 내용이다. 취업학원으로 전락한 대학은 더 이상 대학이 아니다. 이들 대학들은 스스로 4년제에서 2년제 전문대학(직업대학)으로 성격을 조정해야 한다. 직업대학으로 내려가기 싫다면, 진정한 상아탑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리고 취업학원 격 대학에서 학생유치를 위해 내걸고 있는 “석ㆍ박사학위 수여대학”라는 간판도 내렸으면 한다. 보기에 흉하다. 상아탑으로서 대학이 아닌 대학들이 학문 성과 위주의 석ㆍ박사를 배출할 자격이나 있는지 스스로 반성해 볼 문제이다.(미완성, 2010.8.21 아침,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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