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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오늘의 명상] 자발적 식민지 노예근성을 버리자.

by anarchopists 2020. 1. 1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7/23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미국에 종속된 노예문화에서 탈출하자

《씨알의 소리》제 67권(1977년 9월)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의 강대국들이 폭력에 의한 지배주의의 국가관을
버리고 문명을 근본으로부터 고쳐 건설할 각오를 한다면 그에서 다행한 일은 없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악의 세력과 너무 밀착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탄의 깊은 곳’까지 글어갔습니다. 그 정치 그 문명은 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강대국이 하는 정책은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정책밖에 되지 않습니다. 평화소리를 하지만, 그것은 마치 잘 사는 사람이 자기가 향락하고 남은 찌거기를 근본적으로 없애려면 제 향락을 버려야했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할 용기는 없고 기껏 한다는 것이 그것을 밀어 가난한 사람더러 치우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강국들은 (후진국들에게) 이중의 악을 행하고 있다. (후진국들은 강대국들의) 망해가는 문명에 병이 들어 기껏 잘 하노라 하는 것이 이제 멀지 않아 엎어질 앞차를 한사코 따라가고 있습니다.”
(함석헌, <병신자식을 낳은 마음>, 《함석헌저작집》9, 한길사 2009, 161쪽, 재인용) #( )안의 글은 글쓴이가 붙임

이렇듯이 함석헌은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을 “엎이질 앞차”라고 했고 그들의 문명을 “망해가는 문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같은 후진국이 이를 모방하는 것을 “망해가는 문명에 병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명상은 한국인의 ‘미국에 대한 자발적 노예근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다음 글은 2004년 2월에 쓴 글입니다. 이를 다시 정리해 봅니다.

“1910년 우리가 일제에게 식민지를 당한 원인에 대하여 역사학자들은 민족적 모순과 봉건적 모순을 들고 있다. 민족적 모순은 일제 등 외세의 침략과 이에 대한 우리 민족의 대응을 말한다. 그리고 봉건적 모순은 봉건세력과 이에 맞선 농민민중의 도전을 말한다. 1900년대는 이 두 가지 모순을 극복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민족적 수치인 일제의 식민지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민중들의 해방운동과 국제적인 노력(?)에 의하여 민족의 해방을 맞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미국과 소련 등 외세의 강제에 의하여 비극적인 민족의 분단과 함께 미군의 한반도 주둔이라는 ‘제2의 민족적 모순’이 발생한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식민지 후유증에 편승하여 미국이라는 외세를 등에 업은 정치ㆍ경제적 친일ㆍ친미 독재세력들이 사회적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이리하여 문화적으로 친미ㆍ사대문화가 팽배하게 됨으로써 이번에는 ‘문화적 모순’까지 일게 되었다. 이제 이러한 ‘제2의 민족적 모순’과 ‘문화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의 미래는 또 어떠한 민족적 수치를 당하게 될지 모른다. 여기서는 ‘제2의 민족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수많은 민족민중의 사회단체들의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지만 문화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상당히 미온적이다. 하여 ‘문화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대중운동을 제안하면서 이글을 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문화적 모순’을 지적해 보면 크게 ‘미국의 헐리우드식 폭력영화’, ‘영어조기교육 풍조’, ‘영어식 간판의 유행’, ‘영어표기, 영어용어의 만연’, ‘미국식 음식문화’, ‘미국식 주거문화’, ‘미국식 의상문화’, 여성들의 ‘미국식 화장문화’ 그리고 최근에 일고 있는 ‘미국식 섹스문화’와 이의 영향으로 일고 있는 성폭력의 만발 등이다. 특히 세계화라는 엉터리 개념을 뇌까리며 요즈음 유행하는 노래가사에서 미국말와 한국말이 뒤섞여서 노래가사가 만들어지는 풍조는 ‘미국에 대한 자발적 식민지노예근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청소년들에게 화염분사기처럼 오염되어 한국의 전통문화와 모순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지식인이나 문화권에서는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당연한 풍조라고 자포자기하고 있다. 문화적 모순을 방치해 두는 것은 민족공동체의 무너짐을 초래케 하는 위험이다. 곧 나를 잊어버리고 나라(삶의 공동체)마저 잊어버리는 결과를 갖게 된다. 우리 사회가 ‘미국에 대한 자발적 식민지노예근성’을 보이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여기서는 몇 가지 이유만을 들어보자.

우리가 미국에 대한 자발적 노예근성을 보이게 된 배경에는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가 크게 작용하였다. 최근(2006년 전후로)에 남한사회의 영화계에서 대박을 터트린 영화는 내가 알기로, “쉬리”,를 필두로 하여 “친구”, “실미도”, “태극기를 휘날리며” 등이다. 그런데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폭력을 소재로 하였다는 점이다. 즉 ‘적(敵)과 아(我)’를 상정시켜 놓고 ‘아’가 ‘적’을 과감하게 파괴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적을 파괴하는 과정이 미국의 할리우드식 폭력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헐리우드 영화가 늘 그러하듯이 아의 생존을 위해 적을 살생하는 것을 미화(美化)하는 그런 식의 영화가 우리 영화계에도 오염되어 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그 동안 미국의 헐리우드식 폭력영화에 길들여 있는 우리 영화관객들임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영화감독들은 그 폭력의 소재를 우리 것[남과 북, 또는 정(正)과 사(邪)]에서 찾앗다. 그러자 헐리우드 영화로 폭력성에 길들여져 있는 영화관람객들은 나름대로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고 자처하면서 이 영화들을 즐겨본다. 즉 ‘미국에 대한 자발적 식민지노예근성’이 엿보게 하는 증거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는 미국의 냉전적 동서이념에 편승하여 다시 6.25한국전쟁을 상기시키는 영화(포화속으로)와 드라마(전우, 로드넘버원)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미국에 대한 자발적 식민지노예근성’이 배양된 배경에는 미국유학이 크게 작용하였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딴 자들은 성골이다. 그리고 서울대 이외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박사학을 받은 자들은 진골이다. 이들이 대부분 대학의 교수와 교육부의 고급관료로 진출한다. 교육전선에 이들은 바로 미국파를 형성하고 미국식 교육제도를 무분별로 도입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미국식 교육제도가 도입되고 한국의 교육현장을 주도해 나간다. 이 결과 한국사회에 자연히 미국식 문화가 만연되어버렸다.

‘미국에 대한 자발적 식민지노예근성’이 배양되게 된 또 하나의 배경으로는 그리스도교(특히 기독교)의 만연에 있다. 유럽이나 미국은 그리스트도가 쇠퇴일로에 있는데도 남한사회는 확장일로에 잇다. 그런데 교회를 주도하는 대부분의 기독교회는 미국의 원조를 받아 성장해 왔다. 그리고 초기는 미국에서 공부하여 목사직을 안수받고 목회활동을 하는 자들이다. 게다가 한국의 신학대학 자체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이외에 미국정치의 입김과 한국정치권력의 친미적 성향이 또 이것을 부채질하고 있다.

위와 같은 영향으로 우리 사회에 ‘미국에 대한 자발적 식민지노예근성’이 만연되고 있다. 미국문화에 대한 자발적 식민지노예근성은 함석헌의 말 따라 “엎어질 앞차를 한사코 따라가고 있”는 모습이다. 곧 앞차가 엎어지면 뒤차도 엎어진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하리라 본다. (2010. 7.23 아침, 취래원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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