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8/04 07:2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 말씀]
1. 씨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몸을 쓰고 있는 이상 평안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몸의 평안을 잃으면 혼의 평화를 지키기가 어렵고, 혼의 평화가 깨지면 거룩한 이의 음성을 보고 들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닥쳐오는 서풍 속에서 야정해도삼만리(夜靜海濤三萬里; 고요한 밤, 바다의 파도는 삼만리를 떠돌고)의 기상을 가지시기 빕니다.( <함석헌저작집> 9, 2009, 한길사, 17쪽)
2. 제갈량 생각이 납니다. 그는 성인도 아니었고 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스러운 존경할만한 인격이었습니다. 그의 일생의 의미는 스스로 눈물로 썼던 출사표의 끌말 한마디로 다 괼 것입니다. 국궁진췌 아이후이(鞠窮盡悴 死而後已:몸이 부서지도록 온 정성을 다하고, 죽어서 일을 마치리라) 그저 애를 써본 것입니다. 목숨이 있는 순간까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다가 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른바 "성패이둔(成敗利鈍; 이기고 지고, 유리하고 불리하고)은 제가 알 바 아니오"했습니다. 그럼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옳은 것을 위해서입니다. ...옳은 것은 무엇입니까? 씨알을 생각하고 아끼는 것이 의(義)입니다.(같은 글, 19쪽)
[오늘의 명상]
함석헌 선생님의 이 글은 "씨알의 소리 47호(1975)에 실린 글입니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요 골자를 골라보면 이렇습니다. "거룩한 이의 음성", " 살아있는 있는 동안 정성을 다하고" , "의에 살고"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물질문명이 팽배하면서 인간은 그 본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혼의 평화가 깨졌습니다. 혼의 평화가 깨지면서 거룩한 이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이의 음성은 곧 '사랑과 평화'입니다. 사랑은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남을 사랑하는 게 더 큽니다. 남에 대한 사랑이 곧 '의'(義)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 의가 사라졌습니다. 이 의가 돈과 물질에 가려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의를 잃어버렸습니다. 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경쟁주의로 나갑니다. 남을 이겨야 합니다. 남보다 잘나야 합니다. 남보다 잘 살아야 합니다. 남보다 앞서야 합니다. 때문에 모든 일에서 정성(의를 가지고 일하는)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성을 다 하지도 않고 기대만 합니다. 정성이 없는 경쟁만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미움이 생깁니다. 미움은 곧 마음의 악을 만들어냅니다. 마음의 악은 곧 싸움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나라도 이 미움이 자라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지구 나라들 중에 미움을 가장 많이 가지고 남과 경쟁하려는 나라는 미국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일으키는 전쟁이 세상에서 제일 많습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의 정성을 다하지 않습니다. 미음과 악을 가지고 경쟁논리와 능력주의만을 주장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혼의 평화를 잃은 금수와 같게 됩니다. 오늘날 물질의 획득을 위하여 온 사회가 우리 인간을 능력주의와 경쟁만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교육에서까지 경쟁주의를 강조합니다. 바로 경쟁주의와 능력주의의 강조가 악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 악이 인간에게 평화를 깨게 만들듭니다. 남에 대한 미움을 키워줍니다. 남보다 우쭐한 사람이라는 거만을 키워줍니다.
우리는 지금 사람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지 오늘의 명상 화두로 던져봅니다. 사람답게 사는 사회는 능력주의와 경쟁주의를 배제하고, 의를 가진 채 사랑과 평화를 가지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사랑과 평화에 있느냐, 남과 경쟁해서 이기려는 자에 있느냐(2010. 8.4 아침, 취래원농부)
* 원문에서 일부 틀린 글씨는 글쓴이가 수정하고
한문의 해석 또한 오늘에 맞게 재해석했습니다.
이 점 양해 바랍니다.
씨알에게 보내는 말씀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어디 있느냐-
[함석헌 말씀]
2. 제갈량 생각이 납니다. 그는 성인도 아니었고 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스러운 존경할만한 인격이었습니다. 그의 일생의 의미는 스스로 눈물로 썼던 출사표의 끌말 한마디로 다 괼 것입니다. 국궁진췌 아이후이(鞠窮盡悴 死而後已:몸이 부서지도록 온 정성을 다하고, 죽어서 일을 마치리라) 그저 애를 써본 것입니다. 목숨이 있는 순간까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다가 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른바 "성패이둔(成敗利鈍; 이기고 지고, 유리하고 불리하고)은 제가 알 바 아니오"했습니다. 그럼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옳은 것을 위해서입니다. ...옳은 것은 무엇입니까? 씨알을 생각하고 아끼는 것이 의(義)입니다.(같은 글, 19쪽)
[오늘의 명상]
함석헌 선생님의 이 글은 "씨알의 소리 47호(1975)에 실린 글입니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요 골자를 골라보면 이렇습니다. "거룩한 이의 음성", " 살아있는 있는 동안 정성을 다하고" , "의에 살고"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물질문명이 팽배하면서 인간은 그 본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혼의 평화가 깨졌습니다. 혼의 평화가 깨지면서 거룩한 이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이의 음성은 곧 '사랑과 평화'입니다. 사랑은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남을 사랑하는 게 더 큽니다. 남에 대한 사랑이 곧 '의'(義)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 의가 사라졌습니다. 이 의가 돈과 물질에 가려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의를 잃어버렸습니다. 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경쟁주의로 나갑니다. 남을 이겨야 합니다. 남보다 잘나야 합니다. 남보다 잘 살아야 합니다. 남보다 앞서야 합니다. 때문에 모든 일에서 정성(의를 가지고 일하는)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성을 다 하지도 않고 기대만 합니다. 정성이 없는 경쟁만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미움이 생깁니다. 미움은 곧 마음의 악을 만들어냅니다. 마음의 악은 곧 싸움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나라도 이 미움이 자라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지구 나라들 중에 미움을 가장 많이 가지고 남과 경쟁하려는 나라는 미국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일으키는 전쟁이 세상에서 제일 많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람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지 오늘의 명상 화두로 던져봅니다. 사람답게 사는 사회는 능력주의와 경쟁주의를 배제하고, 의를 가진 채 사랑과 평화를 가지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사랑과 평화에 있느냐, 남과 경쟁해서 이기려는 자에 있느냐(2010. 8.4 아침, 취래원농부)
* 원문에서 일부 틀린 글씨는 글쓴이가 수정하고
한문의 해석 또한 오늘에 맞게 재해석했습니다.
이 점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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