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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영호 교수 칼럼

오늘날의 시대정신, 진보세력의 대통합이다.

by anarchopists 2019. 12. 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0/14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시대정신이 있는 사회인가?
- 통합의 정치를 위하여-

우리가 속한 공동체 즉 우리 사회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가치 가운데, (전번 글에서 주제로 다룬 양심처럼) 잘 보이지 않는 또 한 가지는 ‘정신’이다. 개인으로서야 영육, 심신으로 이루어진 인간인지라 정신이 부족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살림을 함께 공유하는 공동체로서 과연 정신을 가지고 정신을 차리고 사는지, 있다면 어떤 정신을 가지고 지속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이 인격이 있어야 사람이라 할 수 있고 나라에도 국격이 있어야 하듯, 과연 우리는 정신을 가진 나라에 살고 있는가.

양심’처럼 ‘정신’도 헤아리기 힘든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렇더라도 구체적인 공간과 시간 속에서 실체를 파악해야 한다. 시대마다 공동체를 지배하는 정신이 있다. 시대정신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서구에서 zeitgeist(spirit of the times)로 대표된다. 원래 독일말로 웹스터 영어사전에서는 “한 시대의 지적, 도덕적, 문화적 풍토(climate)" 또는 ”특정한 시대의 특징적인 사고와 감정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정의된다. 지금 한국사회의 풍토는 어떤가. 물질과 명리에 대한 끝 간 데 없는 탐욕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신문과 텔레비전이 주도하는 언론환경을 생각하면 한 마디로 ’한심하다‘고 할밖에 없다. 비현실적인 드라마, 천박한 연예, 쾌락과 욕망의 정보, 돈과 부동산, 부패와 어두운 그림으로 가득 차 있다. 건설적인 문화콘텐츠가 없다. 그것이 시대정신인가? 아닐 것이다. 모두가 정신없이 추구하는 것들은 물질이지 정신적 가치가 아니다. 물론 ’정신‘에는 다른 함의도 있지만, 시대정신은 탐욕의 대상인 물질은 아니다.

앞에서 본 시대정신의 정의가 현실태를 말하는 것이라면 당위적인 이상을 가리키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함석헌은 시대정신을 “인격이 자기완성적으로 역사 환경을 파악한 것”(저작집14:30)이라고 정의한다. 인격과 역사이해를 내포한 것이다. 정신사의 진화에 필요한 요소다. 인격자체가 곧 시대정신이다. 참된 인격 속에 시대정신이 녹아서 화현(化現)되어 있다는 뜻이다. 시대정신을 읽으려면 훌륭한 인격을 보면 된다. 그런데 인격을 갖춘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인격자는 이성, 감성, 영성(spirituality)을 조화시킨 사람이다. 한국사회는 감성만, 그것도 감정 수준에서, 남아있고 이성과 영성은 아예 고갈되었거나 없는 개인들로 가득 차있다. 특히 3부 요인들, 큰 조직을 이끄는 종교 지도자들을 보면 확연하다. 인격을 갖추고 정신이 똑바로 박힌 교육자, 학자도 드물다. 대강 다 정보 기술자들이다.

결국 시대정신은 밑바닥 민중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얼음 밑에 가늘게 흐르는 시냇물처럼 씨알 가운데, 가슴 속에, 핏줄 속에 연면하게 흐르는 정신이다. 그것은 눈이 뜨인 자에겐 분명히 보일 수도 있고 현실의 밑바닥에서 작동하는 생존 법칙으로 눈에 안 뵈지만 은밀히 작동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럼 이 사회를 지배하는 정신은 무엇일까. 얼른 잡히지 않은 것은 그만큼 정신없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돈과 재산일까? 누구나 가장 정신을 쏟고 있는 대상이다. 없는 자는 있어야 살고, 있는 자는 더 가져야 더 가지려고 하는 돈이나 재산은 물질이지 정신이 아니다. 정신과 인간성을 빼앗는 사탄의 도구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정신은 무엇인가. 아마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것을 일깨우고 가르쳐야할 교육이나 종교가 역시 물질의 썩은 똥통에 빠져있다. 그 사실을 알려주어야 할 언론은 권력과 광고주에 붙어서 언론의 임무인 비판 정신을 잃어버렸다. 광고지, 선정지 재벌 방어도구로 전락했다. 이를 비판, 항거해야할 유식층, 지도층도 돈과 권력에 줄 서느라고 양심을 챙길 틈도 없이 정신없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길목에서 시냇물 밑에 졸졸 흐르는 물줄기에서 계절의 낌새를 알 수 있듯이 민중, 씨알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수 밖에 딴 도리가 없다. 지금 돌아가는 사회의 낌새를 살펴보면, 무엇이 이 시대의 정신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시국의 판세, 시세에 민감한 정치판에도 작동하고 있다. 그들은 아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원리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 소리는 무엇인가. 진보적인 대안세력들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배우 문성근이 주도하는 통합을 위한 서명운동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대정신은 바로 그것이다. 분열과 대립으로 갈라진 개체들을 함께 묶는 것이다. 반세기 이상 분단된 나라의 통일과 (동서 및 계층으로 분열된) 사회의 통합보다 더 큰 목표는 없다. 분단과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키면서 기득권 세력의 옹호에만 힘을 쏟는 위장 보수세력을 교체하기 위해서 양심적인 진보 세력이 정치를 주도하려면 갈라진 진보 야당과 시민들이 연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최선의 방법이다. 일제의 압제 기간의 시대정신이 해방과 독립이었다면 1945년 이후의 시대정신은 통일과 통합 또는 연합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신은 분단을 극복하는 날까지 유효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당 간 통합을 위한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어둠속의 한 줄기 빛이다. 그 과정에서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간, 민노당과 진보신당 간 통합이 일단 좌절된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민노당과 국참당 간의 통합이 부결된 것을 잘된 일로 보는 입장이 있다. 박노자 교수는 한겨레 칼럼(9.29) 글 “계급정당의 사명”에서 두 정당의 계급적 성격 상 통합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두 정당의 주류를 상이한 계층으로 보고 그 계층을 마르크스주의 식 계급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두 정당 구성을 엄격하게 계급으로 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유물론적 계급관은, 함석헌이 잘 말한 대로, 사회분석의 낡은 틀이다. 설사 주류계층이 다르더라도 두 정당이 진보를 표방한다면 통합 못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진보’만으로도 충분히 뭉칠 근거가 된다. 진보가 아니라도 공통분모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다음 총선과 대선을 위해서라도 전략적으로 통합해야 한다.

완전한 통합이 불가능하거나 이념적인 명분이 서지 않는다면 통합 대신 연대나 연합이 가능하다. 각기 지분을 유지하면서 한 정당을 운영하고 지분만큼 의석수를 확보하고 국정에 참여하는 것이 자기 정체성이나 고집하는 것보다 훨씬 좋다. 작은 차이로 큰 것을 잃을 수는 없다. 정권을 수구세력에게 내주고 나서 국민이 당하고 있는 이 고통을 다시 반복할 것인가. 자기만의 이념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정파들이 함께 엮는 우산 정당이 최선의 방책일 것이다.

통일/통합/연합/ 연대가 이 시기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이어야 한다. 다른 원리나 가치가 대치할 수 없다. 전체를 앞세우지만 개인/개체를 살피지 않는 전체는 무의미하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입장이 영원한 대립으로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는 출발은 반대지만 두 대립 방향으로 돌아서 만나게 되어있다. 동서 반대 방향으로 출발한 두 사람이 지구를 돌아서 결국 만나게 되어있듯이 남을 위함이 결국 자기를 위함이요, 자기 위함이 남 위함이 된다. 인간을 위하자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위하자는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한다면, 보수와 진보도 끝에는 만난다. (필리핀 같이 빈부 양극화가 심화된 사회에서 불안하게 사병을 두고 살 것인가, 북구 같이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복지국가에서 안전하게 살 것인가, 선택의 문제다.) 개인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발전해온 서구사회가 그 본보기이다. 이제는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사회주의 사이의 벽은 허물어지고 있다. 스웨덴에서처럼 보수와 진보 사이의 거리도 좁혀지고 있다. 진보정당이 이루어놓은 좋은 정책과 장점을 유지, 보전하는 것이 보수정당의 하는 일이다.

그것이 (경제, 복지, 남북관계 등) 앞 정권의 장점을 지우는 일에만 열심을 낸 한국과 미국의 보수정당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두 나라는 여러 면에서 지금 큰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FTA)에 목을 매고 있는 이유다. (시대정신을 못 읽고 있는 한국국민의 대표가 바로 지금 워싱턴에서 미국 지도자를 만나서 국빈 대접
을 받고 있는데 그 대접에 녹아나서 일방적으로 협정을 몽땅 다 바치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전에 없는 경제, 금융 위기를 겪고 있는 미국이 자기가 주도하는 문명(pax americana)의 벼랑 끝에 와 있다는 진단이 나온 판국에 그래도 희망이 비친다면, 그것은 금융자본의 탐욕성에 대한 항의가 뉴욕에서 발단되어 전국의 도시로 확대되고 있는 현상이다. 탐욕의 문화 저변에 흐르는 미국 민중의 시대정신이 있다면 어떻게 표출될지 궁금하다.

작건 크건 이념, 방법론의 차이를 인정하는 통합이라면 두려워할 것 없다. 상호보완과 조화, 타협을 통해서 통합 아니면 연합을 구축할 수 있다. 통합이 최선이지만 현실적으로 당장 어렵다면 연합이 차선이다. 결과적으로 차선이 최선일 수도 있다. 통일이라 하더라도 획일화하는 통합(unification)이 아니고 다양성을 살린 통일성(unity in diversity)을 살린 것이어야 한다. 개성과 다양성을 살리지 못하는 통일, 통합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다. 통일성-다양성은 세계화 시대의 패러다임인 다원주의(pluralism),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와 부합한다. 남북의 통일이나 통합도 유럽처럼 연방이 가장 가능하고 현실적인 방법이다. 7.4 공동선언에서 약속한 ‘낮은 단계의 연방’ 가운데 통일의 묘수가 있다. 사랑과 결혼도 한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는 결합이 아닌 서로의 역할과 기능을 인정하는 연합이나 연대로 보는 것이 안전하다. 그것이 부부유별(夫婦有別)의 현대적인 의미다.

오늘의 정치상황에서 통일/통합/연합/연대의 정신을 벗어나면 민족과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 될 것이다. 작은 차이를 인정하고 큰 동질성을 찾는 대동소이(大同小異)의 시각이 필요한 때다. 통합은 화합으로 이끈다. 화합은 공동체에 필요한 평화, 조화, 합심과 합동의 정신이다. 화합만이 분단, 분열, 양극화된 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서울 시장 후보 단일화는 큰 획을 긋는 출발점이 된다. (2011. 10.14, 김영호)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 본문 내용 주 사진은 연합뉴스(위)와 디지털 타임즈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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