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김영호 교수 칼럼

양심이 있는 사회인가? 양심세력은 다 어디 갔나

by anarchopists 2019. 12. 1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9/29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양심이 있는 사회인가?
- 양심세력이 필요하다-


세상이 어지롭게 돌아간다. 현실적으로 한 사회의 질서를 잡아줘야 할 정치를 보면 더욱 실감한다. ‘올바로 다스린다’는 ‘정치’의 원래 의미와는 동떨어진 정치적 행태가 판을 치는 현실 속에서 우리 사회는 어떤 기준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옛날이나 이슬람 국가들처럼 신정(神政) 체제 같으면 간단하다. 하늘(天)이나 신을 바라보면 된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있지만 불신자도 있으니 보편적이지 않다. 그 신까지도 왜곡되고 잘못 전달되고 있는 판이다.

도대체 이 사회에 통용되고 적용할 상식과 양식의 근원과 기준은 어디에서 찾아야하나.
옛 시대에는 종교의 계율(계명)에서 찾았다. 한국고유전통에도 8조금법, 세속5계 등에서 보편적인 윤리가 들어있었다. 살인, 도둑질, 거짓말, 음행 등을 경계하는 계명들을 살펴보면 다 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기본적인 덕목들이다. 유가의 기본인 인의예지(仁義禮智), 삼강오륜 같은 것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되살릴 가치가 있다. 그러나 종교적 계율은 강제성이 없고 그 적용에 한계가 있다.

결국 이 사회의 질서는 세속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 성문화된 문서를 찾는다면 헌법을 마지막 권위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헌법도 제대로 준수하지 못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현행 (개정)헌법 기초자에 의하면, 헌법(10, 34, 36조)에 사회민주주의의 핵심인 복지가 분명히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현 정권에서 지켜지거나 실천이 안 되고 있는 것은 누구 책임인가. 법은 종교의 계명처럼 (이 시대에 계명대로 사는 신자나 성직자가 있는가?) 피해가는 대상인가? (과거 두 정권에서는 복지가 많이 신장되고 역점이 주어졌었다.) 세상에 없는 헌법재판소까지 있는 나라인데 어찌된 일인가. 이제 와서 복지가 어떻고 야단법석이다. 그 일환으로 학교 점심급식이 문제가 돼서 서울시장이 물러나고, 그 직후 교육감이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나 법원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문제다. 여태까지의 행적이 이를 뒷받침한다. 진보적 의식을 가진 교육감들에 의해서 모처럼 교육개혁이 시작되려고 하는 시점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다.

양심’은, 어원으로 보면, 선천적으로 주어진 품성(稟性)이다, 중국 유학에서 맹자와 왕양명이 강조한 ‘양지(良知)’는 그냥 좋은 지식이 아니다. 천리(天理)이며 타고난 천품(天稟)이다. 성선설(性善說)과 같은 맥락이다. 영어에서 좋음(good)은 신(God)에 연유한 것처럼 양(좋음)도 하늘이나 본성까지 간다. 신은 양심을 통해서 인간이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수단을 제공한다. 서양문화에서도 ‘양심의 소리’는 ‘신의 목소리’로 간주된다. 칸트의 도덕성처럼 양심도 보편적인 덕성으로서 다루어지고 혼자 간직하기보다 사회적으로 발현되어야 한다. 양심을 중시한 함석헌도 모든 사유의 근원을 하나님에 둔다. 창조/진화의 과정에서 먼저 몸, 감각기관, 의식이 차례로 생기고 나서 양심 그리고 이어서 영의 층이 형성되는 식으로 창조되었다고 분석한다. 양심을 인간의 근원적인 바탈로 인정한다.

비폭력의 성자 간디도 “양심은 깨우쳐야 되는" 것으로 (Conscience has to be awakened) 본다. 누구나 다 양심을 깨우쳤다고 말할 수 없다. 깨우치기 위해서 준수할 법칙들이 있다. 양심은 그냥 발휘, 표출되는 게 아니고 훈련과 수련을 통해서 일깨워진다고 말한다. 어린 아이에게 양심이 있다고 즉 일깨워졌다고 보지 않는다. 원래 인간에게 주어진 신성이나 불성(佛性)처럼 양심도 닦아내야 한다. 한국인 특히 요새 젊은이들이 언제 양심을 닦을 시기가 있었던가. 오로지 입시만을 위한 정보와 지식 흡수에만 몰입되어있다.

법관의 양심이 어떤 수준인가는 판결을 통해서 여실히 들어난다. 최근 한 가지 판결은 병역을 거부한 양심수 사건이다. 예상외로 양심적 병역거부는 불법으로 판정이 났다. 세계의 대세를 거스르는 그야말로 비양심적인 판정이다. 자유민주국가라면 종교의 자유처럼 양심의 자유도 주어져있다고 봐야한다. 병역거부는 간디와 톨스토이의 비폭력 운동에서 당연하게 중시하는 운동이다. ‘죽이지 말라’(不殺)는 계명으로 나타난 비폭력 정신은 개인에게만 아니라 집단에도 적용될 때 세상에 평화가 올 것이다. 그렇다고 거부자들이 그냥 복무를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군대 이상으로 더 오래 부과하는 대체 복무를 하겠다는 것이다. 독일 같은 선진국은 물론 대만도 대체 복무제를 허용하고 있다. 국제적인 상식 수준에 못 미치는 우리나라 법관의 의식수준, 양심수준이 다시 들어났다. 그 많은 종교, 종파는 반계율적, 반종교적 판결에 항의 한 번 하지 않는다. 참다운 종교가 못 된다는 증거다.

또 하나의 사건은, 한 해군 장교가 군수 관련 입찰 비리를 폭로하여 표창커녕 예편을 당한 일이다. 동료로서 함께 근무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이유에서란다. 조폭처럼 집단이익의 사수다. 내부자 고발을 보호하는 장치 하나도 없는 사회가 부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뻔한 이치다. 사회적 양심이 설자리가 없다. 관련 입법 하나 하지 못하는 국민대표 집단은 뭐하고 있나. 이들도 부패 고리에 묶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부자 고발은 과거에도 육군 장교(이기문 중위)와 감사원 (이문옥 감사관)이 보여준 역사가 있다. 그 동안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는 것은 정경유착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준다. 이 어두운 사회를 밝히기 위해서는 양심을 일깨운 개인들이 뭉쳐서 양심세력을 형성해가는 수밖에 없다. 내부 비리를 고발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사회에 필요한 양심세력이다.

양심은 우리 사회에서 특히 지성인, 사회지도층에게는 공중에 떠다니는 실체 없는 말의 범주에 속한다. 사랑이니 정의니 공정, 공의(公義)니 이성(理性)이니 상생, 공생(共生)이니 하는 개념들도 이 범주에 든다. 실체 없는 추상 언어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 학자들이 가지고 노는, 국민을 우롱하는 말일 뿐이다. 양심세력의 강화가 필요하다. 정의론 책만 읽고 혼자 생각할 일이 아니다. 사회적 세력으로 결집해서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사회정의에 목말라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은 백만 명이 양심 세력이 된다면 근본적인 사회개혁으로 진행할 수 있다.

평균 소득만 높다고 선진국, 중진국이 될 수 없다. 생산지수(GNP)보다 행복지수(GNH)와 청렴지수로 국가발전 수준이 평가되어야 한다. 사회가 바로 되려면 옛 윤리도덕이 시대에 맞게 새롭게 복원되던가, 함석헌의 주장처럼 전혀 새로운 윤리가 나와야 한다. 하지만 어느 것이나 시간이 걸린다. 그 어간 과도기에 기댈 것은 법과 양심이다. 그런데 헌법조차 지켜지지 않는 판에, 마지막으로 양심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사회 양심을 보존, 함양하는 제도를 마련해야할 정치는 먼저 타락해버렸다. 서울시장 선거에 여당후보로 나선 의원은 부정하게 운용된 한 사학재단 가족이란다. 그래서 잘못된 사학법 만드는데 앞장 섰던 것이 들어났다. 지금 세계에 유래 없는 학교사유화로 교육이 근본부터 망가져있는 위기상황이다. 또 잘못하면 내년 대선에서는 나라를 배신하고(친일), 나라를 도둑질한(쿠데타) 군인의 자녀가 당선될 지도 모른다. 불의의 바통 넘기기다. 굳이 부녀를 연루할 생각은 없다. 연좌제도 없어진 판에 그래서도 안 된다, 다만, 두 경우에 아버지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깨끗한 공인으로 새 길을 가겠다는 양심선언이 있을 때에야 자기 정체성을 갖는 독자적인 정치인으로 용납될 수 있을 터이다.

양심은 ‘민족의 생명줄’이다. 그 생명줄이 전태일, 장준하, 문익환 같은 깨어난 양심으로 이어졌다. 이제 그 바통을 받은 김진숙이 부산에서 높은 양심의 푯대 위에 앉아서 그 끈을 붙들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안철수, 박원순 같은) 양심적으로 살아온 인사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무리하게 구속된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경우, 당선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후보단일화를 중재한 시민 단체가 이미 박교수의 사퇴를 조율한 상태였으므로) 그의 부조(扶助) 행위는, 함석헌도 지적했듯이, 이 사회에서 점점 없어져가고 있는 인정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이는 동시에 맹자가 말한 4단(仁義禮智))의 첫 덕목인 인(仁) 즉 측은한 마음(惻隱之心)의 발현이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참지 못하는) ‘차마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의 발로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시대에 드문 양심과 인정머리를 함께 보여준, 더구나 학자로서는 더욱 드문 사람일 수 있다. 이 시대의 희귀종인 양심을 가두어 놓는 정부와 검찰, 스스로는 양심도 인정도 없으면서 남의 양심까지 빼앗는 무심 무정한 기관임을 만천하에 다시 한 번 알려주는 사건이 될지도 모른다. 이 사회의 정의와 양심이 어디에 있는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제 모두 다시 촛불을 켜자. 양심의 촛불을. 혼자서는 이 어두운 사회를 밝힐 수 없다. 양심 세력을 키우고 뭉쳐야 산다. 돈보다 양심세력이 필요하다. 정치, 종교, 언론, 교육이 다 타락하고 법이 지켜지지 않는 나라에서 그것만이 길이다. 양심 있는 사회라야 산다. (2011. 9.29, 김영호)

김영호 교수님은
인하대학교 명예교수다. 선생님의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에서 영향을 받은 다원주의다.

선생님은 늘 사회변혁을 갈망하였다. 하여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979)에 간여하였으며,『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지낸 바 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부회장 학술위원장직을 거쳐 함석헌학회 학회장을 맡고 있다.(2011년 8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 본문 내용 중 그림은 경향신문 2008년 4월 24일자에서, 사진은 오마뉴스에서 따온 것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