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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에너지 비극의 탄생, 종교의 부유에도 있다.

by anarchopists 2019. 12. 1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9/22 06:26]에 발행한 글입니다.


가난한 에너지 비극의 탄생,
생태적 종교의 요청이다!


지난 9월 15일 정전사태(停電事態)가 발생했다. 엘리베이터 가동 중단, 산업시설 전력 공급 중단, 요식업계 상업 행위 마비 등 이른바 ‘블랙아웃’(black out)이 된 것이다. 그에 따라 매스컴에서 보도되고 있는 에너지 공급에 대한 위기는 국가적 차원뿐만 아니라 시민들 개개인의 삶에 직접적인 불안을 야기했다. 에너지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원인에 대한 분석과 대책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에 의해서 다각도로 논의되었다. 보다 더 확장된 예상 사태에 대한 논의 중에 ‘토털 블랙아웃’(total black out)이 발생한다면, 수돗물 공급 중단, 가스 공급 중단, 가로등․신호등 무용지물, 빌딩 전기시설 공급 중단, 백화점․대형마트․편의점 영업 중단, 은행 거래 시스템 중단, 휴대전화 사용 불가, 인터넷 접속 불가, TV․라디오 수신불가, 비행기․철도 운행 중단 등 실로 인간의 생활 불능 상태가 초래된다는 가상 시나리오를 내놨다.

그러나 문제의 논점은 (원자력)발전소를 더 짓는 방향으로 가고자 하느냐 아니면 그럼에도 개인과 사회 공동체가 에너지 절약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고 깨어서 그 본질에 대한 불순한 생각들을 저지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삶의 방식에서 돌이킬 수 없으니, 더 많은 에너지와 더 좋은 에너지의 환경 속에서 살아야만 하니 가급적 피해가 적거나 보상을 위한 저항이 약한 지역을 목표로 선정하더라도 발전소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기적인 발상은 정책 입안자들보다 더 없이 불순하지 않은가.

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최소한의 피해라는 것은 없다. 또한 최소한의 피해 지역이라는 것도 없다. 어느 지역이든 그곳은 곧 같은 땅에서 살면서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자연에게 생채기를 낸 우리가 함께 떠안아야 하는 고통의 몫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고통이 다가오기 전에 그 고통을 내다보고 예방하는 문제는 결국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에서 출발한다. 게다가 전기(電氣)라는 것은 단순히 에너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명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인간사의 중요한 집적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업 문명이 만들어 놓은 생산품을 소비하고, 소비로 인해 발생하는 에너지의 문제는 자본이 기술에게 피드백을 한 것이고, 다시 그 피드백을 통해서 산업 문명이 돌아가는 것이니, 그 피드백의 결과가 에너지의 과잉 소비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했던 함석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근세의 과학이 발달하고 기계가 발명이 되어 공업이 일어남에 따라 사람들은 기술을 퍽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인간화가 발달될 것은 물론 기술이 발달된 것입니다. 언제든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기술은 인격의 발현이라는 것입니다. 기술 뒤에는 언제나 인격이 있어서 그 기술을 부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술을 존중하게 된 현대는 인격은 어느 덧 잊어버리고 기술만이면 되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인간혁명〉, 《함석헌저작집》 2권. 한길사, 2009, 235쪽, 이하 저작집).

필자는 에너지 과잉 소비의 원천을 단순히 자본에게만 떠넘기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종교가 먼저 (신앙)생활의 패턴을 생태영성적으로 바꿔 가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종교시설은 참으로 많다. 전국에 있는 개신교 교회만 하더라도 약 6만여 개가 있다고 하는데, 가톨릭, 불교 등의 종교를 비롯하여 소수 종교 단체 시설까지 포함한다면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따라서 그 종교시설에서 에너지를 절약하는 방식을 모색해야만 한다. 일례로 교회 십자가의 네온사인만 하더라도, 한 달에 200Kw를 소비한다고 한다. 전국 개신교의 규모로 환산해보면 1년에 약 120억 원이라는 교회 예산을 낭비하는 셈이다. 교회 종탑을 붉게 또는 희게, 심지어 나이트클럽처럼 초단위로 색깔이 바뀌는 네온사인을 통해 교회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선교를 위한다는 발상도 그 효과면에서 볼 때 별로 의미가 없다.

영성(spirituality)이란 본래 종교가 갖고 있는 정신성, 영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것을 말함인데, 그리스도교의 경우 예수를 닮고 하나님의 영의 의지 혹은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일컫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성이란 개인적인 인격 발달뿐만 아니라 인간이 관계적인 존재로 살아간다는 뜻을 품고 있다. 종교의 본래 정신을 보면, 가난, 무소유, 자비, 사랑, 인, 무위자연 등인데, 이것은 본디 출가 수행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정신적 가치나 영적 가치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일반적인 사람들도 재가 신도가 아니면 출가 신도인데, 종교의 본질대로 혹은 자구대로 살아가는 것은 출가 신도에게나 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밀어버린다. 그리고 재가 신도들은 출가 신도들의 삶을 보고 대리만족과 위안을 삼으며 자신들은 보다 나은 삶을 향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성 혹은 종교의 본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은 출가 신도만의 것이냐 아니면 재가 신도만의 것이냐 하는 경중을 나눌 사안이 아니다. 이것은 에너지를 절약하고 여타의 발전소를 신축하는 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재 에너지가 가난하게 된 원인에는 종교의 부유가 한몫을 하고 있다는 자기 성찰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더 나아가서 에너지가 가난하게 된 것은 국민들 전체가 에너지 과잉 소비를 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가 가난하다는 인식에 눈을 감아버리고 만다면, 에너지는 가난하다 못해 에너지의 기근과 고갈 상태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에너지는 가난해야만 한다. 종교의 몸집도 가난해야 하지만, 종교의 몸집에 비해 터무니없이 많이 사용하는 에너지를 가난하게 해야 한다. ‘에너지의 가난한 사용 운동’은 종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교회 몸집 구조를 보면, 몸집 전체가 전기 배선으로 이루어져 있고(초월자는 전기 배선으로 둘러 싸여), 어느 곳도 전기를 통해서 에너지원을 공급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건축 구조로 되어 있다. 요즈음 사찰도 편리한 전기시설 없이는 수행을 할 수가 없는 구조가 돼버렸다. 가톨릭도 몸집이 커지면서 에너지를 더 많이 필요로 한다. 사람들이 자기의 권위, 우월성, 폭넓은 인맥 등을 갖기 위해서지만, 시원한 에어컨에, 따뜻한 히터가 없으면 좋은 종교라도 얼씬도 하지 않으려는 심리 때문일 것이다. 영성도 편리성을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올겨울, 결단코 에너지 대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지금도 지하철과 버스, 그리고 학교에서는 추위를 느낄 만큼 차가운 에어컨이 쓸데없이 나온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추울 때는 추워야 하고, 더울 때는 더워야 한다. 이 단순한 계절의 이치와 순리를 역행하고자 애쓰는 행위는 지구와 에너지에 대한 진정한 배려 혹은 마음씀(fürsorge)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한 그에 따른 피해의 몫은 고스란히 우리 인간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제 종교도 미사나 예배, 혹은 법회 때에 반 정도만 전기를 사용하는 semi-electric religion 혹은 거의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시스템의 non-electric religion을 구상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 모든 문명의 결국은 뭐냐 하면 편하자는 것입니다. 노력에서 해방, 병에서 해방, 거리와 시간의 단축, 시청각을 통한 매스컴 오락, 다 편하고 재미보자는 것입니다. 생물로서의 인간에는 생물의 법칙에 의해 자연히 일과 즐거움이 자동적으로 조화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함으로써 일은 아니하고, 혹은 될수록 적게 하고 즐거움만 맛보려는 데서 가지가지의 문명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본래의 대조화를 깨뜨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그 오염의 근본 원은 어디 있습니까? 대기오염, 일광오염, 식수오염이 있기 전에 정신오염이 먼저 되어서 그 결과로 이것들이 온 것입니다. 옛날에 벌써 악마는 도시를 만들었다 할 때 문명으로 인해 정신이 썩어지는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물질세계는 그 세계의 법칙에 따라 알 수 있는 데까지 아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만 뜻 찾기를 그만두고 즐거움이 있을 것처럼, 정신을 내놓고 기술만으로 가치의 세계에까지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 데가 잘못입니다. 지금 당하는 문제는 그 잘못에 대한 자연의 복수입니다. 정신의 오염을 씻지 않는 한, 기술로 오염 문제를 아무리 해결하려 해도 아니 될 것입니다”(〈인간혁명〉, 저작집, 246-248쪽)(2011.9.22., 김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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