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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도가니 유감, 그리고 인간의 정신적 장애

by anarchopists 2019. 12. 1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0/06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도가니 유감:
인간의 왜곡된 인식의 결과, 장애인 폭력

“종교란 뭔고 하니 인간의 이 평등하지 않게 타고난 걸 그걸 ‘좋다’, ‘나쁘다’, ‘언짢다’ 하는 걸 없애도록 가르치려는 거예요. 사람들이 잘못되는 게 뭔고 하니 타고난 것에다 고하(高下)를 붙여요. 잘 타고났다. 못 타고났다. 하나님께선 잘잘못이 없어요. 이 천지만물을 내시는 하나님의 그 뜻으로 하면 소나무는 소나무로 난 거고 꽃다지는 꽃다지로 난 거지. 대소가 거기 비교가 안 된단 말이오. ‘곱다’, ‘밉다’도 비유가 안돼요. 그 자체에서 보면 ‘좋다’, ‘언짢다’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은 다 똑같은 값이다. 평등이다 그 말이오. 하나님 내시는 마음씨에는 차별이 없어요. 맏아들도 좋다. 둘째 아들도 좋다. 병신자식도 좋다, 그거 차별이 없어요. 꼭 같지. 우등을 하고 갔거나 낙제를 하고 왔거나 차별 없이 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지. 만일 공부 못하고 온 자식보고 아버지가 “넌 내 아들 아니다” 그러면 그건 아버지가 아버지 자격 먼저 잃잖아요. [...] 객관적인 우리 눈으로 보면 잘 타고난 사람 못 타고난 사람 차별이 있지만, 이 차별은 우리 눈에 보이는 차별이지, 하나님 눈에는 차별이 없다 그 말이에요. [...] 하나님 보시기엔 다 똑같은 거요. 하나님 어떨는지 내가 모르지만 우주 근본에서 볼 때는 차별이 없어요. 차별이 있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은 내가 잘못 생각해 그렇지, 무슨 힘이 강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내 욕심 때문에 차별이 생긴 것이지. 그러니까 그거를 없애는 자리까지 가는 것을 우리가 힘쓰지 않으면 안돼요.”(
함석헌전집 19, 영혼의 뱃길, 한길사, 1985, 179-180)

도대체 도가니의 문제는 무엇일까? 교사의 (성)폭력이 가지고 온 파장, 그것은 정상과 비정상의 가름, 그로 인한 비정상인에 대한 훈육과 통제를 통한 사회로부터의 격리, 수용이라는 결과가 가지고 온 폐해가 아닐까? 물론 도가니 사건은 격리 수용시설에서 빚어진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다름’이라는 인식의 문제는 ‘틀렸다’라는 극단의 편 가름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틀린 것은 교정해야 하거나 교정이 안 된다면 격리, 감시, 통제해야 한다는 역사적 양식을 고스란히 답습한 현상을 반영한다.

일찌감치 이러한 시선의 폭력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한 이가 바로 미셸 푸코(M. Foucault)다. 교실 안에서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을 학생들이 잘 암기하고 숙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교사는 학생의 지식과 내면을 바라보며 감시한다. 교사는 시험이라는 폭력을 통해서 자격을 부여하고, 분류, 처벌, 감시, 규격화한다. 이른바 학습 부진아는 따로 관리, 통제, 교육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시선은 정당한 것일까. 노인의 발걸음은 당연히 젊은이들의 발걸음과 비교해볼 때 활력과 속도 면에서 뒤떨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장애라 여기지 않는다. 다만 노인의 폐활량, 근육의 힘과 뼈의 밀도, 심장박동 등이 약화되었을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노안(老眼)이 오고 청력이 약해지는 것도 몸의 기능이 다 되어가고 있다는 자연스러운 신호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않은 사람의 차이는 몸의 ‘기능’ 즉 시력의 기능 상실, 청력의 기능 상실, 수족의 기능 상실, 사고 능력의 기능 저하 등 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나서 단지 불편할 뿐이다. 장애(disabled people)는 있어도 무능력자(inability)가 아니라는 말이다.

환자 즉 병에 걸린 사람은 격리해서 수용해야 하고, 병에 걸린 동물도 도태시켜야 하고, 인간의 죽음조차도 나의 죽음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조작, 인위적 의탁을 해야 하는 세상은 이미 ‘바리사이(바리새파, 신앙의 정결을 강조하여 부정을 죄로 인식함)적 세계’가 된 것이다. 정결과 부정의 인류학적 인식, 정체성으로 인한 피아의 구분은 공동체 내적으로는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반대로 배타성을 띠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자신과는 이질적이거나 해롭다고 생각되는 존재자를 어떻게 제거해나가는지 소외의 고고학을 치밀하게 분석해 낸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보라!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도가니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그 사건이 발생한 학교의 학생들과 교사와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는 안과 밖, 정상과 비정상, 구교와 신교, 남과 여, 백과 흑,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 등을 끊임없이 구분하기 좋아하는 인류 역사의 오랜 인식이요 고질적인 관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2천 년 전의 예수는 그러한 영지주의적, 이분법적 삶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려고 하였다. 당시의 율법이란 정상과 비정상, 선과 악, 의인과 죄인을 가르는 중요한 잣대였다. 또한 율법 해석으로 밥을 먹고 살면서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약자를 억압하는 율법학자들은 인간 그 자체의 진면목을 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율법의 기준에 따라 거룩한 자와 죄인을 판단했다. 율법은 가만있지만 율법을 해석하는 사람의 입장 혹은 학파(예컨대, 힐렐학파, 샴마이 학파 등)의 이론(주관)은 가지가지였기에 그 불편부당함은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예나 지금이나 법은 약자의 편이 아니질 않는가). 예수는 그로 인한 고통으로 신음을 앓고 있는 약자(병자, 어린이, 과부, 창녀, 세리, 빈자 등)들을 해방키시고자 노력하였으니, ‘사랑’이면 장땡이라는 그야말로 탁견을 고심 끝에 내놓았다.

사랑은 나와 너(혹은 그것), 정상과 비정상, 장애와 비장애 등을 뛰어넘고 세계를 통합한다. 움베르토 에코(U. Eco)가 마르티니 추기경과의 대화에서, 자연적인 윤리와 초월적인 윤리의 공통점은 “이웃 사랑과 깊은 사려”라고 말한 것도 사랑을 통한 타자의 윤리적 고려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지를 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나의 있음(영혼)은 타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폭넓은 범주 속에서 보면 장애가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모두가 상호주관적 존재, 타자 없이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게 해준다(U. Eco, “타자가 등장할 때 윤리가 생긴다”, 움베르토 에코와 마르티니 추기경과의 대화, 이세욱 옮김, 무엇을 믿을 것인가, 열린책들, 1998, 122-131).

도가니 사건이 발생한 학교의 교육이념은 “그리스도”에서 출발한다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장애를 갖지 않은 교사와 장애를 갖고 있는 학생들 사이의 감정적 교류와 윤리적 이념은 그리스도교 정신에서 나온 것이리라. 당연히 사랑을 실천적 덕목으로 했어야 마땅한 것이다. 종교철학자 존 힉(John H. Hick)은, “아가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며, “우주적”이라고 말한다. “이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이 특별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 사람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 피조물들로부터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도덕적 요구를 암시하고 있다.”(John H. Hick, 김희수 옮김, 종교철학, 동문선, 2000 4개정판, 28-29)


그리스도교적 설립 이념을 가진 학교가 그 무조건적인 도덕적 요구를 외면하고 장애를 갖고 있는 학생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사실, 그래서 단지 그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 응당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실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시선으로 보면, 차별은 ‘절대로’ 없다. 그분에게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다. 함석헌의 말대로 차별을 없애자고 한 것이 종교일진대, 유독 사람만이 똑같은 존재를 구분하고 구별하려고 한다. 그 사건이 벌어진 학교가 그리스도교의 이념에 따라 설립한 학교라면 당연히 신의 실재를 드러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종교에 대한 철학적 입장이 아니더라도 “신의 비실재를 생각할 수 없음”(Kurt Wuchterl, 이기상 옮김, 철학과 종교, 서광사, 1988, 76-82)을 알게 해주는 것은 논리적인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라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도가니의 문제는 뿌리 깊이 잠재되어 있는 가름, 편 나누기, 자기보호에서 시작된 것이다. 도가니는 장애를 가진 사람의 시선과 장애를 갖지 않은 사람의 시선이 같지 않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시선은 타자와의 관계이고, 나와 세계를 맺어주는 매체이지만, 바라보는 자는 권력자이자 주체이고, 보라보이는 자는 권력에 종속된 자이자 대상이 된다. 따라서 도가니는 장애를 갖지 않은 교사라는 권력자가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나누며, 조작하고 통제, 관리하는 노예로 삼은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도가니적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통제 속의 통제, 관리 속의 관리, 격리 속의 격리라는 부자유한 삶을 사는 우리 자신도 도가니적 존재이거나 잠재적 도가니적 존재이다. 도가니는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중요하지 않다. 도가니 자체가 이미 편견의 존재이기에 선판단적으로 규정된 언어이다. 그러므로 도가니적 존재자들은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오브제(object)에 불과했다. 그것은 철저하게 타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의 말을 명심하라. “타자는 보통의 다른 대상처럼 대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투쟁을 통해 다시 나를 그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즉 지금은 노예지만 언제든 주인이 될 수 있다.”(2011/10/6,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 본문 내용 중 사진은 미디어오늘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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