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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어용학자들이여, 사람이 중요하지 않는가.

by anarchopists 2019. 12. 2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4/2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인류의 사회발전은 민족 내부로부터 축적된 주체적 역량과 외부문화와 교류ㆍ접촉에 의한 창조에 토대한다. 이것이 ‘내재적 발전론’이다. 그런데 최근에 국내 일부 신보수주의 계열의 경제학 연구자들이 근대가 일제의 침략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사망선고를 내린다. 그러나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일제 침략에 의하여 ‘국권상실’, ‘종속경제’라는 상황을 아예 무시하거나 간과한다.

세계화논리에만 눈이 어두워 있을 뿐 조국공동체와 그 운명에 대하여 모로쇠로 일관한다. 심지어는 내재적 발전론을 ‘마르크시즘 사회발전 단계론’으로 몰아붙이는 우(愚)를 범하기도 한다. 즉 식민지가 식민종주국에 의해 ‘원료수탈’과 ‘경제착취기지’로 전락한 것은 문제시하지 않는다.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한국은 일제에 의하여 엄청난 원료수탈과 함께 상품시장으로 전락한다. 일제강점기 단발령의 발동과 호롱불의 보급에서 그 예를 찾아보자.

1895년의 단발령은 구습을 타파하고 근대식 두발형태로 변환한다고 명분을 두었지만 그 내막은 전혀 다르다. 즉 한국인이 장발에서 단발로 바뀌게 되면 네 가지 분야에서 외형적 변화를 보게 된다. 먼저 두발에 쓰는 갓을 버리고 모자를 써야한다. 바로 모자는 근대시대 서양이 썼던 중절모다. 둘째, 단발을 하게 될 경우 한국인의 모발이 강해서 말총머리모양을 하게 된다. 이 말총머리모양을 부드럽게 하려면 머리에 포마드기름을 발라야 한다. 셋째, 단발로 의복의 변화를 보게 된다. 도포를 입는 한복에서 양복으로 바꾸어 입게 된다. 넷째, 도포자락과 갓을 쓴 한국인에게 어울리는 담배는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지만 단발을 하게 되면 짧은 담배(권연卷煙)를 피워야 어울린다. 그러면 중절모, 양복, 권연, 포마드는 어디서 생겨나는가, 당연히 일제에서 수입해야 한다.

그래서 일제가 단발령을 강요한 것은 한국을 일본의 상품시장화하려는 전략적 차원에서였다. 그리고 단발로 부수되는 각종 모자, 양복, 포마드, 담배를 구입하는 화폐는 쌀로 대용하였다. 이리하여 쌀이라는 값싼 원료가 일본으로 유출되어 국내에서는 쌀값이 폭등하였다. 이 때문에 한국은 빈부의 계층분화와 함께 극단적 양극화라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냈다.

한편, 우리나라 인민들이 밤의 어둠을 밝히는 조명기구는 1960년대 전등이 보편화하기까지 반딧불, 관솔불, 횃불, 촛불, 등잔불, 호롱불, 전기불 등 다양하였다. 여기서 잠시 이해를 돕기 위해 조명기구의 역사를 간략히 보자. 조선시대 이전까지 조명기구로 귀족은 촛불을, 서민들은 관솔불을 주로 이용하였다. 그러다가 기름을 사용하는 등잔이 보편적으로 이용된다. 등잔은 한반도 고대 네 나라(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시대 중국 양나라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인다.

등잔의 형태는 호(壺)형과 종지형으로 구분한다. 종지형 등잔은 19세기말 호형 등잔이 나오기 전까지 일반적인 조명기구로 역할 하였다. 종지형 등잔에 사용되는 기름은 식물성기름(호마유胡麻油, 들기름, 콩기름, 아주까리, 동백기름), 동물성 기름(돼지기름, 굳기름), 생선기름(상어, 고래(鯨油), 정어리) 등이었다. 그리고 기름을 흡수하여 불의 소연체가 되어주는 심지는 솜(綿), 삼실(麻絲), 한지(韓紙)등을 이용하였다. 그러다가 1876년에 우리나라에 석유가 들어온다. 석유기름은 화력이 강하여 밀폐된 기름통을 필요로 했다. 그리하여 밀폐된 용기에 직접 불을 붙이는 호형 등잔이 나온다. 석유를 사용하는 호형등잔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등잔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가 일제 식민지기에 호형 호롱불이 들어온다.

이것은 호형등잔이 바람에 꺼지는 단점을 보완하여 불을 보호하는 유리(일본식 용어로 호야{등피}라 하였음)를 호형등잔에 부착하고 벽에 거는 벽걸이장치도 하였다. 이것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호롱불이라고 한다. 그런데 호롱불은 외형상 매우 편리한 조명기구로 보이지만 그 내면을 보면 첫째, 불을 켜기 위한 성냥이 필요하다. 둘째, 모세관현상에 의해서 호롱의 기름통에서 석유를 빨아올리는 섬유다발을 심지라고 하는데 섬유로 된 심지를 자주 교체해야 한다. 셋째, 호롱의 호야는 석유불의 매연가스에 쉽게 그을린다. 그러면 불빛이 약해져서 호야를 닦아야 하는데 이 호야가 잘 깨진다. 넷째, 불의 소연체인 석유가 필요하다.

즉 호롱불이라는 조명기구를 쓰려면 호롱, 성냥, 석유, 심지, 호야 등 다섯 가지 재료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소모품은 모두 당시 국내생산이 안 되므로 일본에서 수입을 해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대금은 주로 쌀로 지불하였다. 따라서 이 호롱불이라는 문명의 이기라는 그 이면에 일본 자본주의 침략과 상품시장화 그리고 쌀이라는 값싼 원료의 수출로 우리나라는 쌀의 부족현상으로 쌀값의 폭등한다.


따라서 일제침략기 문명의 이기(근대적 문명)가 우리 생활 속에 침투하면 할수록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 종속경제로 계속 빠져 들어갔고 그 만큼 사회적 양극화라는 사회구조의 골은 깊어만 갔다. 결국 한국의 일제 식민지화는 일제의 자본주의 성장에 한국의 경제적 희생을 바탕으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보수진영 경제학자들의 식민지근대화론은 인간보다 물질에 근거를 둔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논리는 박정희가 경제성장을 위하여 한국인의 인권을 짓밟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천박한 물질주의 추종자(독재근대화론자)들의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천박한 물질주의 때문에 한반도의 인간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못 받고 자연이 자연답게 대접을 못 받는 나라가 되지 않았는가. 21세기 ‘인문주의 부흥시대’로 가는 길목에서 반성해볼 일이다. (2007. 3. 6 초고, 2011 4. 25 다시 씀, 취래원 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 본문 내용 중 사진은 글의 내용과 관계없음. 인터넷 네이버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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