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5/02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오늘부터 일주간은 4월 30일 연세대(신촌) 용재관 304호실에서 있었던 2011년 함석헌학회 춘게 학술대회에서 있었던 발표논문 일부를 싣습니다. 이번 주는 전남대 명예교수 김영태님의 글을 올립니다.- 운영자 드림]
Ⅰ.들어가는 말
함석헌(1901-1989)의 사상은 한국 근현대사의 고난의 역사 한복판에 선 그의 혼의 용광로 속에서 다양한 요소들이 통전되어 하나의 독특한 생명사상, 역사철학, 종교적 사회운동으로 꽃피어 난 것이다. 함석헌의 구성적 요소들의 중요한 계기와 문제의식을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기(1901-1922). 평북에서 낳고 자라면서, 오산학교시절 유영모와 이승훈을 통해 그의 청소년기에 흡수한 기독교적 섭리사관과 예언자 사상 및 예수의 갈릴리 신앙이 기본 배아를 이룬다. 인간의 삶과 역사적 삶이란 인격성과 책임성을 동반하는 것이라는 것, 제2이사야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고난의 종의노래’, 특히 일제식민통치하의 한민족의 고난의 현실문제에 대한 근원적 사색의 기간이었다. 소년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청장년기(1923-1945). 일본 동경사범고등학교를 졸업하고(1928) 모교 오산학교에 역사교사로서 부임하였다. 일본유학기간동안, 일본 무교회 성서주의자 우찌무라의 순수 종교개혁신앙에 영향을 받았고, 사상적으론 H.G. 웰스의 세계문화사, 앙리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사상, 근대 이탈리아의 민중중심의 공화정치사상가 쥬세페 마찌니의 영향을 받았다. 청장년기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김교신의 『성서조선』에 연재하고 후에 단행본으로 출판된『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50) 즉,『뜻으로 본 한국 역사』(1961)이다.
창조적 활동기(1946-1984). 1947년 남하한다. 그 이후 약 40년 동안 함석헌은 해방정국과 제 1, 2, 3, 4, 5공화국 시대에 ‘조선의 들사람’으로서 창조적 활동을 펼친다. 몇 차례 옥살이를 하면서 그의 사상은 심화 확장된다. 특히 민족상잔의 6∙25전쟁을 거치면서 함석헌은 제도적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선다. 노장사상, 불교사상, 힌두교 바가바드기타 경전연구, 간디연구, 생물학자 가톨릭 신부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사상을 흡수 통전시킨다. 이 기간에 무교회와 결별하고 세계 퀘이커교인이 된다. 대표적 논설문으로서「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사상계. 1958.8),「5∙16을 어떻게 볼가?」(사상계, 1961.7), 「썩어지는 씨이라야 산다」(씨의소리, 1970.4)등이 있다. 그의 방대한 사색의 결과물은 전집 30권으로 엮어져 문자로 보존되었다.
말년의 정리기(1985-1989). 세계 퀘이커연맹에 의하여 두 번이나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된 바 있다. 장공 김재준 목사와 함께 재야민주세력의 두 기둥이 되어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였다(1987. 1월). 주위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승적 입장에서 제24회 서울 올림픽 평화대회 위원장직을 수락하였다. 1989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담도암으로 투병 중 소천하였다.
함석헌의 사상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연구되고 조명되어야 한다. 역사철학자로서, 종교사상가로서, 시민교육과 운동가로서, 시인과 우리말 선양자로서, 생명사상가로서, 언론인으로서의 면모 등이 대표적 관점이다. 그의 다양한 모습과 업적 중에서도 본고는 그의 윤리사상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2011. 4.30, 김영태, 내일 계속)
[오늘부터 일주간은 4월 30일 연세대(신촌) 용재관 304호실에서 있었던 2011년 함석헌학회 춘게 학술대회에서 있었던 발표논문 일부를 싣습니다. 이번 주는 전남대 명예교수 김영태님의 글을 올립니다.- 운영자 드림]
信天翁 함석헌의 윤리사상 고찰
Ⅰ.들어가는 말
함석헌(1901-1989)의 사상은 한국 근현대사의 고난의 역사 한복판에 선 그의 혼의 용광로 속에서 다양한 요소들이 통전되어 하나의 독특한 생명사상, 역사철학, 종교적 사회운동으로 꽃피어 난 것이다. 함석헌의 구성적 요소들의 중요한 계기와 문제의식을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기(1901-1922). 평북에서 낳고 자라면서, 오산학교시절 유영모와 이승훈을 통해 그의 청소년기에 흡수한 기독교적 섭리사관과 예언자 사상 및 예수의 갈릴리 신앙이 기본 배아를 이룬다. 인간의 삶과 역사적 삶이란 인격성과 책임성을 동반하는 것이라는 것, 제2이사야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고난의 종의노래’, 특히 일제식민통치하의 한민족의 고난의 현실문제에 대한 근원적 사색의 기간이었다. 소년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청장년기(1923-1945). 일본 동경사범고등학교를 졸업하고(1928) 모교 오산학교에 역사교사로서 부임하였다. 일본유학기간동안, 일본 무교회 성서주의자 우찌무라의 순수 종교개혁신앙에 영향을 받았고, 사상적으론 H.G. 웰스의 세계문화사, 앙리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사상, 근대 이탈리아의 민중중심의 공화정치사상가 쥬세페 마찌니의 영향을 받았다. 청장년기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김교신의 『성서조선』에 연재하고 후에 단행본으로 출판된『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50) 즉,『뜻으로 본 한국 역사』(1961)이다.
창조적 활동기(1946-1984). 1947년 남하한다. 그 이후 약 40년 동안 함석헌은 해방정국과 제 1, 2, 3, 4, 5공화국 시대에 ‘조선의 들사람’으로서 창조적 활동을 펼친다. 몇 차례 옥살이를 하면서 그의 사상은 심화 확장된다. 특히 민족상잔의 6∙25전쟁을 거치면서 함석헌은 제도적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선다. 노장사상, 불교사상, 힌두교 바가바드기타 경전연구, 간디연구, 생물학자 가톨릭 신부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사상을 흡수 통전시킨다. 이 기간에 무교회와 결별하고 세계 퀘이커교인이 된다. 대표적 논설문으로서「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사상계. 1958.8),「5∙16을 어떻게 볼가?」(사상계, 1961.7), 「썩어지는 씨이라야 산다」(씨의소리, 1970.4)등이 있다. 그의 방대한 사색의 결과물은 전집 30권으로 엮어져 문자로 보존되었다.
말년의 정리기(1985-1989). 세계 퀘이커연맹에 의하여 두 번이나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된 바 있다. 장공 김재준 목사와 함께 재야민주세력의 두 기둥이 되어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였다(1987. 1월). 주위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승적 입장에서 제24회 서울 올림픽 평화대회 위원장직을 수락하였다. 1989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담도암으로 투병 중 소천하였다.
함석헌의 사상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연구되고 조명되어야 한다. 역사철학자로서, 종교사상가로서, 시민교육과 운동가로서, 시인과 우리말 선양자로서, 생명사상가로서, 언론인으로서의 면모 등이 대표적 관점이다. 그의 다양한 모습과 업적 중에서도 본고는 그의 윤리사상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2011. 4.30, 김영태, 내일 계속)
김영태 교수는
종교윤리 전공하였으며 종교분야 연구자임. 전남대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재직(1981~2010), 현재 함석헌학회 이사이며, 한국윤리학회 회장을 맡고 있음. 그 동안 한국종교문화학회 공동대표, 종교문화연구소장 등을 지내면서 윤리학 연구 및 종교간 대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왔음.
그의 저서로는 「John Hick의 종교철학」, 「퀘이커 신비주의에 관한 연구」, 「미국 실용주의의 종교관」, 「칸트의 도덕종교론에 대한 신학적 고찰」 등이 있음. /함석헌평화포럼
그의 저서로는 「John Hick의 종교철학」, 「퀘이커 신비주의에 관한 연구」, 「미국 실용주의의 종교관」, 「칸트의 도덕종교론에 대한 신학적 고찰」 등이 있음.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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