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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사상

함석헌, 진보하는 종교적인 삶

by anarchopists 2019. 12. 2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5/04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학회 2011년도 춘계학술발표 발제문- 한국윤리학회 회장 김영태 교수]


信天雄 함석헌의 윤리사상 고찰

1. 들어가는 말
2. 함석헌의 윤리관
가. 사회분석
나 새윤리관 확립의 필요성
다. 새윤리의 목표
라. 새윤리 사상- 민의 사상
3. 윤리- 종교의 삶
가. 진보하는 종교적 삶

다. 새 윤리의 목표
선(善)이라면 성질상 불변하는 것이어야 모든 행동의 표준이 될 것인데, 그 자체가 변한다면 그것은 선 이외에 또 다른 표준이 있는 셈이기 때문에 선이 아니 된다.
선은 이른바 지상선(至上善)이어서 그 위가 다시 없고 그 자체가 곧 모든 사물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적어도 내용적으로 말하면 고정된 지상선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물론자는 도덕률을 부인하려 한다. 그러나 모르는 말이다. 지상선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상대적인 내용에 붙어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때그때 어떤 내용물을 잡아 선이 되게 하는 그 자체는 선의 내용이 늘 변할수록 엄연히 있는 것이 증거된다.

"그리하여 지상선도 내용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이냐. 즉 다른 것 아니요, ‘전’(全)이라는 것이다. 통일의 목표가 되는 것은 이 전이다. 그런데 전은 아무 내용이 없다. 내용을 초과한 것이 전체다. 전은 부분을 합한 것이 아니다. 부분의 합인 내용으로서의 전은 늘 변한다. 역사가 발달되어감에 따라 사회는 점점 커진다. 그러나 그 어느 때에나 전체란 것이 사람의 모든 도덕행위의 목표가 된 것은 변함이 없다. 어떤 때는 한 집이 전체일 때가 있었다. 그때는 집을 위하는 것이 선이었다. 또 어떤 때는 나라란 것이 전체일 때가 있었다. 그때는 나라를 위하는 것이 최고선이었다. 그 때문에 지상선을 표시하는 덕목은 달라졌다. 혹은 효라 했고 충이라 했다. 그러나 그 본질에서 말하면 언제나 그때에 아는 전체가 개개인의 행동을 규율한 점에서는 다를 것 없다."(
앞의 책, 36~37쪽)

전(全)이기 때문에 또 공(公)이라 한다. 공의(公義)라, 공평(公平)이라 하지만 전체를 위한 것이 공의요, 전체의 입장에서 분배한 것이 공평이다. 공(公)의 반대는 사(私)인데 사는 나다. 부분이다. 부분이 아무리 커도 부분인 이상 공은 못 된다. 이런 의미에서 다수가결이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란 말은 논리적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잃지 않은 구십구수(九十九首)보다 잃은 한 마리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지경을 표시하여 거룩(聖)이라 하는데, 위에서 말한 것 같이 그것도 하나의 뜻이 된다. whole이 holy다. 완전한 전체가 하나로 있으면 그것이 깨끗한 것, 거룩한 것이요, 전체에서 떨어지면 더러운 것이다. 때는 몸에서 떠난 살이요, 속(俗)은 하나님에게서 떠난 인간이다. 그 밖에 정신적 가치라는 진∙선∙미하는 것도 다 같은 뜻이다. 전체가 참이요, 전체가 선이요, 전체가 미다.

4. 새 윤리의 세상: 民의 세상
새 윤리는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윤리다.
그 윤리를 향하는 주인은 누구냐 하면 사람, 민이다. 이제 단순한 인간, 사람, 민(民)의 세기가 온다. 근세 이래의 인류가 당한 모든 어려움은 민 하나를 낳자는 운동이었다. 민은 제가 제 노릇을 하는 사람이다. 제가 제 주인이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짓지 않았고, 사람 아래 사람을 짓지 않았다.”  앞날의 윤리는 민의 윤리, 자유의 윤리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평화의 윤리다. 데모크라시, 즉 민의 정치는 여론의 정치다. 여론은 민, 곧 많은 나의 말이다. 인격의 소리다. 옛날 사람이 말한 민심이라, 천심이라 한 것은 내적∙외적인 구속∙유혹을 받지 않는 양심의 소리가 곧 모든 역사의 결정을 짓는 권위라는 말이다.

“민아, 민아, 네 걸음이 그렇게도 느리냐. 너를 서민이라 하고 하민(下民)이라, 우민(愚民)이라고 해서 업신여기고 학대했지. 지배자라는 그들이 너를 짜 먹고 너를 벗겨 입고 살면서도, 앉을 때는 너를 깔고 앉고, 길을 갈 땐 너를 타고 가고, 높은 데 오를 땐 네 머리를 밟고 올라가고, 놀 때는 너를 삼손처럼 모욕하며 즐겼지.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다음엔 무지막지한 것들이라고 욕하고 쓸어 구렁에 넣었지. 민아, 내가 네게 감탄하는 것은 네 힘줄은 질기고 네 마음은 그것보다 더 질겼구나. 네 생존력의 강함, 네 참을성의 무서움, 너는 마침내 왔구나. 누가 너를 이기겠느냐. 남을 괴롭게 하는 자 아래서 너는 고난을 받음으로 이겨오지 않았느냐. 네가 잘남으로 잘난 것이 아니고, 철저히 못남으로 너는 잘났구나. 너는 고난받음으로 주인됨을 배웠구나.

네가 세기의 그리스도 아니냐. 자신이 죽음으로 남을 살리는, 남을 위해 죽음으로 모든 사람 속에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너의 위대함은 네 스스로의 위대함이 아니요, 역사를 낳는 그이, 그 한 이의 위대함이다. 네 걸음이 더디다 한탄하겠느냐. 날은 속히 네 머리 위에 밝을 것이다.”
(앞의 책,  52~53쪽)

이와 같은 民에 대한 함석헌의 예찬은 제2이사야서에 나타난 고난받는 종(suffering servant)을 연상케 한다. 더 나아가 함석헌의 윤리사상은 환경, 자연, 우주에까지 확대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으로 윤리는 우주 윤리지, 인간에게만 한한 것이 아닐 것이다.… 마음대로 개척하고 정복할 것이라든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라든지, 더구나 적의나 있는듯이 하는 생각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우주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나와 하나를 이룬 한 인격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본래 사람은 우주와 하나였다. 옛적 사람은 온전한 한마음, 통일관념에서 살았다. 만유신론(萬有神論)이니, 서물숭배(庶物崇拜)니 하는 것은 그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우리의 정신이란 그러한 한마음 속에서 자라온 것이다.” (앞의 책, 54쪽)

Ⅲ.윤리-종교적 삶

1. 진보하는 종교적 삶
정치도 진보되어나가고 학문∙예술도 진보되어 나가겠지만, 그보다도 앞으로 진보할 것은 종교로 보고 이상적인 종교의 나라를 넋의 나라, 얼의 나라, 바람나라, 숨나라, 하늘나라, ‘푸뉴마’(pneuma)한 나라의 한 알 나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종교는 이 이상과는 반대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날까지 인류를 이끌어온 것도 종교지만 또 못쓰게 만든 것도 종교다. 종교는 자라나는 인류에 그 순을 꺾고 줄기를 비꼬았고, 제 마음대로 걸어 보려는 그 걸음에, 발목에 고랑을 채우고, 목에 칼을 씌운 일이 많다. 그저 무지도 무섭지만 그릇된 종교 신념으로 비꼬이고 들뜬 마음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역사 위에 가장 고집스런 일을 한 것도 종교요, 가장 더러운 짓을 한 것도 종교요, 가장 끔찍한 꼴을 낸 것도 종교다. 종교는 제가 제 몸을 칼로 찢었고, 제 자식을 제 손으로 불에 던져 죽였고, 제 동무되는 사람의 염통을 따내어 점을 쳤다. 대낮에 남녀가 벌거벗고 춤을 추고 한데 붙어 음란을 하게 한 것도 종교요, 사람을 단으로 묶어 세워놓고 불을 사르고 껍데기를 벗겨 덮개를 한 것도 종교였다. 그뿐인가. 평시에는 백성을 속여 피를 빨고, 살을 긁고, 전쟁이 나면 부채질을 하고, 원시인∙바빌론∙이집트는 말할 것 없고 하나님의 사자가 세웠다고 자랑하는 가톨릭의 역사를 보면 그 지은 죄가 어느 야만, 어느 세속적 국가가 지은 것보다도 더 지독, 더 음험한 것 아닌가.” (앞의 책, 55쪽)


그런데 종교가 몹쓸게 된 것은 종교 그 자체가 아니라 종교를 가진자들의 이상심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모든 잔혹, 악독은 이상심리에서 나오는데, 그 이상심리를 일으키는 것은 종교적 자아분열이다. 오늘날도 종교적으로 열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몰상식한 일을 저지르는가 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회도덕, 사회주의, 세계평화 새 질서 운운하면서 종교에 의한 인격의 분열이라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일이다.”(앞의 책,  56쪽)

따라서 종교인들이 새롭게 태어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정치∙경제∙학문∙예술로 하나되기 전에 먼저 신앙적으로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의 종교를 가질 때 나라를 통일하기는 쉬운 것, 종교가 어떻게 국가 분열의 원인이 되는가를 역사가 잘 증거하고 있지 않나. 국민을 통일하는 종교가 되려면 그것은 인생을 통일하는, 인격을 통일하는, 자아를 통일하는 종교가 아니면 안 된다.” (앞의 책상, 56쪽)

아울러 종교가 거듭나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인들의 각성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바울은 ‘아아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누가 나를 이 죽을 몸에서 구원하랴’했지만 그것은 인류의 소리다. 영과 육의 대립, 이것이 인류 역사의 기조다. 이것을 모르고 애급∙바빌론의 문명을 알 수 없고, 이것을 생각지 않고 인도문화∙중국문화를 알 수 없다. 『사인(死人)의 서(書)』가 이것을 말하고, 조로아스터가 이것을 말하고, 『우파니샤드』,『바가바드 기타』,사서삼경이 이것을 가르친다. 모든 종교는 갈라진 심장을 고쳐 하나로 합하잔 노력이다." (앞의 책, 56쪽)

"신교자유(信敎自由)는 국법에 요구할 것이 아니고 종교에다 요구할 것이다. 모든 종교는 나밖에 다른 것은 다 이단이라 한다. 이런 생각이 종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세속적인 면에서도 인류의 정력을 얼마나 쓸데없이 없애버리는지 모른다. 한 종교의 절대를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다. 한 종교에 이르는 것은 모든 종교로서만 될 일이다. 죽어 사는 십자가의 정신, 살신성인의 정신, 무위의 정신, 적멸의 정신은 제 믿는 신조에다 먼저 적용할 것이다. 하나되는 데 가장 앞서야 할 종교가 가장 떨어져서 반동적이다. 아마 인류는 옛날에 기른 양 중 가장 좋은 것을 잡아 바쳤던 것 같이 자기네가 이때껏 길러온 가장 아름다운 양심(모든 기성종교의 가장 양심적인 경건한 신자)을 눈물로 잡아 바치고야 하나님 앞에 대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앞의 책, 59~60쪽) (2011. 5.4, 김영태, 내일계속)

김영태 교수는
종교윤리 전공하였으며 종교분야 연구자임. 전남대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재직(1981~2010), 현재 함석헌학회 이사이며, 한국윤리학회 회장을 맡고 있음. 그 동안 한국종교문화학회 공동대표, 종교문화연구소장 등을 지내면서 윤리학 연구 및 종교간 대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왔음.

그의 저서로는 「John Hick의 종교철학」, 「퀘이커 신비주의에 관한 연구」, 「미국 실용주의의 종교관」, 「칸트의 도덕종교론에 대한 신학적 고찰」 등이 있음.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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