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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서평, 독후감

서평: Paolo Giordano, 김희정 옮김,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 은행나무, 2020.

by anarchopists 2020. 4. 22.

서평: Paolo Giordano, 김희정 옮김,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 은행나무, 2020.

 

“저기, 이거 혹시 불법 아닌가요?”

“아이, 아저씨 말하면 안 되는데……”

“아니, 그래도 좀 ……”

“무슨 불법이요?”

“저, 그러니까 뭐 국보법 같은 거……”

“그런 거 생각하면 사랑 못 하십니다.”

“그건 그렇지만 …… 전 자꾸 국가와 뭘 하는 거 같아서……”

“그러니까 눈을 뜨지 마시라는 거예요. 눈 감으면 국가도 싹 사라진다니까요.”

“예……”

이기호, 「국기 게양대 로망스-당신이 잠든 밤에2」,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문학동네, 2006 중에서

 

코로나19는 세계화의 문제이며, 숫자는 관계를 읽어야 할 지표이다!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이미 세계화가 진행된 시대는 국경도, 지역도, 구역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더 확증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바이러스로 인한 고통과 불편, 그리고 죽음의 실체와 우연인 듯 가장하여 필연적으로 조우한 세계적 질병공포의 현상이다. 저자는 오늘날 전염의 확산은 연결, 관계, 범세계화의 지표라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 자신이 과학자이면서 수학이라는 학문이 단지 숫자가 아닌 ‘관계’를 나타내 주는 학문, 즉 실체의 연결과 교환을 의미하는 학문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코로나19로 인한 감염자가 단순히 수치적 통계의 기호보다는 그것이 함의하고 있는 ‘관계’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 인간은 자연의 시간이 아니라 자연에 인간의 시간을 부여한다. 나아가 야생동물과의 조우는 인간이 그들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요, 환경에 대한 폭력, 도시화로 인해서 그들의 영역에서 새로운 병원체를 끄집어 낸 것이라는 생태공간의 이동에 대한 주장은 매우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바이러스는 최적의 숙주로 인간을 택한 것이다. 저자는 “인간은 끝없이 식탐을 부린다”, “바이러스는 환경파괴로 생겨난 수많은 피난민 중 하나다”라는 통찰과 함께 그들을 우리가 쫓아낸 것이라는 탈인간중심주의적인 사고를 요청한다.

감염은 징후다! 생각을 하라는 징후다!

인간은 더 이상 인간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다. 오히려 섬세하고 숭고한 생태계에서 인간이야말로 가장 침략적인·약탈적인 종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전문가적인 분석에만 맡기지 말아야 한다. 시민(민중)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포도피어슨병균이 올리브잎을 마르게 한다고 해서 그것 또한 중국인에 의해서 생긴 문제라고 호도하는 것은 지나친 인종차별적 분석이다. 지금 우리는 새삼스럽게 ‘고독’이라는 현상과 맞닥뜨리고 있다. 그런데 역으로 신중함을 기한다고 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묘한 기호적 장치로 자신과 타자를 분리시킨다. 사회적 거리는 자발적 고독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것은 배타적 시선, 배제의 트라우마, 그리고 격리의 딜레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개별적 자유와 공동체의 질서 사이, 즉 개인의 이익과 타자의 이익 사이에서 갈등을 하게 된다. 타자를 배려한다고 하면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은 다시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욕망으로 변질되어버렸다. (독자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마스크를 착용하든 안 하든 그것은 개별적인 인간의 자유로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저자에 따르면, 연대감 부재는 상상력이 결여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공포와 두려움이 커지면 커질수록 불신과 배타성은 상대적으로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평자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전문가 (집단), 국가, 정부, 심지어 미디어가 발언하는 모든 정보에 대해서 시민 스스로 논쟁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이러스는 숙주를 필요로 한다. 어차피 살아 있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바이러스는 최적의 숙주인 인간을 이용하지 않겠는가. 퇴치, 격멸, 전쟁, 방역 등의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들을 인간의 영역에서 몰아내겠다고 한다면, 바이러스도 자신의 생명본능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더 공격적이지 않을까. 공존을 모색하지 못할 바에야 생각을 바꿔야 한다. 저자의 마지막 말이 인상적이다. “인간들이 자취를 감추자 오리들은 분수로 돌아왔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다. 이것을 희망의 표시로 봐야 할지, 다소 불길한 징조로 봐야 할지 모르겠다. 전염의 시대에는 아름다움조차 의심하게 된다.”

코로나19는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이것을 깊이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자연과 공존하고 상생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지금까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상이 변칙적인 삶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서 적이 당황스러워 하고 있다. 사유와 깨달음이 병행이 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날 수를 세는 시간 외에 날에 가치를 부여하는 생각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 한번 깊이 깨닫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저자가 “우리의 능력은 자신에게 가하는 형벌”이라고 하였듯이, 지금의 고통과 죽음이 자연이 인간에게 가하는 징벌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생각은 생각을 괴롭힌다!

‘공포’를 의미하는 ‘Panic’은 그리스 신화 속 삼림과 들의 신 Pan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신이 소리를 지르면 얼마나 컸던지 다들 놀랐다고 한다. 자연이 포효를 한 이 공포가 예사롭지 않다. 유일한 백신은 신중함이라고 저자가 말을 했지만, 그 신중함이 지나치면 다시 인간 자신의 생명력 보호 본능에 의해서 잠정적 감염자로 인식되는 모든 인간에 대해서조차도 또 다른 적으로 간주하는 폭력적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평자는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마스크가 갖는 개인과 사회의 가림막(평자는 보호막의 기능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배타적 가림막에 무게 중심을 둔다)과 바이러스를 대하는 나의 자유 사이의 경계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분명히 시선의 폭력이 존재하니 말이다. 신중함을 가장한 잠정적 감염자로 인식하는 그 눈빛의 폭력에 평자는 바이러스조차도 평화적 몸짓으로 만나고자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노출을 한다면 믿어줄 것인가.

질병에 대해서도 폭력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이 모색되려면, 적어도 이성적 공동체인 인간이 서로 신뢰하고 개별적인 위생능력을 존중해야 한다. 그것은 반드시 국가나 정부일 필요는 없다. 전체주의, 국가주의적 시스템이 가동되는 강제와 폭압적 치료 체제가 반드시 옳다고 볼 수 없다. 방역의 책임을 국가에게, 집단에게 물어서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은 무사유나 다름이 없다.

시민(민중)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서 내려진 결정에 의해서 자신의 건강의 몫에 책임을 다하면 될 일이다. “감염은 징후다”라는 말에는 반드시 바이러스에 국한된 말이 아니다. 그것은 개별적인 인간과 사회 공동체의 관계가 와해될 수 있는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날 때 발생할 수 있는 폭력과 살인의 형태를 예측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저자의 책 제목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 질병 혹은 감염이라는 현상도 결국 철학적 사유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그들 마음속에 있던 정부를 깨끗하게 지워버린 상태였다. 이제 그들에게 지시하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오직 방사능과 회색 낙진뿐이었다”(이기호, 「囚人(수인)」,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문학동네, 2006) 이기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말이다. 인간의 사유와 행동이 환경세계를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는 비관적 전망이리라. 이는 “사람은 자연의 아들”로서 “불살생(不殺生), 산 물건을 해치지 말자”는 함석헌의 다급한 생태적 삶의 외침과 연결지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대학 강사,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청장관(靑莊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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