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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사상

[김조년 제1강] 이럴 때 함석헌 선생님이 계셨더라면

by anarchopists 2020. 1. 30.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3/19 09:37]에 발행한 글입니다.

[김조년-시대의 낌새와 소리: 함석헌의 화두를 중심으로, 제1강]


시대의 낌새와 소리
-함석헌의 화두를 중심으로-

화두는 우리가 무엇을 할까 라는 질문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내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과 함께 개인생활이나 사회생활의 기본 되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질문을 어떻게 던지고 받는가에 따라서 그에 대한 정당한 응답이 나올 것이다. 오늘 우리가 논의할 것은 바로 이 질문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와 직결된다. 그것을 찾아보는 데는 실제로 우리 사회에 있었던 예를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은 더 좁혀서 보면 어떤 사람이 어떤 문제를 놓고 어떻게 씨름하였는가를 살피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다른 측면으로 보면, 지금 이 시대에 그가 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가 하면, 왜 그가 이 시대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가를 따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또 그가 만약 그 시대에 없었다면 우리 사회가 어떠했을까 하는 물음과 같은 것이며, 그것은 그 사람이 화두를 놓고 어떤 씨름을 하였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이 때에 그가 있었더라면’ 하는 말을 듣는다.

여러 분야에서 그런 말을 하겠지만, 시대와 관련하여 제 주변에서는 ‘이러한 때 함석헌 선생님이 계셨더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함석헌 선생이 당신의 시대에 어떤 일을 하였는가를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1. 왜 함석헌인가?
1901년에 출생하여 1989년에 세상을 떠난 함석헌은 금세기에 한국이 나은 가장 큰 사상가에 속한다. 어떤 비평가는 원효 다음에 위대한 인물이 함석헌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한국의 가장 큰 사상가가 셋인데, 그들은 원효와 율곡과 함석헌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 세 사람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은 모두가 종교인이라는 점, 그들은 각각 자기가 믿는 한 종교에 몸을 담고 있었으면서도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과 수용을 깊이 하였다는 점, 자기의 고유한 사상체계를 형성하였다는 점이다. 동시에 그 당시 본인들이 살던 시대의 민중의 삶과 아픔을 그들의 사상체계 형성의 기초로 삼았다는 점이며, 행동과 사색을 꼭같은 비중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물론 다른 점은 한 사람은 불교인이요, 한 사람은 유교인이요, 한 사람은 기독교에 몸을 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각각 자기 시대의 주류 종교체계에 몸을 던졌다. 그 중 함석헌은 아직 주류가 되지 못한, 그러나 주류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흐름으로 가진 종교에 자신을 던졌다.

그의 삶은 매우 특이하다. 평안북도 용천의 변두리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을 보내고, 나라가 주권을 빼앗기고 허덕이던 사회분위기를 맛보면서 자란다. 그 때 기독교의 흐름을 접촉한다. 평양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완전히 주권을 상실한 식민지인의 삶이 어떠한 것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차에 1919년 3ㆍ1독립운동을 경험한다.

특별히 그는 민족주의운동에 관여하였던 친척의 영향으로 평양에서 일어난 학생만세운동의 주동자 역할을 한다. 그 뒤 학교를 그만두고, 정주군의 오산에 있는 민족운동가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에 편입한다. 이곳에서 그는 위대한 스승 두 분, 즉 이승훈과 유영모를 만난다. 이곳에서 기독교와 민족의식의 접촉이 어떠함을 경험한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5년간 공부하면서 일본식의 독특한 기독교인 우찌무라 간조의 무교회운동을 경험한다. 이 때 평생동지라고 할 김교신, 송두용 등을 만난다.

이 무렵 관동대지진을 경험하면서, 무고한 한국인들이 일본 사람들에 의하여 희생되는 것을 목격하고, 평상시와 위기 시에 달라지는 인간의 모습을 경험한다. 이 경험은 그의 인간관형성에 커다란 계기를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귀국하여 신앙동인지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성서를 조선 위에,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자는 포부를 펼친다. 이것은 독특한 기독교운동이면서 민족운동, 즉 독립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탁월한 인격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일제의 문화정책이 심화되면서 더 이상 학교에 남아서 민족혼을 가르칠 가능성이 없어졌을 때 학교를 스스로 떠난다.

그 뒤 농사와 신앙과 교육을 통합하는 공동체운동을 전개한다. 그 첫 시도가 평양근교에서 벌인 송산농산학원이었다. 그러나 일제에 저항하는 운동을 벌인 사람들과 연결되었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1년을 감옥에서 지낸다. 그러는 동안에 농산학원은 폐쇄된다. 그 뒤 또 한 차례 ‘성서조선’지 사건으로 감옥에 간다.

물론 그는 그러기 이전에 동인지 형태로 나온 성서조선 지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란 글을 총독부의 검열을 거쳐 발표한다. 여기에서 그의 독특한 역사관, 즉 예수의 고난과 한민족의 고난을 연결 짓는 ‘고난사관’을 개척하고 발전시킨다. 한민족의 수없이 반복되는 많은 고난의 의미는 결국 세계를 구원할 뜻이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고난 속에 구원이, 해방이 있음을 강조하여 식민지 치하에 신음하던 민중에게 희망을 준다.

해방을 맞은 뒤 그는 새로운 나라에서 평안북도 문교부장을 맡는다. 오늘날로 하면 평안북도 교육감 정도가 될 것이다. 이 때 사회주의, 공산주의 소련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이 일어난다. 이른바 신의주 학생사건이 그것이다. 그는 그 학생의거에 책임을 지고 고난을 받는다. 그러나 더욱 그 체제에서 견딜 수 없어,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 1947년 남하하게 된다. 남쪽에서 그가 겪은 생활 역시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좌우익의 갈등과 6ㆍ25전쟁으로 민족이 피폐하여지고 망가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 무렵 그는 깊은 사색에 잠기면서 종교문제에 깊이 관여한다.

물론 기성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 성서로 돌아가는 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면서도 성서와 동떨어진 현실교회의 문제를 지적한다. 그 뒤 월간교양지 ‘사상계’를 통하여 사회비판ㆍ사회발언을 시작한다. 이것이 그가 한국사회를 향하여 던진 예언자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자유당 말기의 독재체제에 그의 사회비판은 매우 신랄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무렵 5ㆍ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서 민주주의와 자유가 유보되는 양상을 가지게 된다.

이 때 그는 자유, 민주주의, 인권, 민족, 씨알, 평화의 이름으로 글을 쓰고 대중강연에 나선다. 잠잠하던 명상가요 묵상가의 자리에서 씨알을 향한 예언자로서 하늘의 소리, 시대의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이것은 바로 60년대라고 할 수 있다. 한일회담과 산업화와 외국차관을 축으로 하는 경제발전과 반공을 국시로 삼아 국가안보정책을 펼치던 때다. 따라서 개인은 국가의 부속물처럼 전락되던 때, 그는 인간 삶을 규정하는 국가와 사회와 경제의 본질문제를 표면에 떠올린다. 이것이 민주주의요, 인권이요, 민족이요 씨알(민중)이면서 자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방법은 간디와 톨스토이와 예수에게서 배운 비폭력 평화방법이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언론, 노동, 농업, 통일, 민주화의 논쟁과 투쟁의 핵심에 자리를 잡는다.

1901년에 태어나서 80년대 말에 세상을 떠난 그는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스란히 자신의 삶을 살았다. 전통국가인 조선이 주권을 잃고, 왕정이 일본의 식민통치로 넘어가면서 국가가 망하고, 망한 국가와 민족을 다시 세우기 위한 싸움에 참여하고, 조국해방과 분단의 정국에서 아픔을 경험하면서, 민족과 국가와 종교와 이념체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상체계와 삶의 양식을 창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것은 어떤 제도나 국가의 명령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성숙된 씨알, 맨 사람인 개개인의 깨달음과 스스로 하는 실천에서 새로운 미래를 보고자 한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자기를 교육하고, 하나의 세계를 믿고 모든 씨알이 손을 잡고 나가며, 종교와 종파 그리고 정치세력과 관련을 맺지 않고, 어떤 권력숭배에도 저항하며, 모든 악과 싸우되 같이 살아가면서 비폭력으로 평화를 실현하는 씨알과 그러한 씨알이 꾸리는 사회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함석헌의 생애를 따라서 한국사회를 보는 것은 한국사회의 현대변화를 보는 것임과 동시에 현실의 모
순을 극복하고 미래를 여는 계기를 찾는 것이 될 것이다. 미래는 바른 인간의 모습과 그 인간의 모습을 지닌 해방된 사회의 얼굴을 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은 그가 던지고 스스로 고민한 그 시대의 화두를 중심으로 간단간단히 생각하여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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