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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평화

[김영호, 개회사] 간디의 길 함석헌의 길- 길을 묻는다.

by anarchopists 2020. 1. 2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2/25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김영호, 개회사]


간디의 길, 함석헌의 길
-길을 묻는다.

종교는 종교대로 독선주의와 상업주의로 판칩니다. 교육, 언론, 종교의 공통점은 본래의 공익성을 버리고 사유화, 기업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에 있어서도, 이는 세계에 유례가 없습니다. 중동에서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세 종교를 받드는 국가들이 자기 길만 옳다고 서로 각축을 벌이다가 중동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가 되어있습니다. (그 화약고는 한국사회에도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들은(그리고 우리들도) 지금이라도 간디나 함석헌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함석헌은 말했습니다.

진리의 산에는 오르는 길이 이 길만이 아닙니다. 나만이 전부를 다 안 것이 아닙니다. 걷는 그 자신에겐 이 길 외엔 딴 길이 없단 말이지 객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많은 사람이 얼마든지 기어오르는 길이 있습니다. 절대의 자리에서 하면 길은 유일의 길입니다. 하지만 상대의 자리에서 하면 무한한 길입니다. 종교란 것은 상대계의 일이지 절대가 아닙니다. 기독교조차도 여러 종교중의 한 종교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종교라도 거기 하나님을 가두어둘 만큼 클 수는 없습니다.”(『역사와 민족』315)

신과 진리를 찾는 길이 무엇인가를 간디에게 물어봅시다.

“신(하나님)을 찾는 유일한 길은 그를 그의 창조물(피조물) 속에서 보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만물을 섬김으로서만 될 수 있다. 나는 전체의 한 부분이며 꾸러미일 뿐이며, 그리고 나머지 인류를 떠나서 따로 신을 찾을 수 없다. 내 동포는 가장 가까운 내 이웃이다. 그 동포들이 너무나 절박하고, 가진 것이 없고, 너무 무기력해서 내가 전심으로 그들을 섬기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내가 신을 히말라야의 동굴에서 찾아야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다면 당장 그리로 달려가겠다. 그러나 나는 인류를 떠나서 따로 신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Gandhi On Christianity, p. 74)

안 보이는 신을 찾는 대신에 보이는 이웃을 돌봐야한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 아닙니까?) 간디는 파키스탄의 분리를 가져온 힌두교와 이슬람의 갈등을 극복할 종교다원주의를 말하고, 그 때문에 암살당할 것을 예측하기라도 한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종교적 스승들이 전해준 진리의 메시지를 믿는다. 그리고 나는 나를 헐뜯는 자들에 대하여 노여운 감정을 결코 갖지 않도록, 그리고 설사 암살자의 총탄의 희생이 되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나의 공격자에 대한 분노나 욕설의 말을 한 마디라도 내 입술에서 뱉는다면 내가 사후에 두고두고 협잡꾼으로 기억되어지도록, 늘 기도하고 있다.”(Gandhi On Christianity, p. 74)


함석헌과 간디는 이렇듯 폭넓은 공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비폭력 사상과 실천, 종교적 세계관과 다원주의적 종교관, 열린 세계관, 온고지신의 정신 등 동양전통의 바탕을 공유한 드문 지성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길을 다시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몸의 길이냐, 마음의 길이냐, 정신과 영의 길이냐, 구분하고 결단해야 할 시점입니다

간디와 함석헌은 정신/영의 길을 보여주고 가신 이들입니다. 인류사회가 새로운 사회공동체와 신앙공동체(승가)를 실험할 시기에 다다랐습니다. 온고지신의 ‘옛길-새 길’이 아울러 밝혀져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제3의 길이라고도 할 것입니다. 함석헌은 (동양)철학적으로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제도와 사상이 그 자체의 가지는 모순 때문에 필연적으로 망하는, 역사의 어쩔 수 없는 법칙 때문이다. 그래야 새 것이 나온다. 새 것이 무엇이냐? 세계문제는 둘 중 하나를 고름(二者擇一)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다 져야한다. 그리고 보다 높은 제3자가 나와야 한다. 그보다 높은 제3자의 자리가 중도다. 하나님은 위에도 안 계시고 아래도 안 계시고 중에 계신다. 중이 하늘이다. 중은 중간이 아니다. 중심이지 심이다. 속이다. 극(極)이다. 이쪽도 저쪽도 아니요다. 전에도 후에도 어제도 아니요 이제다. 유물도 유심도 아니요 삶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다. 한이다. 그래, 중도는 한 길이라 하자. 만국, 만민, 만물, 만신이 다 가야 하는 길이다.”(저작집1:296)

제3의 길은 결국 인도의 ‘중도’를 거쳐서 우리의 ‘한’에 이른 길입니다. (하나님은 ‘한-님’입니다.) 우리는 그 길에 이르고자 한 뜻으로 모인 길동무, 길벗들입니다.  민족시인 윤동주도 새 길을 걷고 싶어 했습니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새로운 길’은 개인마다 다 다를 수 있습니다. 함석헌이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는 우찌무라고 나는 나다” 했듯이, 각자의 입지와 출발점이 다릅니다. ‘한’ 길은 하나(一)이면서 여럿(多)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김영호, 끝)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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