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평화

[김영호 개회사] 간디와 함석헌의 길

by anarchopists 2020. 1. 2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2/24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제2회 함석헌평화포럼 학술발표회 개회사]


간디와 함석헌의 길

나(개체)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를 넘어서, 우리(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함석헌이 말한 ‘뜻’이나 목표로 향하고 있는가. 늘 되물어야할 물음입니다. 묻기나 하면서 살고 있는가. ‘나’안에 갇혀서, 작은 ‘우리’ 안에 갇혀서 물을 겨를이 없는 것인가 자문해봅니다. ‘말할 수 없는 도’(道可道非常道)라든지 ‘길 없는 길’이라고 하지만, 길(道)은, 한자의 뜻처럼, 말로 가리켜져야 길입니다. 곧 말이 길입니다. 가는 것이 길이지만, 길이 저기가 아니고 여기라고 가리켜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자기 길을 걸어온 여러분에게 길을 묻는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아직도 함석헌과 간디가 그 극복을 강조한 개인주의 시대, 나-홀로주의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기껏해야 ‘나’들이 합친 ‘나라’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아니 그 이전의 부족주의, 씨족주의에 갇혀 있습니다.
간디와 함석헌은 이기적인 ‘나’와 좁은 ‘우리’를 넘어서 전체가 참답게 함께 사는 길을 제시하고 실천한 분들이었습니다. 폭력과 탐욕, 금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간 분들입니다. 철저히 사리사욕과는 거리가 먼 공인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선공후사(先公後私)를 넘어 대공무사(大公無私)의 길을 보여준 20세기의 대표적인 만인의 귀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공인을 찾기가 힘든 형국입니다.

두 선지자는 같이 사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간디는 종교가 다르더라도 현재의 파키스탄이 따로 분리되지 말고 같이 살아가야한다고 외치다가 암살당했습니다. 함석헌은 ‘같이살기운동’이 살길이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이 뜻을 받들자고 그를 가까이서 배우던 분들이 말만 앞세우는 학자들을 보다 못해 앞에 나섰습니다. ‘같이 살기 평화운동’입니다.) 이제 말, 이론보다 실험, 실천입니다.

간디는 평생 자기가 진리라고 확신한 것을 삶 속에서 실험하고 실천했습니다. 그의 자서전은 ‘진리 실험의 이야기’입니다. 실험하여 찾아낸 것이 비폭력의 원리입니다. 비폭력은 진리에 이르는 구체적인 길입니다. 진리처럼 종교가 내세우는 사랑(자비, 인)도 아직도 추상적인 관념에 그치기 쉽지만 비폭력은 구체적입니다. 간디는 비폭력과 진리를 동일시했습니다. 비폭력의 길은 그가 평생 검증한 진리의 길이었습니다. 비폭력은 남을 해치기보다 자기희생을 수반한다고 외친 그 스스로가 폭력의 희생자가 됨으로서 그는 뜻을 다 이루고 갔습니다.

함석헌은 20세기의 가장 험난했던 민족사의 한 시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민족과 함께 겪으면서 비폭력적인 참 사랑의 길만이 민족과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그보다 더 이 나라 정치의 민주화에 공헌한 인물이 있습니까 민주화 운동에서 화염병 같은 폭력적인 측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 기조는 비폭력 운동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의 폭력’이니 ‘방어적 폭력’이 필요하다고 떠들었지만 결국 비폭력 운동의 승리였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의 모델은 누구보다 함석헌이었습니다.

폭력, 비폭력의 한계와 범주는 어디까지일까. 물리적 폭력은 그 한 가지 종류일 뿐입니다. 마치 기독교성전에서 ‘간음’이난 다른 죄가 신체적인 것만이 아니듯이, 폭력은 신체적인(身) 것 이외에 언어(口) 폭력, 생각/마음의(意) 폭력까지 포함합니다. 인도 전통에서 열거한 유형들입니다.

이 사회를 보십시오. 겉은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이 세 가지 폭력(물리적, 언론/언어적, 이념/사상적)이 난무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정치를 보자면, 이 정권은 자기 쪽이 아닌 사람을 자의적으로 제거해왔습니다. 경찰, 검찰, 감사원 등 모든 사정 기관을 동원해서 쫓아냈습니다.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했더니 법관들과 대법원장까지 비판,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무자비한 권력은 양심 있는 두 전 대통령까지 죽게 만들었습니다. 임금보다 더한 권력과 폭력을 행사하는 최고 권력자 한 사람이 강과 신도시 문제까지 만사를 좌지우지하는 나라, 과연 진정으로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국가입니까. 대통령제는 군주제와 다를 바 없이 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면 부지런한 국민이라 생산지수는 올라갈지 모르지만 양극화가 심화되어 가진 자의 폭력이 더 심해질 것은 뻔합니다.

정치의 생리가 그런 것이라면, 함석헌의 말대로, 희망을 둘 데는 교육, 언론, 종교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입시학원인 학교인지 구분이 안 되는 교육이 있을 뿐입니다. 강제된 교육은 아이들에게 폭력입니다. 학교 내 폭력은 아이들이 가정과 사회에서 배운 대로 하는 짓입니다. 언론은 어떠한가. 현대사회에서 언론은 그보다 더 중요한 사회기관은 없다고 할 만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언론이 종교다’(함) 할 정도로 역할이 비대해졌습니다. 그런데 올바른 정보를 공급하고 진실을 밝히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능은 없고 집단의 사익만 추구하는 기관이 되었습니다. 대중은 그들이 선택하여 공급해주는 대로 정보를 먹고 삽니다. 경박한 연예 프로가 방송매체를 지배합니다.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