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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토요 시사

사월혁명 50주년과 사회현실- 4.19시기 학생의 의미를 중심으로

by anarchopists 2020. 1. 1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4/24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사월혁명 50주년과 사회현실-민생의 항거

올해 50주년을 맞이하는 사월혁명은 국가기념일이면서, 그 기념이 기억 속에서 멀어지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이 작금의 실정이다. 1960년 당시 김 주열이 시신으로 떠올랐던 마산 중앙부두에서 최근 50년사에서 전무후무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실종 26일 만에 떠오른 김 주열의 시체는 바다 속에서 표류하며 낀 부유물조차 씻어내지 못하고, 으례히 하는 시신을 깨끗이 닦아내는 염도 치르지 못한 채, 경찰에 탈취되어 야밤을 틈타 그의 고향 야산으로 향했기에, 장례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이 4월 11일이 4.19 학생들이 앞장선 민중봉기의 도화선으로 되는 역사를 마산 현지에서 되돌아보는 해원과 다짐의 자리로서 장례식이 50주년만에 치러졌다. 마산 시 곳곳에 3.15 부정선거에 항거해 나선 그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음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데도, 국가 기념일의 대상인 김주열 열사의 장례에 도와 시의 어떤 인사도, 어떤 공무원도 볼 수 없었다.

단순히 기억을 살리는 기념의 자리로 끝난다면 굳이 전국의 주요 시민 사회 단체 인사들이 거기에 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 4.19 영령 186위의 영정과 만장이 ‘산자여 따르라’고 앞장서 마산 시가지를 누비지도 않았을 것이다.



4.19 시기 학생의 의미
대구 2.28 학생에서 3.15 마산 학생, 4.18, 4.19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에서 학생들의 항거가 민중들을 이끌었다. 1960년의 한국 사회에서 학생들은 무엇보다도 인구의 8할을 차지하는 민중의 아들, 딸들이었다. 고등학생, 대학생 언니 오빠들에게 발포하지 말아달라는 호소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 여학생의 말이었다.

초등학생의 희생자 숫자도 결코 적지 않았다(186명 희생자중 19명, 대부분 서울 초등학생들이다. 고등학생 희생자, 대학생 희생자가 상당수를 차지하지만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하층 노동자, 빈민들의 희생이 더 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학생궐기에 민중봉기라는 성격이 부여된다. 이승만 독재에 저항하는 슬로건으로 “못살겠다, 갈아엎자”라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슬로건이었다.

부정선거로 민중의 주권행사를 가로막고 독재를 영구화시키려 한 데 대한 저항만으로 ‘못살겠다 갈아엎자’라면서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항거로 발전되지는 않는다. ‘못살겠다’라는 피부에 느껴지는 ‘사회 현실’이 항거를 잡아당기는 것이다. (먹어서는 안 되는 수입 쇠고기에 촛불이 타오른 것과 비교한다면, ‘못 살겠다’라는 말이 가리키는 총체적 위기의식 표현의 함의가 이해 될 것이다)

초등학생부터 중고,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왜 못 살겠다’는 의식을 표출하게 되었을까. 당시는 대학생 숫자가 전국에 걸쳐 10만이 약간 안 된다. 그 대학생들의 7할 가까이 항거에 나섰다. 4.19 초기 여기까지는 그 후 학생운동사처럼 운동서클 등이 학생 대중을 이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사회 현실’ 자체가 ‘사회 인식’을 제공하는 학교였다. 무엇보다도 해마다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보릿고개, 이를 비웃듯이 뻗어가는 매판 재벌들과 이승만 정부의 부정부패, 학교 가기가 어려웠다.

민생의 어려움이 나이 어린 초등학생들조차 자고 일어나면 나날이 겪는 일상생활에 고스란히 파고들었다. 인구의 8할이 농업으로 먹고 사는데 곡가는 전년비 계속 하락해왔다(미국의 대한 원조경제가 요구한 저곡가정책) 농가 가처분소득의 대부분인 곡물 판매 수입은 감소하는데 이승만 정부 독재 12년 사이 물가는 거의 300배의 폭등 양상을 보이며 급격하게 국민 대다수를 수탈의 질곡에 빠트리고 버틸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런 터에 농민의 아들 딸들이 대부분인 이 땅의 학생들이 어떤 ‘사회 인식’을 가지게 되겠는가?

이것이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 나아가 대학생들이 독재에 저항하는 도화선을 당길 수밖에 없는 사화사적 원인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학생들과 하층 노동자, 빈민들이 이승만독재 아성에 저항하게 되는 상황의 절실성을 여기서 알 수 있다.

-당시 초등학교도 미쳐 못 나온 비슷한 나이의 전 태일이 1971년, 민생의 바닥에서 허덕이며 노동의 대가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던 나이 어린 노동자들의 앞장에 서서 항거의 길을 가게 된 것도 ‘사회 현실’ 자체가 “사회 인식”의 현장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던 생생한 사회사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오늘 역사적 현실의 재인식 계기로 삼아야 한다.

가르쳐주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깨우친 것이다. 즉자적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직 그 다음 단계의 방향성를 담보하는 대자적 인식의 단계로 까지 갔던 사람들은 물론 소수였다. 이승만 독재가 미국원조의 수혜물로 빈부 양극화를 조장하고, 관료독재와 매판 재벌을 번성시키며 이를 위해 유포시킨 분단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데에 진정하게 민생 해결의 방도가 있음을 자각시켜가는 운동이 이후 분출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문제의 출발은 ‘사회 현실’- 민생으로부터였다. 4.19의 기억이 소수에 머물고 일부 학교의 체험학습 시간에서나 만나며 자칫 박제화되어 저 멀리 머물러 있는 듯 보일 수 있다. 4.19 50주년 학술토론회에 정성을 기울여도 대부분 학자들의 논문 발표를 듣기 위해 그리 많은 젊은이들이 참가하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젊은 학생들 스스로가 4.19의 주제와 원인, 사회사에서의 교훈을 찾는 프로그램을 가진 지역에서는 4.19는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역사가 아니다.

민생위기가 첨예화되고 사회 양극화가 극단화되고 있는 오늘 이 땅의 아들 딸들, 100여 만의 미등록 대학생, 휴학생, 수 백만 비정규 노동 청년들에게는 ‘사회현실’의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4.19 전후의 ‘사회 현실’-민생-은 오늘 ‘사회인식’의 토양을 제공함에 다름 아니라고 인식하게 되는데 ‘4.19 50주년 사회 현실’-민생의 현 시대 사회사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박석률)

박석률 선생님은

▲ 박석률님
박석률 선생님은 74년 민청학련사건에 관련되어 옥살이를 했다. 석방 이후에는 한국진보연대를 통한 민주화운동,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공동대표 등을 통한 민족통일운동을 계속해 오다가 지금은 민주화운동정신계승 국민연대, 사월혁명회, 평화와 통일을 사랑하는 사람들 등에서 민족, 민주, 통일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현재 "생명평화경제만민포럼" 대표이다. 저서로는 한반도의 당면 과제인 북핵문제와 관련해 펴낸 <자주와 평화, 개혁으로 일어서는 땅>(백산서당, 2003)과 <자주와 평화 누가 위협하는가> (풀무 2002), <씨알의 희망과 분노>(공저, 동연, 2012)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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